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종말” 선언
    그 후 25년 지난 세계의 현실
        2015년 10월 19일 09: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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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씨가 오슬로대를 다녀갔습니다. 제가 제 수업하느라고 그의 특강에 못 갔는데, 만약 갔다면 그 질문을 꼭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25년 전의 본인의 주장을 이제 와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25년 전, 미국이 쏘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이끌자 후쿠야마는 천하가 “자유민주주의”로 평정됐다고, 영원불멸의 미 중심의 “자유세계”의 개선에 축가를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종말”, 25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주장과 관련하여 실사구시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점을 지적해볼 수 있습니다:

    1. 천편일률적 “민주주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1980-90년대에 지구촌 곳곳에서 민주화 과정이 진행된 것이야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나라/지역이 세계체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서 거기에서 태어나게 되는 “민주주의”의 모습도 천차만별입니다. 역사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세계체제 속의 상황의 위치들의 다양성을 더 재미있게 보여주는 거죠:

    a. 동구가 1989~91년에 형식적 민주화를 거쳐 결국 약 15년 내로 독일-북구권 자본의 경제식민지로 재편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재편을 이끈 것은 동구의 보수적이며 우파적인 중산계층들이었지만, 구주동맹 편입에 따른 서구 이민 자율화가 주는 “추가 소득을 얻을 기회”라는 유혹이 넘어간 상당수 육체노동자도 거기에다 동의했습니다. 결국 동구에서는 “민주화”란 국가 주권 일부의 구주동맹에의 “반납”(?)과 구주동맹의 “특권적 주변부”로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전환은 당연히 격차를 더 벌어지게 하여 어쩌면 사회 불만을 더 키울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사회주의” 유산인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아직도 각종 격차들을 상대화하여 역설적으로 “보수적 민주화”를 가능케 합니다.

    b. 남미 같으면 아무리 미국/캐나다의 경제식민지가 돼도 그 미국/캐나다로부터 노동이민 자유의 특권을 얻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이게 동구와의 차이죠. 또 하나의 차이는 동구보다 중산계층들이 얇으며 또 격차를 상대화시킬 만한 무상 사회적 인프라가 부재하는 등 “극단의 빈곤”은 훨씬 더 가시적이다는 거죠. 그런 지역에서는 1980~90년대의 민주화는 당연히 좌경화를 의미했습니다. 브라질처럼 온건이든 베네수엘라처럼 급진이든 좌우간 동구가 오론쪽으로 간 만큼 중남미는 왼쪽으로 갔습니다. 브라질이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우루과이에서는 아예 지하 게릴라 투쟁 경력의 소유자들이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죠. 동구가 주권의 상당 부분을 구주동맹에 반납한 반면, 중남미는 그 주권을 미국으로부터 되찾은 셈이죠.

    c.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식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과 대만은 지정학적으로 중화권에 훨씬 더 근접하게 됐습니다. 대만 같으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중화권에의 완전한 편입은 시간문제지만, 한국의 경우 경제적으로 편입돼가며 정치적으로 중-미 사이 줄타기하는 형국입니다. 전체주의적 “안보레짐” 사회의 형식적 민주화와 새로운 정치 참여 기회 등으로 주로 중산계층들이 득을 봤으며 그 상위 부분은 그만큼 철저하게 보수화됐습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화된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분산화 과정이 크게 진행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적 투쟁의 가능성이 약화됐습니다. 보수적 중상층 본위의 사회에서 결국 과거의 집권세력들 (대만의 국민당 당수 馬英九, 한국의 이명박근혜)이 2008년 이후에 다시 재집권하여 앞으로의 장기적 권력 유지를 도모하려고 합니다. “보수적 민주주의”라고 하면 지나치게 얌전한 것 같고 사실상 “외형만 남으려고 하는 형해화돼가는 민주주의”죠. 한국은 여전히 미군의 군사보호령이라는 점, 즉 주권이 제한돼 있는 점에서는 동구와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합니다.

    2. “자유주의”는 국제적 교통, 노동 수출입, 그리고 정보화 발달의 (상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후기의 파도 속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증강된 면은 있습니다. 예컨대 중국이나 러시아나 대한민국은 다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사회긴 하지만 출입국의 자유나 국제적 정보교환의 자유 내지 인터넷상의 표현 자유 등을 통제/제한시킨다 해도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중국의 페이스북 비법화 등등) 본격적으로 차단시킬 생각이야 못하죠. 북조선에서도 한국 드라마 DVD들이 유통되고 사실상 중국으로의 단기 노동이민이 합법화돼 있는 상태인데, 그 만큼은 자본주의 후기는 인간 노동이라는 상품의 국제적 거래나 각종 정보상품들의 국제적 거래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욕구에 거슬리는 자유들의 운명입니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형국이죠. 예컨대 체제에 유리한 국가적 대민 감시는, 인터넷과 휴대폰, 신용카드의 도래로 엄청나게 쉬워졌습니다. 국가는 내가 어제 뭘 했고 무슨 생각하고 누구와 교통했는지 알고 싶기만 한다면? 제 신용카드 사용내역과 전자우편, 휴대폰 통화내역, 페북 포스트를 뒤져서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생활 비공개의 자유”는 사실상 폐지됐습니다. 국가 앞에서는 “나”는 완전한 발가벗은 모습입니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등도 특히 준주변부/주변부에서 엄청난 난항을 겪습니다. 중국에서는 자율적인 민주노조 자체는 불법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형식적으로는 합법이라 해도 실제로는 노동운동가를 기다리는 것은 집시법이나 업무방해, 퇴거불응으로의 고발 남발과 살인적 가압류와 손배, 4-5년이나 그 이상 걸리는 세계사 최장의 장기투쟁 등등입니다. 목숨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노동운동 못하는 형국인데 “반쪽 자유”라고 해야겠죠?

    결국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민주도 완전한 자유도 없고, 완전한 비민주나 부자유도 없습니다. 다 그 양극 사이의 어느 “중간 지점”이죠. 그리고 일률적인 ‘자유민주주의’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나라마다 그 자유나 민주의 실질적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죠. 민주주의 발전은 전진과 후퇴의 양쪽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예컨대 지난 15년 동안 동구나 대한민국에서 같으면 민주주의는 상당히 후퇴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앞으로 이 경향을 바꾸자면 큰 투쟁과 큰 희생이 필요할 것이죠.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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