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 안 풍경》
    사람 사는 공동체의 기록
    [다큐멘터리 사진의 세상] ‘김기찬’
        2015년 10월 12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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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한 때는 국가나 사회에 대한 것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다 역사의 기록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주류 집단에 저항하고 노동자나 농민 혹은 도시 빈민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관점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도 여전히 많다. 하지만 요즘은 역사나 다큐멘터리를 그러한 관점으로 협소하게 범주화 하지는 않는다.

    주류 사회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사회의 관점에서 저항이나 소외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보는 관점에서 그들 스스로가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이야기로 보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작업을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있다.

    그래서 그 안에는 당위성도 없고, 외침도 없으며, 시대정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없다. 따뜻하고 편안한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사진가 김기찬은 바로 그런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은 사람이다. 그가 35년 동안 서울역과 서대문 뒤에 위치한 중림동, 도화동, 행촌동, 영천 등의 골목 안 세상을 찍어 우리 앞에 펼쳐 주고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그가 남긴 사진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기찬을 그냥 따뜻한 시선으로 오랫동안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의 대상에 대한 시선에 대해 주로 논하고 있다. 정작 그가 남긴 기록으로서의 사진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그것들로 재구성한 골목 공동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그의 사진은 당시 산동네에 살던 주민들의 일상에 관한 방대한 삶의 정보를 담고 있고, 그것을 기록한 주체로서 사진가의 역사인식 또한 담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사진은 그가 찍은 산동네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좋은 사료가 될 수 있으면서 그 전체로 볼 때는 하나의 역사 서술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사진을 볼 때 그것을 시각 이미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사료로도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기찬_서울 중림동, 1983년 3월

    그러한 관점에서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사진 대부분은 골목 주민들이 사는 따뜻한 장면이 많은데,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주민들이 키우는 화분이나 개가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진 가운데 가장 좋은 예가 시름시름 앓는 강아지에게 밥을 떼 먹여주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일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꽃이나 개에게까지 정을 쏟는 따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갈수록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소통이 단절되고, 인간이 소외되면서 개인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는 시류에 함께 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주류의 변화에 흡수되지 않(거나 못하)고, 해체되어가는 골목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들의 가장 주체적인 삶의 양식이자 생존 전략인 셈이다.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이 백인들의 폭압이 너무나 강력할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소울이라는 독특한 방식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는 방식의 생존 전략과 비슷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주체성을 지키려 하는 삶의 한 양식과 비슷한 것이다. 사회 전체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물질 권력의 폭압에 무기력한 산동네의 가난한 주민들은 골목을 공유하면서 주민들끼리 사랑과 정을 나누고, 꽃이나 개에게까지 정성을 쏟음으로써 자신들만의 자존감을 살리는 주체적 생존 양식인 것이다.

    김기찬_서울 행촌동, 1974년 8월

    김기찬_서울 행촌동, 1974년 8월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 사진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점은 그가 특별한 앵글이나 화각을 이용해 자신만의 예술적 방식을 취하지 않고, 최대한 스트레이트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골목이라는 하나의 장소를 일관된 시선으로 3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작업하여 여섯 권의 골목 사진집을 비롯해 총 열세 권의 사진집과 육십만 컷이나 되는 많은 사진을 생산해냈다는 것은 대단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작가주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난 오로지 기록을 위한 시선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둔다. 요즘 소위 프로 사진가라는 사람들이 오로지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독특함과 창의성만을 살리려다 보니 인간이 거세되어 버린 예술성만을 좇는 현상이 많다. 과연 그게 좋은 사진인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록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같이 가지고 있는데,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김기찬에게서 사진가의 전범이라고 하는 어떤 태도를 구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만 기록성이든 예술성이든,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진가라면 그 작업의 중심에 사람이 서 있어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이 배제되고, 그 자리에 작품이 들어서 있거나, 재화나 권력이 들어서 있으면 그것은 사진을 하되, 사진으로 돈과 권력을 섬기는 것이다. 사진을 왜 하느냐에 대한 자기 물음을 자꾸 되뇌어야 한다. 도대체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왜들 그렇게 예술성에 집착을 해대는지? 왜들 그렇게 갤러리나 미술관만 쳐다보는지? 인간이 사라져버리고 그 위에 오로지 현란한 기술만 남아 있는 소위 예술적 사진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 것인지? 우리는 김기찬의 사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긴 호흡으로 되새겨 봐야 한다. 우리는 왜 사진을 하는지, 우리는 사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사진에 인간이 들어가 있는 즉 인간이 중심이 된 사진을 한 대표적인 사진가로 김기찬 외에 최민식을 들 수 있다. 최민식은 주로 인물을 찍었는데, 그러다보니 주변 상황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기찬은 배경의 맥락을 생략하지 않고 장면을 담았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그들의 삶을 재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최민식은 자신이 받드는 가치관 즉 휴머니즘을 구성하는 역사, 진보, 사회. 사상, 정신 등을 사진으로 강하게 주장한 반면 김기찬은 자신의 세계관을 강하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진이 다 자기 주관에 따라 재현한 것이겠지만, 김기찬은 최민식에 비해 시대정신의 강제성이 훨씬 적다. 최민식은 멀리서 일종의 ‘도촬’을 했다면, 김기찬 선생은 대상과 가까이 붙어 일종의 참여관찰 즉 대상과의 라포를 형성하고 난 후에 사진을 찍었다. 최민식이 참여문학적 혹은 정치학적이라면, 김기찬은 인류학적다. 최민식이 거시사인 사회사를 기록했다면 김기찬은 미시사인 일상사를 기록한 것이다. 물론 두 사진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김기찬_서울 만리동, 1980년 7월

    김기찬_서울 만리동, 1980년 7월

    김기찬은 처음에는 서울역 앞과 염천교에서 행상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풍경’으로 여기고 찍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을 따라가 그 생활 터전을 찾아가 찍었다. 그곳은 대부분이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 속에서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격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인데, 그 자신 또한 어렸을 적에 살던 곳과 같은 골목으로 형성된 전통 공간이었다. 그는 사라져가는 전통 공동체를 기록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고향 서울을 사랑한다. 세계적인 서울보다는 그 옛날 소박했던 서울, 내가 뛰놀던 골목이 있던 서울을 더욱 사랑한다. 문명의 이기 속에 스러져 가는 나의 고향 서울의 한 모퉁이를 뒤늦게나마 소중히 여기며 정직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골목은 이웃과의 삶을 공유하는 장소로 삼고 사는 따뜻한 공동체의 터전이다. 사회적 장소로서의 골목은 우선, 동네 밖 사회 공간인 큰 길과 안 공간인 개인 집을 이어주는 장소이면서 동네 공동체를 연결시키는 회랑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황이 열악했는데도 그의 사진에는 고향에서 쫓겨나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의 또 다른 정서인 분노, 슬픔, 좌절감 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사진가가 따뜻한 장면만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공동체 정신이 키워져 갈등이 상부상조로 승화된 면이 더 많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기찬_서울 행촌동, 1972년 7월

    김기찬_서울 행촌동, 1972년 7월

    김기찬이 세상을 뜬 지 10년, 그를 기리는 사진가들이 그에 대한 글을 모았다. 그리고 그의 글과 사진과 함께 묶었다.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 그 후 10년》, 이 책은 오롯이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한 사진가를 기리는 책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기찬이라는 사진가는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면서 살았구나 하는 체취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사람이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이윤과 권력만 난무하고, 경쟁과 물질만 앞세우는 숨 막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한 번 쯤 되돌아봐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좋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고 싶거나, 그 세계를 이해하고 싶거나 하는 사람은 카메라를 들기 전에 이 책부터 읽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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