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투사 에셍을 기억하며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⑥
        2015년 10월 22일 11: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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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계엄령 아래에서의 노동자·빈민·학생운동” 링크

    제 9 장 투사 열전

    나는 그의 풀네임을 모른다. 굳이 묻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는 언제나 그냥 동지 「에셍」이었고, 「1/4분기의 폭풍」 시대로부터 시작해 계엄령 하 지하활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급진운동에 몸을 던진 심지가 굳은 노투사였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은 1970년이었고, 그 때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아마 60대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직 15살에 불과했다. 우리 형이 이 세계와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형에게 이끌려 어떤 회합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격렬한 토론을 들으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가 필리핀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독립투쟁의 영웅 호세 리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회의였다는 점이다. 회의 참가자들 대부분이 노인들로 아마도 평균 60세는 되지 않았나 싶다. 에셍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호세 리갈

    호세 리잘 공원의 기념조형물. 스페인군에게 호세 리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묘사

    위대한 노투사 에셍(Eseng)

    어떤 내용이 주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형 오스카는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학생으로 알려져 리잘리스트〔필리핀 독립운동의 영웅인 호세 리잘을 신봉하는 사람〕의 젊은 학생으로 인정받아 그 날 회의에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은 이 모임에 가입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고, 회의에 참석한 목적은 오로지 급진적 청년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KM〔애국청년회〕이 호세 리잘이 이루지 못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노인들에게 설득하고자 했다. 에셍만이 형에게 찬동하는 듯했고, 다른 노인들은 급진적인 학생운동이나 폭력적인 집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 후 나는 에셍이 탕고스에 있는 KM 사무소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KM 나보타스 지부의 첫 번째 사무소였다. 그는 사무소 내에서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우리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거나 집 청소를 하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사무소에 들렸을 때 구겨진 내 바지를 다려주기도 했다.

    젊은 애국청년회의「노인」

    에셍은 KM 나보타스 지부 활동가들에게 “유일한 노인 지부장”으로 불리는 것을 흡족해했다. 급진 활동가는 모두가 젊었고, 에셍은 집회 참가자 중 유일한 노인이었다. 당시는 학생이라는 말이 「활동가」라는 말의 동의어였고, 「활동가」는 곧 「급진적 학생」을 의미했다.

    우리는 젊었지만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도록 애쓰고 있었다. 지프니를 타서 운전사가 목적지를 물을 때, “꼬마”라든가 “꼬마아가씨”따위로 불리는 게 질색이었다. 나이 든 사람들, 또는 노동조합이나 지역의 리더들과 대화할 때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게 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말투를 쓰지 않고, 거의 완벽한 타갈로그어로 부모님 세대들처럼 옛날 스타일의 말을 썼다. 그런 점도 에셍과 우리를 친근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잘 이해했고 우리도 그를 좋아해 서로 고풍스런 타갈로그어로 대화하곤 했다.

    그러나 에셍은 우리와는 세대가 달랐다. 그 역시 세상이나 민중들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지만, 집단토론을 하다보면 그는 항상 민중을 “뒤떨어진 우매한 백성”이라고 폄훼했다. 또한 “민중들의 문제점은 혁명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들은 굶어죽을 정도가 되어야만, 또 죽을 정도가 되어야만 혁명에 동참하려 한다. 그들을 떨쳐 일어서게 하려면 매섭게 채찍을 가해야한다”고 열을 내곤 했다. 우리가 토론을 시작하면 에셍은 항상 모택동 어록 중에 있는 “민중이 진정한 영웅이 된다는 것은….”이라는 구절을 인용해 민중을 비난했다.

    에셍의 괴로운 경험은 「사크달리스타의 날」 (Sakdalista day)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크달리스타」는 1930년대 미국 식민당국에 저항해 일어난 반란을 말한다. 이 운동은 라구나와 불라칸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한때 시청을 점거하고 독립정부를 세우기까지 했으나 식민지 괴뢰정권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리더인 베니그노 라모스는 일본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동경으로 향했다. 「사크달리스타」의 잔존세력들은 1942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일본 제국주의의 필리핀 점령시에 재결집해 「가납(Ganap)당」을 만들었다. 이 당은 일본에 협조했다.

    에셍은 골수 반미주의자인데다 「사크달리스타」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중에 보여준 일본의 아시아나 필리핀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망을 옹호했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이 미국이든 일본이든 유럽열강이든 관계없이 그 어떠한 제국주의에도 반대한다는 데 이르게 되면 에셍은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제국주의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제국주의란 독점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모든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론을 읽어보시라”고 집단토론 때마다 우리는 에셍을 설득했다.

    1972년 나보타스의 KM 지부의 멤버들은 자신들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구해 준 판자 조각과 군용 물자 등을 사용해 사무소를 개조했다. 우리는 총동원되어 기부를 받으러 다니는 한편 판자를 자르고 못질을 하고 지붕을 놓는 등 힘을 모아 탕고스 강가에 고상식의 작은 가옥을 만들었다. 집이 완성된 후 에셍은 새 사무소로 거처를 옮겼고,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를 손 봐 주었다.

    그로부터 2, 3주가 지난 1972년 9월 23일, 계엄령이 발포되었다. 우리는 새 사무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이는 장소를 바꾸고 “사무실을 폐쇄하고 지하활동으로 이행하라”는 당 중앙으로부터의 지시에 대해 논의했다. 에셍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는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들이 불라칸인가 라구나에 있잖아요,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잖아요!” 에셍은 며칠 동안 우리와 함께 행동했다. 야간에 군에 의해 급작스럽게 행해지는 「조닝」(zoning)으로 불린 일제 수색을 피하기 위해 함께 잘 곳을 매일 밤마다 찾아다녔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에셍만은 다른 동지의 집에 있으면서 다시 다음 묵을 곳을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이런 패턴이 이어졌으나 이윽고 대부분의 동지들에게는 별도의 장소에서의 지하활동의 임무가 할당됐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에셍은 필리핀 공산당의 지하조직 멤버가 되어 메트로마닐라 내의 연락을 담당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아마도 그는 그 부대의 「지하 아지트」에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나는 나보타스 남부의 어항(漁港)에서 생선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그 때 “자신의 이름과 출신 등을 감추고 이후 나보타스의 집에는 가지 말 것”을 지시받았다. 임무의 파트너인 여성 동지가 칼루칸에 우리들의 근거지를 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는 빈 시간을 활용하여 계엄령으로 붕괴된 지역 청년조직의 재건을 지원했다.

    오랜 동안 에셍이나 그룹의 다른 동지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시 지하 당 조직 간에는 상호 격리책이 취해졌다. 계엄령 이전의 KM이나 대중조직의 활동과 달리 회의 장소나 연락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 외에는 우리는 다른 그룹과 교류하거나 다른 조직에 속하는 동지를 찾아 갈 수 없었다.

    에셍의 체포

    어떤 동지와의 미팅 중에 탕고스 강가의 KM 사무실에 대한 군의 수색이 있었고 에셍 동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무실을 왜 가! 고집통 노인네가…” 라고 우리는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에셍 동지의 친척이 어디 사는지 혹시 아는 사람? 친척은 면회가 될 텐데…” 나는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주일 후 낭보가 들어왔다. 에셍이 나보타스에 있는 한 동지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에셍은 그 날 석방되었고 당황하거나 이성을 잃거나 하는 모습 없이 아주 편해 보였다고 그 동지는 전했다.

    에셍이 체포된 경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밤중에 KM 사무실에 대한 일제 수색이 벌어졌다. 필리핀 치안경찰 수도권사령부 소속 경찰이 노크를 하면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에셍은 마루에 어질러져 있던 반정부 자료─다음 날 몇 군데의 당조직에 배포하기 위한 서류 더미─들을 처리해야 했으므로 문을 열어주기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에 그는 그 서류 더미를 강으로 던졌다.

    경찰이 격렬하게 문을 두드렸고 에셍은 문을 열려했으나, 그 순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작은 메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일 동지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담배나 빈 캡슐에 넣을 수 있도록 말아놓은 작은 종이조각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그것을 삼켰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덮쳤다.

    랜턴을 비추던 경찰은 그가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을 보고 “뭐야? 그건 뭐냐고!”라며 다구쳤다. 에셍은 더욱 힘들여 씹은 후 완전히 타액에 쩔은 종이조각을 뱉어내며 말했다─ “이거요?”

    에셍은 두들겨 맞았다. 랜턴을 들고 살펴보던 경찰은 사무실 마루에 작은 구멍이 있음을 보자 랜턴을 비췄다. 그러자 강바닥에 뭉쳐있는 인분더미 위에 몇 장의 종이가 보였다. 그 구멍은 수변 가옥이면 어디에나 있는 변소 구멍이었다. 경찰은 “너 지금 반정부활동 문건을 버렸지?”라며 추궁했다. “아니요, 그건 똥 닦은 밑씻개”라고 에셍은 시치미를 뗐다. “그 말을 믿으라고?”라고 하자 “못 믿겠으면 당신이 가서 주워오면 알 것 아니요”라고 에셍이 태연스럽게 대답했고, 그 댓가로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아야 했다.

    에셍은 군 캠프로 끌려가 하룻밤동안 고문을 당했다. 고문자에게 수없이 두들겨 맞으며 “네 일당들 어딨어? 자백해!”라며 동지들의 숨어 있는 곳을 추궁 당했다. 그러나 에셍은 “나한텐 동지 같은 건 없소, 탕고스 강가의 오두막에 있던 건 나 혼자뿐”이라고 버텼다. 그들은 에셍을 꼰대라며 비웃었다. “꼰대 주제에 무슨 공산주의냐”라는 비아냥에 “난 리잘리스트요. 리잘이 공산주의자요?”고 대꾸했다. “넌 이미 늙어빠져서 어차피 오래 못 살 거니까 조용히 처치해 줄 것”이라고 그들이 말하면 “마음대로 하쇼! 어차피 난 꼰대니까…” 에셍은 맞받아쳤다.

    에셍에 의하면 그는 두드려 맞을 때마다 과장된 몸짓으로 넘어지면서 마루를 두세 번씩 굴렀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잠시나마 쉴 수 있었고, 반대로 상대방은 동요했다.(에셍에게 들은 이 방법을 나는 1977년에 체포됐을 때 써먹었다!) 에셍이 정말로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자 고문자들도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에셍은 깨달았다. 놈들 역시 입으로는 죽이겠다고 겁 주면서도 진짜 죽게 되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에셍은 3일 동안의 고문 중, 필리핀 공산당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당과 접촉한 일도 없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도대체 “party”(당)가 뭐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party”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여럿이 모여 먹고 마시고 노는 “파티(party)”고, 두 번째 party는 옛날에는 국민당〔계엄령 전에 있었던 마르코스의 당〕과 자유당〔계엄령 전의 베니그노 아키노의 당〕, 그리고 지금은 「KBL」〔계엄령 발포 후 유일하게 인정받고 있던 마르코스의 당〕밖에 모른다고 잡아뗐다.

    며칠 후 그는 군 캠프에서 풀려나와 불라칸, 칼루칸, 말라본을 헤멘 끝에 나보타스의 한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듣자니 이 괴로운 경험 후, 어떤 동지도 에셍에게 당과 관련된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규율을 지키지 않고 “원래의 KM 사무실에 가지 말라”고 한 당의 방침을 어긴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가 점점 더 나이 들어감에 따라 곧 치매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80년대가 되어 에셍의 비보를 들었다. 그는 새로 마련한 자신의 집에 안착하지 못한 채 탕고스 강가의 옛 KM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 후 시청에서 강가의 불법주택 점유자 일제 소탕의 명령이 내려졌고, 에셍은 퇴거를 강요당했다. 이후 그는 숙박을 제공하는 동지의 집을 전전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는 폐렴을 앓아 합병증을 일으킨 끝에 사망했다고 한다. 나보타스의 동지들은 에셍의 시신을 친척에게 보냈고 친척들은 나보타스의 공동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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