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본주의적 F1의 이방인
[왼쪽에서 본 F1] '파스토르 말도나도'
    2015년 10월 09일 10: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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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현재 자본주의가 대부분 영역을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게다가 이 세계는 서구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조차도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만큼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때로는 서구 세계 중심의 세계 지배 체계를 비판하는 나라가 그들의 모습을 흉내 내기 위해 애를 쓰는 아이러니도 목격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서구와는 확실히 구분된 유색 인종 중심의 국가로 세계의 중심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아무리 흉내를 내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얼굴에 아무리 분칠을 한다고 해서 ‘그들’과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겠죠.

국가 전체의 경제적 입지가 높아져 (내부에서 어떤 불평등을 바탕으로 그것을 이뤄냈든) 겉으로만 봐서는 뭔가 대단한 나라에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이 나라가 세계의 중심은 아닙니다. 아무리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외치더라도 세계의 구조가 생각대로 바뀌는 것은 아니겠죠.

우리는 이런 아이러니한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를 살아가는 사회주의자, 혹은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법 혹은 대응하는 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런 아이러니를 극복하고 있는 사람이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F1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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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데뷔 첫 해 한국을 방문했던 파스토르 말도나도

파스토르 말도나도는 F1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는 드라이버 중 한 명입니다.

말도나도는 F1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거나 근접했던 수퍼스타급 드라이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자주 언급되는 드라이버 중 한 명입니다. 잘해서냐구요? 물론 잘합니다. 2012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니까요. F1 드라이버가 된다는 것도 어렵지만,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930명이 F1 레이스에서 우승을 향해 달렸지만, 이 중 우승 경험을 가진 것은 단 105명뿐입니다. 거의 9명에 한 명만이 우승을 차지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말도나도가 유명한 것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말도나도는 특히 서구권의 F1 팬들로부터 ‘너무 많은 사고를 내는 드라이버’로 악명이 높습니다. 개중에는 가장 먼저 F1에서 퇴출해야 할 드라이버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도나도는 90번의 F1 레이스 중 27번이나 완주에 실패했습니다. 요즘 F1 레이스의 완주율이 평균 90%에 육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완주 실패가 많습니다. 그중 적지 않은 사고가 있었고, 프랙티스나 퀄리파잉 등 레이스를 제외한 공식 세션에서의 사고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다른 드라이버들의 안전을 위해 말도나도가 자주 사고를 일으키는 것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실제로 몇 년 전 도입된 페널티 포인트, 즉 자주 문제를 일으키면 포인트를 누적해 경기 참가를 제한하는 강력한 규제가 도입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 것도 말도나도입니다. 어떤 냉소적인 팬들은 말도나도가 마지막으로 사고를 일으킨 시점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말도나도에 대한 이런 비판은 합당한 걸까요?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말도나도의 리타이어 중 사고도 잦았지만, 다른 외적인 문제도 많았습니다. 13번을 자신의 번호로 택한 불운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았죠. 다른 드라이버들과의 사고에 말도나도가 책임을 질 상황도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혼자 사고를 일으킨 경우에도 차량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꽤 있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무조건 말도나도를 비난합니다. 이쯤 되면 왜 그럴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F1의 역사를 돌아보면 말도나도 이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 드라이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부는 사고를 너무 많이 일으켜 퇴출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스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6 챔피언 제임스 헌트는 ‘Hunt the Shunt’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독일의 볼프강 폰 트립스는 ‘사고 백작’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최근의 드라이버 중에도 꼭 말도나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사고를 일으켰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도나도의 출신이 문제가 될 법합니다. 말도나도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드라이버입니다. 여러 말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인 베네수엘라의 국영 석유 회사 PDVSA가 그의 배경입니다.

작고한 고 차베스 대통령이 말도나도의 F1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PDVSA의 돈으로 ‘페이 드라이버’가 되어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시트를 꿰차고 있는 남아메리카 출신의 드라이버가 내키지 않는 서구인들은 꽤 많습니다. 서구인이 아니더라도 싫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걸 생각하면, 뭔가 이질적인 (외모부터 이질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드라이버의 문제점이 서구인들에게 더 크게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말도나도가 서구 국가 출신의 백인 드라이버였어도 똑같은 비난을 받았을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사고뭉치 드라이버들 중 상당수가 스타가 됐고, 일부에서는 그들의 잦은 사고를 ‘특징’이나 ‘매력’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관용은 말도나도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F1 그랑프리에서 우승도 차지한, 충분히 재능 있는 드라이버인데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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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에서는 전국민적인 스포츠 스타로 추앙받는 말도나도

말도나도는 F1에서 보기 드문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드라이버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선 세 번째 F1 드라이버지만 앞선 두 명은 모두 사회주의 정권이 지배하지 않을 때 F1에 진출했고, 말도나도에 비하면 뚜렷하게 F1에서 보여준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나도는 미인대회와 미국에 진출하는 야구 선수를 제외하면 고국 베네수엘라에서 상당한 인기를 끄는 전국민적 스포츠 스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F1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 출신 드라이버도 많지 않고, F1 관계자의 수는 더 적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을 때 러시아와 관련된 돈줄을 틀어막았을 때 상당수의 드라이버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기회를 잃어버릴 정도로 미국과 서구 열강의 입김이 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만의 무대인) 모터스포츠라는 현실이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좋게 좋게 말하더라도, 정치와는 선을 긋는다고 얘기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말도나도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잘 살아남고 있습니다. 미디어와 팬들의 비난에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잘 가고 있습니다. 이제 차베스는 없지만, 아직은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PDVSA의 힘이 도움은 됐을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힘은 스스로에게서 나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F1은 ‘보기와 다르게’ 멘탈 스포츠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동요 없이 경기에 참여하느냐가 경기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니까요. 사고 한 번 냈다고, 강한 비난을 들었다고 경기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F1에서 말도나도는 참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사실 왼쪽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첫 번째 과제도 바로 그 ‘버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이 달라지겠지만,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리라고 볼 수는 없죠. 그리고 그렇게 버티면서 자신의 색을 바꾸지 않고, 기가 죽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도나도의 ‘버티기’에서는 은근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말도나도가 F1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투사는 아니고 단순히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뭐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스포츠일 뿐인데요.

어쨌든 F1은 F1대로 말도나도 덕분에 ‘사회주의 국가 출신’이 포함되어 구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말도나도는 세계 최고의 기술과 세계 최고의 기량을 겨루는 스포츠 F1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며 ‘국위선양(?)’을 할 기회를 얻었죠. 어느 정도는 이해관계가 맞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자에게 이해관계가 맞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이건 이것대로 또 쉽지 않은 문제네요. 일단은 사고뭉치 드라이버 말도나도가 F1 무대에서 좀 더 잘 버텨내고 활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할 시간을 좀 벌고 싶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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