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여자를
    누가 그러캐 맨드런나?”
    [정지된 역사] 김수임과 모윤숙
        2015년 10월 14일 1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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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김수임으로 추정되는 사진. “뚱뚱”하고, “작은” 그리고 한 마흔 아홉 정도는 되어 보이는 김수임의 사진이다. 이 여성으로 인해 자신의 군 경력 전체에 먹물을 칠한 베어드는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촌평(“작고, 뚱뚱한 39세 여자(slight, dumpy, 39years)일 뿐”)과 비슷해 보인다. 사진의 출처는 베어드 보고서와 함께 미군 감찰과의 수사문서에는 이런 사진들이 몇 장 들어있는데, 주인공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설마 박수임 사진을 넣었을 리는 만무하고. . . 베어드는 김수임이 “주로 한복을 입었다”고 했는데, 복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고급진(?) 옷감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에 약간은(?) 충격을 먹었다. 미국의 유명 영화감독이 한국 입양아인 순이와 결혼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아무튼 당대 조선 남성들의 미적 감각에 문제제기를 할 생각은 없으나, 아무튼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기준임은 분명하다. 김수임에 대해 “정말 뛰어난 미모를 갖춘 아시아인”이라고 극찬(?)하는 것은 아무래도 심한 듯하다. (출처 NARA) 자유신문에 난 연극 광고.

    “미국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해주지만, 한국 공무원들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문과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여 정부에 반항하는 죄를 저지른 피의자들에게 자백을 쥐어짜내는 방법을 활용했다. 김수임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몇몇 증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설혹 그것이 순전한 자백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 혹은 죽음을 잠시라도 피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 말이다.” 미 육군 감찰과 슈뢰더(E.W Schroeder) 대령의『베어드 대령 조사 보고서』의 결론 중에서. 1950년 11월 10일.

    한 10년 쯤 되었을까? 잘 아는, 뭐 그래봤자 내가 아는 유일한 유명인(?)이지만, 소설가로부터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그게 현대사 이야기라는 말을 들었다. 뮤지컬이나 영화 시나리오와 관련해서 일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하실 줄은 몰랐다.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또 관심도 덜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가 그때 한번 시나리오를 훑어본 적이 있었다. 남녀 주인공이 누군지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기억이 전혀 안 난다. 아마 내 두뇌에 문제가 생기긴 했나보다.

    아무튼 당시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수임’이었다. 영화는 물론 엎어지고 말았는데, 방첩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시 김수임 이야기라니. . . 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 한데 ‘김수임’은, 정확히 말해서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의 밀회(?)를 잘 설명하고 있는 ‘베어드 대령 조사 보고서’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첩보전과도 큰 관련이 있으니 잠시 그쪽 이야기를 다루어 보자. 70년대나 8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부터 무려 70년쯤 전의 일이다.

    해방되기 전에, 출생과 가문을 제외한다면 이미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밟은 김수임은 세브란스 치과병원에 통역으로 취직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김수임의 어학실력 때문이었다. 김수임은 아주 뛰어난 ‘네이티브 스피커’였다. 김수임은 이 뛰어난 어학실력으로 인해 미군 점령과 동시에 출세길이 열렸다. 영어를 잘하고 여성이며 게다가 젊기까지(?) 한 그녀는 곧바로 반도호텔에 미군 통역으로 취직했다.

    해방 후 남한에서 가장 필요한 실력이 있다면 아마 영어실력이었을 테다. 아마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명인들, 그러니까 미군정에 잘 보여 출세한 사람들의 리스트는 아마 토플 실력 점수순과 거의 유사했을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미군과 잘 아는 분들(예컨대 조병옥이나 이묘묵, 그리고 이승만에 이르기까지)과는 여러모로 달랐기 때문에 김수임의 출셋길은 정보원 책임자 정도(?)에 불과했다.

    미군사령부 통역으로 있다가 정보원이 됐던 것은 물론 이런 저런 특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베어드 대령의 남다른 안목 때문이기도 했다. 베어드가 한국에 부임할 1946년 5월 즈음에, 24군단 공보장교였던 로버츠는 “그 인간은 완전 호색한인데다 주변의 모든 여자들을 집적거리고 다닌다”며 “그 인간 조심해야 할 거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로버츠 대령이 베어드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베어드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박통급이라는 언급은 보고서의 여기저기 눈에 띤다. 그나마 당시 TV가 없었기에 다행이지 큰일 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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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1974년 방화였던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에서 무선송신기를 뚜드리고 있는 김수임.(구글검색) 그래 이 정도는 되야지 “마타하리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신문기사가 되지 말야. 한데 우리가 아다시피 1970년대 영화란 역사적 고증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주인공은 눈코입이 있다는 것 말고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 정보원들은 이런 송신기가 없더라도 언제든지 자신이 얻은 정보를 정보당국에 전달하고 또 그에 걸맞는 보수를 받아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저 사진은 김수임이 북한당국에 무선송신기로 접선을 시도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오른쪽)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인 모윤숙은 북한 공산군이 지배했던 서울생활 동안 산에서 숨어 지냈다.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자신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군 사령부의 사진영화과에서 이 모습을 촬영했다. 1950년 11월 8일.”(출처는 NARA) 모윤숙은 낙랑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학력 되고, 영어 되고, 미모(?)가 되는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미군들은 그녀를 “Marian Mo”라고 불렀는데 주로 하는 일이란 미군 장교클럽에서 낙랑클럽 회원들과 미군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시인”이라고 했지만 동서양의 젊은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시를 읊은 적은 없는 모양인데 말이지. 주한미군 최고사령관 하지는 베어드에게 모윤숙을 설명하면서 “몇몇 저명한 한국인들의 애인으로(mistress of several fairly prominent Koreans) 악명 높은 여자라고 귀띰”하면서 조심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정작 모윤숙은 가장 열렬한 이승만 추종자였다. 반공 연설을 하러 다니느라 남한 전역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녀는 베어드가 CID 요원을 붙여서 경호해야 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한을 점령한 미 24군단 사령부는 반도호텔 4층에 위치해 있었고, 베어드의 사무실은 7층이었다. 마침 모윤숙을 통해서 어디 참~한 여자 없냐던 베어드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물론 간단하게 영어를 쓰고 읽고 번역하는 정도의 시험은 봤고, 김수임에게는 정보원(informant) 책임자 자리가 주어졌다. 김수임은 곧바로 미 헌병사령부에서 요청한 불하 가옥을 할당받았다. 김수임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서 많을 때는 10명 가량의 정보원들을 고용하여 각종 정보들을 수집해 나갔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은 정보원들, 즉 미국의 급료를 받는 정보원의 숫자에 대해서 기록을 해놓고 있지만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정보원은 또다시 여러 명의 정보제공자들(informer)을 고용하곤 했다. 김수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우리는 주둔했던 모든 지역에서 망을 구축했다. 아마 가장 훌륭했고 또 성과가 좋았던 것은 포항시였을 것이다. 포항시의 망은 12명의 비밀정보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각자가 모두 60명의 다른 정보원들을 통제했다. 이 정보망은 소규모의 개인 기업체를 제외한 모든 조직에 침투할 수 있었다.” 미8군 배속 CIC 801 지대의 조지 블랙웰(George C. Blackwell) 소위의 인터뷰에서. 1951년 7월 24일

    나중에 한국전쟁 당시 정보원망의 구축과 활용에 대해서도 아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인데, 4, 5년 전 남한의 정보원망을 운영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건 베어드 보고서의 대부분 내용들이 이와 관련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김수임과 관련해서는 미국측의 정보원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이다. 김수임은 곧 남로당 간첩이었고, 간첩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접근한 정도로 이해되는 듯하다. 김수임의 역할이 정말로 ‘이중간첩’(double agent)이었는지와 무관하게 김수임은 아주 훌륭한 “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에서 미국 납세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 즉 미군의 통역을 비롯한 직원으로 고용되기 위해서는 전력에 대해 조사를 받는다.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고. 한데 이 조사는 동사무소 직원을 고용하는 형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수임처럼 미군사령부에서 통역을 맡은 경우에는 G-2(정보참모부)가 직접 지휘하여 CIC가 조사했다. 물론 김수임도 이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는? 아주 깨끗했다.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일하는 김수임을 어떻게 헌병사령부 통역으로 빼돌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베어드의 주특기가 발휘되었고 김수임은 헌병사령부로 출근지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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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제207 헌병 빌딩 앞에서 순찰준비를 끝낸 짚차가 대열해 있다. 1947년 5월 19일.”(NARA 소장) 당시 베어드 대령은 헌병감으로 있으면서 207 군정 헌병중대 및 CID 3개 부대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반도호텔과 1마일 정도 떨어진 헌병사령부의 모습이다. 김수임이 출근했다는 헌병사령부는 여기를 말한다.

    정보원들은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주인에게도 “그녀 자신의 국민들 편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편인 동시에 “반대로 그녀는 아마도 쉽게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이해해야 한다. 정보원은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들로 간주되었다.

    한마디로 돈은 주지만 믿지는 못할 이 정보원들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했을까? 그건 “한국인들의 협력이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주한미군의 결정적인 약점 때문이었다. 군사 점령 시기에, 그것도 일본이라는 대국을 물리친 미군들이 통치하는 점령시기인데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인들이라니! 지금처럼 세계화가 한국화라는 말로 영어와 미국스타일의 생활방식이 넘쳐나는 때라면 모를까, 하루아침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통치권자가 바뀐 당시에는 실제 그랬다.

    특히 헌병사령부가 맡고 있는 사건들은 한국인 정보원들이 없으면 수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당시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미군정청-주한미군’으로 두 가지 통치기구가 있었는데, 주한미군은 지금의 주한미군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고, 미군정은 한국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군정청 경무부장인 조병옥, 민정장관 안재홍, 이런 분들은 미군정청 소속이고(실제 미군정청을 좌우하는 사람들은 미군들이지만), 베어드 대령이 속한 헌병부대는 주한미군 소속이었다.

    주한미군과 대한민국 정부라면 실제 서로 업무나 활동에서 그다지 겹칠 것이 없어 보였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는 있다. 미군정청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미군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 눈에는 누가 주한미군이고 누가 미군정청 직원인지는 모를 일이다. 미군들도 “우리는 한쪽 팔에는 주한미군 완장을 또 다른 팔에는 미군정청 완장을 차고 다녀야 하는” 이상한 존재들이었다. 뭐 이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도 많이 했다. 머리 나쁜 양반이 왼손에 담뱃대를 들고 걸으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양반이 길을 걷다가, 오른팔이 앞으로 나오면 “내 담뱃대?” 했다가, 다시 왼팔이 앞으로 나오면 “아, 여깃네”. 이걸 계속 반복하면서 갔다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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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한국인이 연합군 환영대회를 개최한 연설단의 모습이다. 1045년 10월 20일.”(NARA 소장) 연설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세창이고 멀리 보이는 대머리가 이승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권동진의 모습이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에서 열렸다.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놀드 군정장관, 이묘묵 하지 장군 통역관 및 Korean Press 사장, 하지 중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승만은 연단의 가장 가운데 하지 바로 오른쪽에 앉았는데, 가려서 보이지는 않는다. 이묘묵은 해방 후 하지의 사진에는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지 외에도 아놀드나 다른 미군의 통역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통치자와의 관계는 통치자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로 결정되곤 했는데, 이묘묵은 그런 점에서 하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고 군정 관리들은 그를 “아주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하곤 했다. 물론 이묘묵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까지는. 이승만이 귀국한 지 불과 나흘밖에 안 되는 시점이었지만 하지는 이 대회를 “한국 독립의 영웅을 환영하기 위한 대회”라고 생각할 만큼, 이승만은 “서울의 수백명의 우익 인사들”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물론 하지는 이승만의 존재에 대해서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베어드가 지휘한 헌병사령부는 미군 관련 문제만 맡는 것이 원칙이지만, 미군정기에 그런 일이란 없었다. 베어드는 각종 문제 CIC 담당이었던 이데올로기 문제나 기타 각종 한국인 관련 사건도 담당했고, 그 중에는 김수임의 역할이 돋보이는 사건도 물론 있었다.

    “그녀는 분명한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녀는 1946년 대구 폭동 수사과정에서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그 폭동과 관련하여 몇몇 한국인들이 살인죄 등으로 체포되어 군사위원회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것과 관련한 첩보를 수집하는 데에 그녀는 상당한 쓸모가 있었다.” 롤러(Edward J. Lawler) 소령, 1950년 9월 18일

    “그녀가 우리에게 혹은 베어드에게 제공했던 첩보들은 암시장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훔쳐간 미국 물건들을 되찾는 데에 우리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녀가 제공했던 첩보로만 본다면 그녀는 확실히 정보에 능통했고, 경찰에게는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 . 그녀가 제공한 첩보는 경찰당국이 미군이 도난당하여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을 압수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은 아편과 관련하여 그녀가 몇 차례 제공한 첩보도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고.” 로버트 캐롤(Robert E. Carroll) 제25 CID 수석요원.

    경찰이나 정보기관의 정보원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뭐 자신이 곧 국가안보를 담당한다는 ‘책임의식’이 고양되는 등의 주관적인 것은 빼고, 일단 김수임이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 즉 기밀자금(Confidential Fund)의 지급대상이 되어 미 납세청의 관리 대상으로 올라가 있게 된다. 호, 기밀자금이라. . .

    지난번 정권, 그러니까 노무현 정부 당시 출간된 한 기록을 보자면 국정원, 아니 안기부에서도 이런 돈을 활용하여 대학의 정보들을 캐내오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이 자금이 기밀자금으로 분류되어 어떻게 관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이 자금은 극동사령부의 기밀자금으로 분류되어 한국점령 과정에서 헌병대 사령관이 직접 관리하고 지출하도록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기밀자금이 헌병대에만 할당된 것은 물론 아니다. 적어도 CIC에도 할당되었다. 이 기금의 총량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정보원들의 급료를 지불하거나, 필요로 하는 정보를 알아내는 데에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아직 자료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언젠가는 나올 것이니까 뭐 누군가가 알아볼 테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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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조셉 프레드 미군헌병이 서울에 있는 한 빠에서 이미 사용한 브랜디 빈병들을 찾아냈다. 이 술들을 검사한 결과 5%의 메틸알콜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945년 11월 14일.”(NARA 소장) 해방 후 술집에서 얼마나 많은 술을 팔았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공업용 메틸 알콜이 술 대신 대량으로 소비되었다는 점은 여러 기사와 사건사고에서 확인이 된다. 5% 정도면 뭐 술맛과 비슷한 모양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메틸 알콜과 물을 1:1로 섞은 술 아니 독약(poisoned brandy)을 그냥 먹다가 사망한 사건들도 있었다. 그것도 11명이 동시에!

    다시 정리하면 미군 헌병사령관인 베어드가 상부에 요청을 하면, 동경의 GHQ 참모들이 이 액수를 확인하여 예산으로 지급하게 되고, 다시 그 예산을 각 정보원 활동에 맞춰서 지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해당되는 액수를 정보원에게 지불했다는 영수증이 만들어졌는데 한국 정보원들은 서명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살인자와 관련한 정보에 대해서 헌병사령관실에서 보상을 해주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25만원 정도”였다고 하는데, 당시 쌀 소말 한말 가격이 600원 정도였다. 그들이 이런 종류의 기금을 어느 정도 운영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적어도 베어드 보고서에 따르면 헌병사령부에서는 한국 정보원들을 모두 다섯 곳(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에 운영하고 있었으며, 각 도시마다 10명씩만 잡아도 5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실제 헌병사령부가 관할하는 정보원은 아마 더 많았을 것이다. 김수임은 이 과정에서 서울지역의 정보원망을 운영하는 책임자 역할이 된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점은 미군과 한국경찰, 그리고 미국 점령시기에 왜 강력한 반공주의 선풍이 몰아쳤는지에 대한 힌트가 될 수도 있다. 아직 한국전쟁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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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왼쪽) “버밍햄, 영국. 국회의사당 앞쪽 건물에서 한 사람이 “공산주의 물러가라”는 ‘영국애국자연맹’의 구호를 들고 있다. 이날 국회의사당에는 불가닌과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방문할 예정이었다. 1956년 4월 23일” (출처 『Wide World』)

    (오른쪽)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미주리의 하원의원인 암스트롱(O.K. Armstrong)씨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소련 대표이자 소련 외무장관인 그로미코에게 소련의 강제수용소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 소련지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로미코는 이 지도를 곧바로 옆 사람에게 주었지만 곧장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이 장면은 일본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던 샌프란시스코 회담 당시에 담긴 사진이다.”(출처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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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오하이오, 미국. 식당 주인이 스프를 먹고 있는 철강공장 노동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식당에서는 공장의 파업 기간 동안 수프를 단돈 1센트에 판매하겠다고 써 놓았다. 1949년 10월 3일.”(사진출처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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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시카고,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전기회사의 파업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따라서 피켓팅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49년 3월 16일.”(출처 뉴욕 타임즈)

    돌이켜 본다면 2차 대전이 종료된 시점부터 찾아온 ‘노동의 봄’이 전 세계를 향해 훈풍을 드리우고 있었다. 앞서 보았던 패전국(이탈리아)과 프랑스,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전선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 일본도 비슷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전현직 대통령 후보들을 저격(?)하는 데에 아직도 ‘공산주의 운운’이 위력을 발휘하는 이 나라에도, 한때는 “‘소비에트’라는 이름을 빌린 마을 옛위원회와 비슷한 모양의 인민위원회”가 해방 후 최단시간에, 그리고 가장 많은 지역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이 이상한 현상, 즉 공산주의가 이상하게 인기를 끌고, 노동자들이 위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해괴한 사건이 비정상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고 소련이라는 나라의 음모에 놀아난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할 일이라기보다 미국사를 전공하시는 분들이 좀 풀어줬으면 하는데 아무튼 미군 속에서도 이런 집단이 있었다. 바로 정치군인들이라 할만한 G-2(정보참모부)가 그랬다.

    “이 같은 행위(파업)는 과격분자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들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파격행위자들과 공산당)의 관계 여부를 현 시점에서 증명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지금까지 공공시설에서 소규모의 그러나 중요한 노동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공산당이 다른 나라에 침투하여 수행하던 그러한 사례들을 그리며 그대로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주한미군정치참모부 작성 일간보고서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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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한국에서 치러진 첫 번째 선거. 한국에서 백열등을 생산하는 가장 큰 회사의 노동조합 첫 번째 선거의 모습이다. 노조의 대표를 선거하는 이 선거는 서울전기회사에 선거등록을 하여 시행되는 첫 번째 선거였다. 1947년 4월 23일”(출처 NARA). 이 선거는 점령당국자나 우익들에게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선거에 대해서 CIC는 “가능한 하나의 척도로서, 얼마 전 실시된 협상대표를 뽑기 위한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의 선거를 살펴보자. 이를 통해서 우린 향후 남한에서 실시될 선거를 예측해볼 수 있다. 이 선거에서는 세 개의 그룹이 경쟁했다. 전평, 노농연맹(중도), 그리고 대한노총. 언제나 그러하듯 최종 순간에 전평 후보는 사퇴했다. 중도그룹은 극우파들에게 표를 던졌고, 결국 선거는 극우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같은 척도(barometer)는 앞으로도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며 의기양양 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선거가 어떻게 치러질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CIC는 이 문단 바로 뒤에 선거를 그렇게 이끌려면 “우익세력, 경찰, 유명한 지도자 등에 대해 잠재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G-2(정보참모부) 참모장이던 니스트(Cecil W. Nist) 대령이 작성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파업과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연계 혹은 지배관계에 대한 해석은, 이로부터 한 달 뒤에 나온 ‘첩보기본요소’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인민위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도 있다.

    G-2(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인민위원회의 공격이라고 보고되었던 이전의 사건이 자세한 수사 결과 “일본인으로부터 땅을 더 매매하려던 농민”이 경쟁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인민위원회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어쩌면 이 같은 형태의 ‘사칭’은 당시 지방정치의 ‘무질서’(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뉘앙스가 아닐까?)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술군의 점령이 완료되고 군정이 수립되면서 차츰 “군정의 허가를 받은 정당인 양 행세”하는 테러집단의 존재는, 이러한 무절제한 폭력과 원초적인 행동들이 언제나 좌익이나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는 않는 것을 보여준다.

    부여의 인민위원회가 정부행세를 하면서 개인 삼림에 대한 벌목권을 판매했다지만, 이들은 정작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으로 인민위원회에 가담하여 이를 활용하려 한 작자들이었음”이라고 밝혀졌다. 난세의 권력기구를 통해 탐욕을 채우려는 시도는 항상 존재해왔다. 단지 이 무렵 인민위원회의 외피를 둘러쓰고 나타난 것 일 뿐, 그것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이건 국보위이건 간에 시대와 상황은 약간 다른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1963년 주식시장의 건전한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거덜냈던 중앙정보부의 증권조작사건을 “빨갱이”라고 규정지었던 미국대사관의 시선은 흥미로운 데자뷰를 보여준다. 오, 놀라운 걸 이 녀석들? 이야기가 잠시 샜는데 다시 돌아와서. . .

    원래 정보원들은 고유의 기호를 갖고 있었다. FBI에서 고용하는 정보원도 그랬고, 미군에 소속된 정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헌병대사령부에서도 그와 유사한 분류기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담당 정보원의 실명과 주소 등의 내용은 그를 관리하는 요원(special agent)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보원들이 제공하는 내용은 T-1, T-2와 같은 정보원마다 기호가 부여된 것이다. 한국 전쟁 때의 정보원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이 하는 일은 다양했다. 유감스럽게도 CIC나 헌병사령부의 정보원들이 남긴 기록 원본을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작성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종류의 기록은 남아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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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이 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고, 사진이라기보다 문서에 가깝다. ‘Shipping Advice 2009’는 년도가 아니고 미국인들이 한국전쟁 당시 노획한 북한군 문서들을 분류기호였다. SA 2009번 박스 7번에 담겨있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작성된 북한측의 문건들이다. 김형관이 아마 이 지역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던 모양인데 내가 북한사를 잘 몰라서 5가작통법인지(조선시대 제돈가??) 뭔지 아무튼 민간인에 대한 사찰 기록을 직접 작성해 놓았다. 북한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정보원(informant)과 유사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격도 왠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정보원들이 영어를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런 문건들은 미군에 의해 번역되어 대신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정보원이 전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언급을 많은 문건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 그들이 영어를 말했다면 이렇게 문건으로도 보고했을 것이다. 보증인란이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이 문건이 아직 당이나 내무 관련 담당자가 확인하기 전이라는 말이다. NARA 소장.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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