• 신화와 정치 사이 - '패권주의' 문제
    [연속기고⑤] 사람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는 진짜 헤게모니를 찾아야
        2012년 07월 24일 1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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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권 = 헤게모니?

    패권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패권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대뜸 헤게모니(hegemony)라는 역어가 등장한다. 설명 역시 내가 아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그 헤게모니가 맞다.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나름 정성스러운 설명까지 곁들여 패권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Gramsci,1891~1937)라는 학자의 저서 옥중수고(Selection from the Prison Notebook)에 의하면 헤게모니는 어떤 사회의 지배적 사회 집단이 사회 전체를 지적·도덕적으로 감독하고 그들의 목적을 지원할 새로운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생산 및 분배를 이념적으로 통제하여 다른 집단의 동의(同意)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헤게모니라고 부르기에는 지금 이야기할 “패권주의”는 어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패권주의는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나타난 그 황당한 스펙터클과,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비롯한 NL의 분파들이 진보진영 내에서 보여 왔던 행태다. 그런데 대관절 이런 모습의 어디에 동의와 지적 ․ 도덕적 리더십이 있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의 그 무시무시한 조직력을 이야기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것은 그들이 진보정치 내부에서 아무리 주류이자 권력집단으로 행세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 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라는 것이다.

    그들이 폭력을 불사하고 지키려 했던 대의는 대중의 짜증만을 유발했다. 끝없이 암약하며 배후의 실세로 군림하던 그들의 공식적인 데뷔는 명백히 실패다. 심지어 회복할 수 있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왜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나름대로 대중정치의 큰 뜻을 품었고, 그마저도 암약의 결과이긴 하지만 국회의원도 배출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대중의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계속해서 돌진했다.

    자신들의 분파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이전투구는 좌우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파들의 비교적 깔끔한(?) 버전과는 다르게, 진보진영에서 벌어진 사건은 진영 전체의 공멸을 불러일으킬 만큼 격렬했다.

    5월 12일 중앙위 파행 모습(사진=통합진보당)

    물론 이것은 진보정치의 허약한 입지나, 진보정치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이미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떠나서 근본적으로 드러난 것은 진보진영 내부의 깊은 골이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인 조정의 여지도 없었고, 불신과 불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소위 구 당권파가 보여준 행태는 해명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편의상 “패권주의적 행태”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역사적 뒤틀림이다. 미리 결론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패권주의적 행태의 요란함 뒤에는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패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라는 ‘가상’

    소비에트의 멸망을 경험했던 PD들과는 다르게, NL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념적 대상인 북한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북한을 추종하든, 혹은 통일된 평화로운 민족국가를 꿈꾸든 간에 북의 존재는 이들이 여전히 이념적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사실 이 이념성에는 남한에서의 반공주의적 탄압이 큰 몫을 차지했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NL세력에게 역설적인 정당성을 제공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의 피해자이자, 친일친미반공세력의 불의한 탄압에 맞서는 정의로운 존재로 여길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북한은 한국 사회의 마지막 금지구역임에는 분명하다. 레드 콤플렉스는 해소되지 않았고,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북한은 모든 곤란한 사태들의 원흉으로 지목되며 남한에서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통진당 사태에 들어서는 “종북”이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되어 사상검증의 지표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국가보안법은 사라지기는커녕 반자본주의적 활동들에 까지 그 칼날을 들이대며 신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그런데 이 작금의 소동들에서는 빠진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북한이다. 북한은 이 모든 소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 정권이 북한을 내키는 대로 묘사해가며 정국타개의 도구로 사용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보안법이 기소한 간첩들은 “야권연대 주도”를 비롯한 황당한 죄목들로 대중의 빈축을 샀다. 이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것은 “장군님 빼빼로 주세요!”따위의 트윗들을 찬양고무죄로 기소한 것일 텐데, 이 사건을 통해 법은 자신이 한가로이 개인이나 괴롭히고 있는 일진 이상의 무엇이 아님을 몸소 입증했다.

    보수진영의 북한이 이렇게 다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진보진영의 북한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령 통진당의 구 당권파는 그 난리의 이유를 “혁신파가 정당한 절차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불법 중앙위 중단하라!” 라는 그날의 외침을 상기해보자).

    구 당권파는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나, 검찰의 탄압 같은 것 뒤에 숨었다. ‘대체 왜 저 북한이 내 북한이다 말을 못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기껏해야 북한의 3대 세습, 인권탄압, 미사일발사 같은 사안들에 대해 과감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북한의 부재는 오늘날 북한이 남한사회에서 갖는 위상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냉전구도를 체화한 채로 이루어졌던 건국과, 한국전쟁, 이어진 남북간의 진영대결에서 북한은 그야말로 주적이자, 실제의 위협이고,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꽤 오랜 시간동안 남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함과 동시에 남북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서 북한이 갖는 위치는 놀랍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남한의 대중은 북한과의 통일에 들어갈 통일비용을 걱정하고, 남북관계가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한정부의 색깔몰이에 시큰둥해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었다.

    즉 단순히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먹고살기 바빠 기각되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사회에서 점점 흐려졌다.

    이런 가운데 NL은 지난 대선시기의 분당사태와 “코리아 연방공화국”의 대 실패를 통해 자신들의 ‘인기 없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2000년 이후 그들이 조금이나마 대중의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때는 “살림살이가 나아졌냐?”고 물었을 때였지, 통일이나 북한의 영도력 때문은 아니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던 2002년 촛불시위에서도 그들은 깃발을 내리라는 대중의 요구에 당황하지 않았던가.

    깃발은 간데없고, 조직만 나부껴

    물론 이것이 북한이라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에 대한 민족적 동포애나 그것을 절대 악으로 상정하는 적대감 같은 감상을 갖기에 남한의 자본주의는 이미 지나치게 심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서는 특수성으로서의 북한의 정당성 역시,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근본적인 재평가의 압박 속에 놓여있다.

    북한의 대남선전이나 입장표명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스타일들은 이미 남한에서는 패러디와 조롱의 대상이다. 만약 한국 사회의 대안으로서의 북한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를 IQ 430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와 동등한 반열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요컨대 분단문제는 전혀 새로운 조건과 사람들 속에서 급격한 위상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의 담지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기보다는 그것을 일종의 신화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 이후의 행보는 세속화된 종교들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게 돌아갔다. 문제의 근본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며 그것을 절대화 할 때, 현실에서 그것의 공백을 메우며 작동했던 것은 힘과 조직의 논리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보다는 신화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로부터 찾았다. 이 불안정한 존재방식을 보충하는 것은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힘’이었다.

    힘의 이러한 사용방식은 이들이 끝없는 권력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힘은 점차 정당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순환 속에서 조직은 괴물이 되어갔다.

    이 역사적 희생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이들은 고약한 농담 같은 역사적 뒤틀림을 고스란히 체현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갔다.

    방향을 잃은 조직의 지극히도 세속적인 폭주는 점차 조직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이들을 기존의 정치세력과 비교하여 식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는 변절을 한 이들 조차도 버리지 못하는 운동권적 스타일뿐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왜?”라는 질문을 잃어버린 그 치열함과 ‘동지애’야 말로, 이전투구를 위한 가장 훌륭한 태도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증명되고 있을 따름이다.

    방향상실의 시대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의 상실이 단지 이들에게만 한정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과거의 영광이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가령 지난 4.11총선에서 우리는 “반MB”의 실패를 목격했다.

    기억하듯이 반MB역시도 조건들의 변화와 그것에 제기되었던 근원적인 의문들을 무시하고 패권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오만하리만치 떠들썩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그 많던 팟캐스트도, 무한RT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뒤이은 통진당 사태가 보여준 것들을 여기에 더하면 이념, 조직, 정치세력화를 포함하여 민주화로부터 비롯된 진보의 흐름이 모두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NLPDR도, 끈끈한 조직력도, 야권통합도 이 사태를 구원하지 못하며, 민주화원로들과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소환된다면 그것은 민주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는 이미 그 자체의 길을 계속 이어갈 동력을 상실했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을 손쉽게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민주화는 수구적 우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 진보에도 동시에 주어진 동일한 환경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민주 진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추동된 덕에 우파진영의 페널티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한미FTA, 미국산쇠고기수입, 강정해군기지 등등의 문제에서 각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 정부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여기에 대고 할 수 있었던 이야기는 고작해야 “착한FTA”같은 말장난뿐이었다. 게다가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절대 절명의 결격사유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할 이유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부질없는 움직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또 핵심의 부재를 우회하려는 얄팍한 술수들 속에도 정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는 태도 속에도 정치는 없다.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으나, 시작 지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되, 거기에 영합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이다.

    필자소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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