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엄령 아래에서의
    노동자·빈민·학생운동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⑤
        2015년 10월 16일 1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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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와 제3지구의 재건

    1974년에 당 마닐라 · 리잘 지구의 두 번째 재편이 이루어져 1973년의 부문 중심 재편성에 의해 해체된 지구 조직이 재건됐다. 이 재건에 의해 마닐라 수도권 전역 및 리잘 근교의 지역은 다음 6개의 당 지구조직으로 나뉘어졌다.

    제 1지구 ; 마닐라 전역
    제 2지구 ; 케손시, 산후안(당시는 리잘 주)
    제 3지구 ; 마닐라 수도권 내의 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 등 카마나 지구
    제 4지구 ; 남부의 마카티, 파사이, 타귁, 파라냐케, 문틴루파, 라스피냐스 지구
    제 5지구 ; 동부 지역의 파식, 만달루용, 카인타, 파테로스 지구
    제 6지구 ; 리잘 주의 기타 지역(안티폴로, 타이따이, 앙고노, 몽탈반, 모롱 등)과 메트로 마닐라 동부(東部)의 시와 촌

    카 포포이(필몬 라그만)는 카마나 지역에 재건된 제 3지구의 캡이 되었다. 후에 카마나는 당시 불루칸 주에 속했던 발렌수엘라를 통합해 「카마나바」가 된다. 발렌수엘라는 카마나에 가깝기 때문에 새로 제 3지구에 편입되었지만, 공장지대를 포함하고 있어 노동자 조직화의 주요 거점 지구가 되었다.

    제 3지구의 재건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지구 조직 간부들 중 중앙조직에 발탁되거나 신인민군 참가를 위해 벽지로 간 사람이 있었고, 개중에는 필리핀을 떠나거나 운동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임시지도부의 재건에 악전고투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포이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동지와 함께 임시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이 결정됐다. 포포이와 나는 1973년 당 재건 때 중앙 노동조합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줄레스와 아넬이라고 하자)은 지역 조직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임시위원회를 이끄는 캡을 선출하기 위해 어느 날 우리는 회합을 가졌다. 줄레스가 이 지구의 조직국에 있을 때 생각보다 활약이 시원치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포포이는 그가 캡이 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줄레스는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고, 일에 대해서도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아넬은 줄레스를 밀고 있었다. 서로간의 감정이 드러나는 오랜 토론 끝에 우리는 비밀투표를 했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내가 2표, 포포이 1표, 줄레스가 1표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알고 보니 나는 포포이에게 투표했고 아넬은 줄레스에게, 그리고 포포이와 줄레스가 내게 표를 던진 것이다. 포포이는 겸손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줄레스는 포포이가 싫어 나에게 투표한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나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며 다른 세 명 중 누군가가 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났지만, 다음 날 줄레스와 아넬이 양보해 포포이를 밀게 됨으로써 문제는 해결됐다. 포포이가 계엄령 이전부터 지구의 조직화 등에 보여준 지도력을 인정한 것이다.

    후일, 당 지구조직의 회의가 열려 지구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포포이는 만장일치로 지구의 캡이 되었다. 아넬, 살리(포포이의 처), 나, 그 외 몇 명의 동지가 지구집행위원회의 멤버가 되었다.

    포포이

    카 포포이(필몬 라그만)

    지구집행위원회는 마치 군대처럼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는 「지하 아지트」에서 함께 생활했고, 그곳이 활동 거점이 되었다. 낮에는 다른 몇 개인가의 팀들과 차례로 회의를 하기도 하고, 연락원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연락원은 보통 우리가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노조 간부들로, 그 중 일부는 활동가로 교육시켜 당원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방문하는 것은 회의와 정치토론을 하기 위해서였다. 노조 간부의 집에서 며칠간 체류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부인이나 아이들과 얘기하기도 하고 가사를 돕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대중공작」이라고 불렀다. 세탁, 설거지, 청소, 아이 보기 등 일상적인 가사를 돕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한 것으로, 연락원이나 그 가족과 쉽게 친해지고 그들이 활동가나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애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각종 회의나 「대중공작」 덕분에 우리는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낮에 공공연히 동지들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가두나 지역에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활동가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마치 그곳에만 계엄령이 없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타 지역에서 나보타스로 온 동지는 나보타스를 「해방구」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군의 스파이도 없었고, 설사 군의 단속이 있어도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 같았다. 마치 신인민군의 부대가 종일 주민들과 함께 섞여 사는 벽지의 해방구와 같았다. 이윽고 비합 활동을 하는 당의 부문, 예를 들면 당 중앙과 하부조직을 연결하는 연락망을 만드는 임무를 맡고 있는 「전국연락위원회」 등이 나보타스를 그 회의 장소로 쓰게끔 되었다.

    평당원에서 캡으로

    1974년 어느 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새로운 캡인 로저가 군에 체포됐다. 그는 리고벨토 티글라오의 후임으로, 우리는 그와 여러 차례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얼마 동안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당 활동은 6명의 지구 캡 회의를 통해 운영됐다. 1975년, 마닐라 수도권의 지구의 캡들과 잔존하는 지역 뷰로가 참가한 비합 회의에서 포포이는 만장일치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캡으로 선출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포포이는 평당원에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캡이 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리고벨토 티글라오나 로저와 같은 학생운동 출신 리더가 아니라, 풀뿌리 지역 운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역 당 활동에 대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장점을 100% 살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서 몸소 행동하고 실천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즉 마닐라 수도권과 리잘 주의 6개 지구를 순회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동지들에게 실천적인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포포이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캡을 맡았다. 가끔 그가 그 임무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주로 “지령 위반” 문제로 당이 내린 징계처분에 의한 것이었다.

    1975년, 나는 포포이의 후임으로 당 제3지구(D3)의 캡이 됐다. 당시 나는 20세였다. 포포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캡이 된 후에도 부인인 살리 동지와 함께 나보타스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제 3지구의 동지들 중에서도 극소수밖에는 몰랐다. 나는 자주 그곳에 가서 밤샘하면서 토론하곤 했다. 톤데냐 사의 임박한 파업에 대해 이것저것 논의한 것도 그곳에서였다.

    당시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엄령 포고 제 1081호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다. 파업을 할 경우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그런 엄혹한 상황이었음에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는 파업에 돌입한다!”는 파업 당일 발표할 선언문의 내용에 대해 포포이의 아파트에서 함께 토론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선언문을 쓴 동지가 밤새 내용을 다듬었고,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에 남을 멋진 프로파겐다였다. 그는 타이핑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타이프라이터(그땐 PC가 없었다!)를 두터운 쿳션 위에 올려놓고 문구를 수정했다.

    우리의 2년간에 걸친 지하활동의 성과가 1975년이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24일, 톤데냐 양조 공장의 노동자 800여명이 기계를 멈추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들은 이틀간 공장 점거에 들어갔다. 그것은 파업을 금지한 계엄령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에드가 죱슨이 속해 있던 노동사목센터는 진보적인 수녀들과 사제, 신학생을 모아 공장 문 앞에서 식료품과 물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노동자들이 마르코스 군대에 의해 체포될 때에도 공장을 떠나지 않았다.

    파업은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옭아맨 계엄령의 굴레를 깨부수었다. 톤데냐의 파업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 전국적인 파업의 파고를 불러일으켜 루손 섬, 비자야 섬, 민다나오 섬의 200개 이상의 공장, 대규모농장, 광산지역의 7만 3,000여명이 파업에 합류했다.

    독재자 마르코스는 1975년 11월 3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의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산업에 있어 파업을 금지하는 대통령령 제 823호를 발포하여 투쟁의 흐름을 차단하려 했다. 대통령령은 또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국민이건 외국인이건 관계없이 파업 등 노동자의 행동에 대한 연대나 지원도 금지했다.

    그 무렵 BMP〔필리핀 노동자연대 ; 필리핀 노동조합 총연맹 중 하나〕가 결성됐다. 1975년 말의 파업에 의해 얻어낸 조직적 성과물이었다. 파업은 물론이고 수녀와 사제, 신학생 등 종교단체의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까지도 탄압하려는 악법의 제정을 꾀하는 마르코스에 항의해 BMP는 「기도하는 집회 · 행진」이란 명칭을 붙인 수많은 집회를 조직했다. BMP는 몇 개 산업의 노동조합의 연합으로 결성되어 당이 활동하고 있는 마닐라 수도권의 모든 지역(다만 제 6지구는 시에라마드레 지역의 산간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역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됐다)에 만들어졌다.

    제3지구, 즉 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에서 우리는 공장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카톨릭 교회나 교구가 운영하는 종교센터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것을 호소하고 BMP의 지부를 만들어나갔다. 파업의 여파로 고양된 연대 정신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은 권리획득의 투쟁을 위해 속속 단결하고 또 연합조직을 만들어나갔다.

    마르코스 독재체제에 의해 이식된 공포의 굴레를 깨부수어 나가면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혁명적인 운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단행동의 금지라는 계엄령의 족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공공연하게 집회나 시위를 조직하게 됨으로써 계엄령에 대한 저항을 강화해 갔다.

    포드 미 대통령 내방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파업의 물결을 타고 일련의 행동을 계획했다. 1975년 12월 6일, 인도네시아를 거쳐 내방하는 포드 미 대통령의 마닐라 공식방문에 맞춰 대규모의 전투적 집회를 계획한 것이다. 제3지구는 죱슨 슈퍼마켓에 가까운 부스틸로스 광장에서 개최되는 집회에 주로 나보타스와 말라본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독자대오를 파견했다.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말라카냥 궁을 향해 행진했지만 도중에 경찰기동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시위대는 어둠 속에서 미란다 광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당은 마닐라 수도권의 지도부에 대해 가두집회의 참가를 금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경찰의 정보부대에 의해 체포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체포를 위해 미행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이 방침을 은밀히 어기고 있었다.

    나는 미란다 광장으로 향하는 시위대열 속에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과 시청사는 물론 퀴아포 성당 등 주위의 시설물에도 등이 꺼져 있었다. 나는 몇 명인가의 동지들과 함께 있었으나 그들 역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동지들이었다. 어두워서 아무도 우릴 몰라볼 것이라는 게 우리의 핑계(!)였다.

    어둠이 깔리면서 군중 속의 활동가들은 더욱 대담해져 계엄령 이전을 연상하게 하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응한 군중들이 큰 목소리로 “마르코스!, 히틀러!, 독재자!, 개!”를 연호했다. “인민전쟁!” “필리핀 공산당 만세!” “신인민군 만세!” 라는 외침도 터져 나왔다.

    나는 머큐리 드럭스토어 가까이에 있는 지하도의 입구로 내려갔다. 그곳은 미란다 광장과 대로 반대편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계단 아래에는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 전투장비(헬멧, 방패, 경찰봉)를 갖추고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는 수도권 기동경찰대의 일대가 있었다. 나는 지상으로 올라와 서둘러 퀴아포 교회 옆 지하도 입구로 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거기에도 수도권 기동대의 한 무리가 대오를 갖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케손로에 가자 아직 통근러시 시간대인데도 묘하게 교통량이 적었다. 시위대는 기립한 채 양 팔을 들고 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시위대가 경찰의 침탈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위대의 국가 합창이 끝나려는 순간, 기동대가 지하도의 남과 북 양방향 입구로부터 달려 나와 시위대를 포위했다.

    기동대가 무차별적으로 곤봉을 휘두르며 습격하자 시위대는 산산이 흩어지면서 일대혼란이 야기됐다. 그러나 시위대가 재결집하여 경찰들을 향해 돌과 빈 병 따위를 던지기 시작하자 경찰기동대는 갑각에 몸을 숨기는 거북이처럼 머리에 방패를 얹고 웅크렸다. 그러는 동안, 나를 포함한 시위대는 여유를 되찾아 시위 현장을 퇴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음 날 『마닐라 데일리』를 비롯한 각 신문에 “마닐라에서 폭동 발생”이란 머리기사가 떴다. 이 「폭동」이라는 것은 경찰의 폭압적인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시위대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지하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민중의 저항을 봉쇄하려는 독재자가 이식한 공포를 분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12월 6일의 집회는 사람들이 마르코스의 충견인 기동경찰에 공공연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당시 미국에 망명중인 한 동지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동지는 이 사태의 의의를 칭송해 도시의 저항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생각보다 더 빠르게 급진적인 운동이 되살아나고 있는 징조라고 썼다.

    탄압

    1975년의 톤데냐의 파업으로부터 기세를 얻은 파업의 물결은 1976년 초까지 이어졌다. 노동자의 저항 투쟁에 의해 마르코스는 대통령령 제823호를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제 823호는 노동자들은 물론,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사제나 수녀, 신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한 진보적 종교단체로부터도 비난 받았다. 마르코스는 방침을 전환해 대통령령 제823호를 보완한 대통령령 849호를 포고했다. 그것은 파업을 국가 기간산업에 한해서만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고, 그 시행요강을 보면 실질적으로 전 산업의 파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항의행동의 고양을 억누르기 위해 마르코스는 BMP〔필리핀 노동자연대〕 리더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그 중에는 필리핀 대학의 학생 리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는 군의 긴급 체포가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피의사실도 없이 체포가 이루어졌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BMP에 대한 엄혹한 탄압에 대처해야 했다. 지역위원회는 체포를 피한 BMP 리더들을 소집해 노동조합의 양해를 구한 후 1976년 2월에 예정된 시위를 중지했다. 또한 이제 막 생겨난 급진적 노동운동과 조합원들을 보위하기 위해 BMP를 일시적으로 해산하고 「아낙파위스 우애재단」이라는 무난한 이름의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를 얻었다. 이 재단은 진보적 노동조합의 네트웍을 한동안 유지했으나 탄압이 계속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제3지구에서는 2월의 집회 대신에 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에 있는 BMP 산하의 조합의 일제 집회를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이 지구에서 저항운동의 발전에 투신한 간부들을 결집시켜야 했다. 그것은 제3지구에로의 새로운 전력의 투입이 없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학생 전력(戰力)

    1975년, 필리핀 대학의 일부 학생들이 카마나 지구에서 지역 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을 지도한 것은 지역에 대한 지원활동을 지향하고 있던 필리핀 대학의 「칼리지 Y」라는 그룹이었다. 방학이 되면 이 그룹은 전국의 도시와 지방의 빈곤지역을 선정해 “지역 집중활동”을 했다. 그 해 이 그룹의 지원활동은 말라본에 집중되어졌다.

    한편 필리핀 대학의 학생 신문 『필리핀 칼레지안』은 지역사회의 붕괴와 경찰의 횡포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타뇽」이라는 지역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또 다른 『칼레지안』 기자는 「퐁도안」이라는 나보타스의 어항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생선운반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기사화했다.

    얼마 후 칼리지 Y의 학생들은 풀타임이나 파트타임 활동가를 보낼 지역으로 제 3지구를 선정했다. 1975년 여름에는 멤버 6명과 그들의 친구인 활동가 4명이 말라본의 「지하 아지트」 로 와서 도시빈민이나 노동자들 속에서 조직 활동을 하기 위해 지역과 공장 등에 한 사람씩 파견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YS」(젊은 청년 학생들)라 불리웠다. 그들은 지역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로 인해 제 3지구는 활기가 돌았다.

    YS가 자신들이 체류하는 빈민가나 지하활동의 거점인 「지하 아지트」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역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고무 샌달을 신고 있는데 비해 YS는 질이 좋은 학생화나 샌달을 신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하 아지트에서 사용하고 있던 양철이나 플라스틱 식기로는 식사를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공동변소나 목욕탕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대개 화장실이란 건 구멍만 파져 있는 것이었고, 목욕탕이라는 것도 가옥 바깥의 한쪽 구석에 있는 물 항아리로, 국자로 물을 퍼내 목욕을 해야 했다. 이 목욕탕을 사용할 때는 바깥에서 다 보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넉넉한 품의 옷을 입었고, 남성들은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제3지구의 당 세력은 당원수가 약 100명을 넘었고, 그 중 90%가 남성이었다. 대부분은 빈민가 출신으로 남성노동자가 대부분인 공장이나 어항(漁港)에서 일하고 있었다.(제4지구는 그와 반대로 타귁, 비쿠탄, 아라방의 공장 노동자들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얼마 후 제3지구의 독신 남성들은 YS의 여성 멤버들에게 줄줄이 프로포즈를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자 몇 명의 YS 여성 멤버는 제3지구의 활동가들 중에서 파트너를 찾았다. 몇 쌍의 커플은 시대의 시련을 견뎌냈으나 또 다른 커플들은 일찍 깨지기도 했다.

    YS의 신인들은 공장과 지역의 대중운동의 고양에 열광했다. 때때로 행해지는 집회나 시위에서 그들은 제3지구의 당 활동가들과 함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부가 되기 위해 제3지구에 잔류했다. 그 중에는 신인민군에 들어가 「최고로 고도화된 투쟁형태」에 참가하겠다며 벽지로의 전출을 신청하는 학생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동요와 투쟁

    1976년이 되자 계엄령체제에 저항하는 도시빈민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 투쟁이 있기 전, 「조토」(ZOTO ; the Zone One Tondo Organization)라는 단체가 「톤도」(Tondo)〔스모키 마운틴으로 불렸던 쓰레기 하치장 근처의 빈민가〕주민들의 무허가 판잣집 철거 반대투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ZOTO」는 판잣집 철거에 항의해 말라카냥 궁까지의 대규모 시위행진을 조직했다. 1974년에는 케손 시의 타탈롱, 바굼바얀, 우공, 노르테 지역 주민이 바리케이드를 치기도 했다.

    론도지구

    빈민가인 톤도지구의 당시 모습

    1976년 1월, 도시빈민지역의 몇 개 단체들은 말라본의 세인트 제임스 아카데미에 모여 「철거반대동맹」을 결성했다. 100명이 넘는 회의 참가자들은 당시 철거를 통고받은 타뇽 지구까지 수Km의 시위행진을 했다. 거기서 그들은 퍼포먼스를 하는 한편, “우리는 인간이지 쓰레기가 아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개발을 희망하고 일자리를 확보할 가능성도 없는 원격지로의 이주 방침에 항의했다.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말라본의 중심가로 행진해 갔다.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튼 시위대가 말라본 시청을 향했다. 시위대는 말라본 시청을 둘러싸려 했다. 시청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은 경악했다. 당시 집회가 금지되어 있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은 주로 종교적인 행진으로 위장해 이루어졌고, 정치 집회가 아닌 「기도회」로 포장했다)

    시위 참가자 중에는 경찰을 보자마자 대오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다. YS 멤버를 포함한 당 제3지구 대오는 시청을 따라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행진은 갑자기 도중에 중지되었고 참가자들은 해산했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날 밤 지하 아지트에서 「깜짝쇼」와 같은 방식으로 경찰을 엿 먹이고 시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즐거워했다.

    대학들의 궐기

    1977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마닐라 수도권의 몇 개 전문학교와 대학에서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필리핀 대학, 동부 대학, 그레고리오 아라네타 대학 재단(GAUF), 아담손, 페아티, PCC, 필리핀 여대, 트리니티 전문대학, 산토 토마스 대학 등에서 학생운동이 격화되어 수업거부가 행해졌다. 이 운동은 「필리핀 학생연맹」(LFS)라는 새로 결성된 학생 그룹이 주도했다.

    이른바 이 학생운동의 「르네상스」는 레앙 알레한드로, 엘마 메르카도, 소니아 소토, JV 바티스타 등 유력한 활동가들을 배출했다.

    그들은 「계엄령 베이비」라고 불렸다. 이 학생들은 아직 어려서 「1/4분기의 폭풍」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필리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암흑기에 투쟁의 불꽃을 불태웠다.

    투쟁의 고양

    1975년에서 77년에 걸친 동향은 마닐라 수도권 등 도시부에서의 대중투쟁으로 발전해갔다. 계엄령 하에서의 최초의 움직임은 노동자들에게서 일어났고, 그것을 받아 마닐라 수도권의 도시빈민층이 가두로 나왔다. 무허가 주택 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가 조직한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인간 바리케이드」가 철거 현장에 등장했다. 이 인간 바리케이드는 이후 철거반대 투쟁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 선전의 장이 되었고, 지역주민 전체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다.

    마닐라 수도권에서의 지하활동이 1975년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노동자계급의 덕분이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소극적이었다면 계엄령 체제의 엄혹한 탄압 속에 지하활동가들이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급작스런 상황의 호전에 의해 지하 활동가들이 공공연하게 오픈된 공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천수만의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항의집회와 시위행진으로 인해 지하 활동가들은 용기를 얻었다.

    지하활동 중인 당 간부들에게 집회 참가를 금지했던 필리핀 공산당 CPP의 방침은 때때로 무산되었고, 방침 그 자체의 어설픈 토대가 명확히 드러났다. 보위상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방침은 당 간부와 공개 활동을 하는 대중 지도자들 사이에 잘못된 구분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역할분담에 있어 잘못된 이분법적 사고였다. 왜냐하면 당 간부는 어디에 있더라도 대중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되며, 말 그대로 대중의 지도자여야하기 때문이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당원 수는 이 기간 동안 꽤 증가해 1,000명 이상이 되었고, 대중적 기반도 노동자와 도시빈민층 속에서 비약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성과에 더해 지하활동을 하는 간부들은 물질적으로 혜택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옮겨 다닐 수 있는 몇 군데의 거처가 있었고, 좋은 식사와 동지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가 새로운 노동자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제공해 준 것이었다. 지하활동에의 협력을 받으면서 우리가 배운 중요한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자신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것들을 아낌없이 준다고 하는 것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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