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엄령 시대의 시작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④
        2015년 10월 08일 04: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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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 장 내 고향 카마나(Camana)

    카마나는 마닐라 수도권 북부에 위치하는 한 개의 시와 두 개의 타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칼루칸 시와 말라본, 나보타스의 두 자매 마을인데 1970년대 초까지 말라본과 나보타스는 아직 시(市)가 아니었다. 당시의 카마나는 필리핀공산당 CPP의 새롭게 조직된 지역위원회의 활동 지역으로, 당내에서는 D3(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제3지구)로 불렸다.

    현재 이 지역은 발렌수엘라 시를 합병해 「카마나바」〔칼루칸, 말라본, 나보타스, 발렌수엘라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가 되었다. 발렌수엘라는 1970년대 초 무렵에는 아직 마닐라수도권은 아니었고 불라칸 주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후 급속히 근대화가 진행되어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고,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의 노동운동 고양기에는 마닐라 수도권 파업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발렌수엘라 시를 마닐라수도권에 합병하는 것의 필요성을 먼저 인식한 것은 급진운동권이었다. 1975년에 마르코스 정권이 발렌수엘라를 마닐라 수도권에 합병하기 전에 이미 당의 마닐라 ·리잘 지역위원회는 그곳을 제3지구(D3)로지정해 활동지역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칼루칸은 마닐라의 정북 쪽에 위치한다. 말라본은 칼루칸의 북쪽에 있고 마닐라만의 동쪽에 면한 나보타스는 말라본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말라본과 나보타스는 파식(Pasig)에 현청을 둔 리잘 현에 속해 있었다. 이 당시 칼루칸은 이미 시가 되었고, 카마나 지역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도시화와 상업화가 진행되어 산업도 꽤 발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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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타스와 말라본

    나보타스와 말라본은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극히 자연스러운 연계가 있었다. 1859년에 행정구역상으로 독립하기까지 나보타스는 말라본의 일부였다. 1904년에 두 마을은 합병되었지만, 1906년에 미국 식민지 당국에 의한 포고 제 1442호에 의해 나보타스는 말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행정구가 되었다.

    나보타스와 말라본을 지리적으로 구분 짓는 유일한 것은 나보타스 강으로, 이 강이 두 지역의 경계선이 되어 있다. 1960년대까지는 사람들은 나보타스와 말라본을 하나의 마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나보타스 · 말라본에서의 실연을 탄식하는 레이카드 듀엣〔1954년부터 1997년까지 활약한 필리핀 남성 듀엣〕의 노래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나보타스와 말라본 간을 왕래하는 공공교통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작은 나룻배로, 양쪽 강기슭으로부터 한 번에 6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선착장은 5개 정도 있었는데, 지역 사람들은 이를 「바데오」(스페인어로 「여울」이란 뜻)라고 불러 3번 바데오, 4번 바데오 라는 식으로 부르고 있었다. 바데오는 강의 가장 얕은 곳으로 작은 나룻배가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말라본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 배를 이용했다. 요금은 지프니의 3분의 1정도였고,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다. 이 나룻배에서 승객은 스스로 몸의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따금씩 배가 뒤집히는 일도 있었다. 바데오 부근은 강이 얕아 아마 1.5m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강바닥은 진흙투성이로 발이 미끄러져 들어가곤 했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하면 어릴 때 친구들과 자주 그곳에서 헤엄치며 놀곤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보타스강은 1970년대 이후처럼 더럽지 않았다.

    당시의 나보타스와 말라본은 칼루칸시에 비하면 시골이었다. 나이 든 여성들은 퀴아포나 산타크루즈, 마닐라까지 지프니로 갈 경우(도로 상태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1~2시간 정도 걸렸다) 여행용 반다나〔bandanna ; 스카프 혹은 머리 수건〕를 머리에 썼다. 빠르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이 든 여성이 반다나를 쓰는 습관이 없어진 것은 거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교회에서 쓰는 베일도 마찬가지로, 70년대 초 무렵 나보타스의 여성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성당에 갈 때 베일을 섰다.

    나보타스나 말라본의 생활은 여유롭고 틀에 박힌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서로 잘 아는 사이였고, 빈곤한 지역에서는 집과 집을 구분 짓는 담장도 없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장소로 모였다. 사리사리 스토어〔동네 구멍가게〕 앞에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긴 의자가 있었고, 사람들은 거기 앉아 동네 사람들의 뒷담화나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나이든 사람들의 화제는 거의 대부분 종교 얘기나 혹은 호세 리잘〔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주도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로 스페인에 의해 처형됨〕에 관한 얘기였고, 호세 리잘을 숭배하는 천년왕국파라도 있으면 더욱 그랬다.

    종교 얘기는 다미앙 소토의 최근 연설이 화제가 되었다. 이 남자는 라디오의 인기 진행자로 성당, 로마 교황, 성서에 반대하는 무신론자였다. 라디오에서 소토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열을 내며 사리사리 스토어의 심야토론에서 거품을 물곤 했다. 동네 사랑방 토론회에서 내 맘에 들었던 사람은 깡마른 체격에 정신이 약간 왔다갔다 하는 한 노인이었는데, 이 노인은 난쟁이들과 사귀고 있다고 우기곤 했다. 가끔 새로 모임에 합류한 신참이 당신 좀 이상하다고 말하면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옛날엔 맛이 좀 갔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 정신병원에서 정상이라고 증명서를 줬어. 넌 정상이란 증명서 있어?” 이 노인과의 말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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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사리 스토어

    1970년대에 들어서 활동가들이 등장하게 되자, 동네 사랑방에도 청년들이 끼어들게 되면서 정치문제가 거론되게 되었고, 사리사리 스토어의 토론은 정치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내가 동네 사랑방을 지나가면 아저씨들이 나를 불러 함께 얘기하자고 보채곤 했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 문제를 당당히 주장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신기하고도 기분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공산주의가 되면 나라는 어찌 되는지 따위의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 날 내가 사회주의자나 혁명,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결엔가 내가 속한 KM〔애국청년회〕 나보타스 지부의 멤버 전원이 와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동네 사람들의 심각한 질문공세에 곤혹을 치루고 있다고 생각한 한 동지가 KM 사무소에 있는 멤버들을 모두 끌고 온 것이었다.

    나보타스와 말라본은 같은 문화, 같은 기질을 공유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양쪽 다 생활은 여유롭고 한가한 편이었다. 나보타스의 경우는 어촌이라는 성격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보타스는 모든 종류의 어선에 적합한 연안 어장을 가지고 있어 필리핀 어업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어촌인 나보타스는 마닐라만에서 조업하는 저인망 어선에서 수확한 신선한 생선들이 거래되어 밤새도록 활기가 넘쳐흘렀다.

    수확한 고기들은 여기서 인근 지역의 도시나 마을의 시장으로 보내졌다. 말라본에는 가장 큰 규모의 어시장 하나가 있었다. 시청 근처에 있는 타뇽 시장에 있는 「부룽간」(소근소근 속삭인다는 뜻이다)이란 곳으로, 그 이름은 생선을 거래할 때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로 입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

    나보타스의 인구의 대부분은(70~80%)은 어업과 기타 생선 운반, 어망 제작, 어장(魚醬)과 어육 제조 등 수산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말라본의 산업은 훨씬 다양화되어 사탕정제, 연초제조(이 두 가지의 산업은 1900년대 초 공산주의자의 리더였던 크리산토 에반게리스타에 의한 노동조합 결성의 주 타겟이 되었다)나 이랑이랑 꽃에서 추출한 향료의 수출, 그리고 유명한 말라본 판싯(구운 국수)이나 필리핀 과자 등 특산품의 제조가 행해지고 있었다.

    칼루칸(Caloocan)

    칼루칸 시는 나보타스나 말라본과 달리 상점(주물가게, 자동차 수리점, 금속 가게, 오토바이 매장 등)과 창고 · 공장이 산재해 있었다. 마닐라와 가깝고 인구가 밀집해 있어(지금은 마닐라수도권에서 세 번째로 크다) 여유롭고 한가로운 나보타스나 말라본과 비교하면 주민들도 보다 도시화되고 또 비교적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또 칼루칸 시에는 비교적 설비를 갖춘 병원이 있어 카마나 지역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마닐라 중앙대학병원과 필리핀 국철 병원도 있었는데, 둘 다 카마나 지역에서 유명했다. 칼루칸 시에는 대학과 각종 교육기관도 많이 있었다. 칼루칸 시립 기술전문학교와 동(東)칼루칸 대학, 마닐라 중앙대학, 칼루칸 과학고와 그레이스 아카데미 여학교, 성모 루르드 카톨릭 여학교와 그 외에 많은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 당시 칼루칸 시는 「활동가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활동가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UKP(진보운동협의회)사무소에서 나는 칼루칸 시의 활동가들이 야만적인 폭력에 당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칼루칸의 경찰이나 깡패들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아 이빨을 모두 뽑히거나 머리에 수십 바늘을 꿰메는 부상을 당한 동지들의 이야기라든가, 두 명의 형제 활동가가 시장(市長)이 고용한 깡패들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칼루칸 시에서는 활동가가 혼자 있을 때 습격당하지 않도록 야간에는 2인 1조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한 칼루칸은 「빅 포」의 본거지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청년 집단은 1960년대에 칼루칸과 말라본에서 마피아같은 범죄조직을 이끌었는데, 전성기에는 칼루칸 시장 아시스티오의 아들이 그 보스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칼루칸은 그 후, 운동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인권탄압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1971년 10월에 학생들과 노동운동가들이 칼루칸 시에 들어가기 위해 두 번에 걸쳐 행진했을 때, 이 지역의 깡패들과 아시스티오 시장이 보낸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퇴각해야 했다.

    <제 6 장 투사 열전>

    보이 나바레테 :「폭풍의 1/4분기」의 베테랑

    1970년, 내가 열다섯 살이 되어 막 급진운동에 이끌리기 시작했을 무렵, 보이 나바레테를 만났다. 매니 파퀴아오〔WBC 세계챔피언 타이틀 6체급 제패로 유명한 필리핀의 복서〕보다 훨씬 전인 1980년대에 보이 나바레테라는 인기 복서가 다디앙가스 시 출신의 「악동」으로 유명했는데,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악동」이 아니다. 급진적 활동가로 우리 집에 자주 와서 형과 함께 토론하고, 또 함께 자곤 했던 사람이다. 그 역시 복서처럼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로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자주 나한테 얘기하곤 했고, 가능하면 빨리 운동에 투신하라고 권했다. 그는 집회장에서 나를 발견하면 기뻐했고, 반대로 내가 집회장에 안 보이면 우리 형에게 왜 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냐고 묻곤 했다.

    보이 나바레테는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이나 머물곤 했던 최초의 활동가였다. 그는 「폭풍의 1/4분기」의 하이라이트였던 1월 30일 · 31일의 말라카냥 궁 투쟁과 멘디올라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 활동가였다. 그에게는 1970년대의 급진활동가들 특유의 지나치게 엄숙하고 고지식한 분위기가 있었고, 그런 그의 분위기와 태도는 후배 활동가들의 뒷담화 꺼리가 되곤 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그는 집회 선전물이라든가 리플렛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급진화를 「스피드 업」시키려 했다.

    얼마 후 우리 집에는 많은 활동가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음반을 듣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또는 영화를 보는 것 등으로 시간을 보내던 형이었으나 어느 때부턴가 노는 상대가 완전히 달라져 활동가 친구들과 장시간의 토론이나 회의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딘가 가족과도 같은 느낌이 있어 나는 형의 활동가 동지들을 좋아했다. 나는 그들의 토론을 듣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보이는 언제나 내게 토론 내용을 이해하겠냐고 묻곤 했다.

    어느 날 밤, 보이와 형이 나를 프란시스 산틸라노의 빈소에 데리고 갔다. 프란시스는 필리핀 과학고의 학생활동가로 페아티 대학 근처에서의 데모 도중 필 박스를 머리에 맞고 사망했다. 빈소에서의 철야추도회는 마닐라의 산타크루즈에 있는 퀴오그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좁은 장례식장에 수많은 그룹들이 모여 있었고, 지극히 무거운 분위기 속에 활동가들은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

    철야추도회의 긴장

    밤이 깊어갈 즈음 어떤 노래에 의해 활동가 그룹이 두 진영으로 분열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 여기에 참가한 조직 중에

    이 대목에서 철야에 참가한 모두가 자신들의 조직명을 외쳤다─KM!(〔애국청년회 ; 중국파 공산당 CPP의 학생조직〕, SDK!〔민청협 ; 중국파 공산당 CPP의 청년조직〕, MPKP!〔소련파 공산당 PKP의 청년조직〕

    우리들은 알고 싶다
    누가 진짜인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진정 누구인지?
    왜냐하면 배신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후 모두가 혁명의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조직이나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우리 주위에서 MPKP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는 KM과 SDK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는 그대로 이어졌지만 회장의 공기가 점점 긴박해짐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 긴 침묵이 이어졌다. 형은 보이에게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새벽에 될 무렵, 우리는 장례식장을 나와 나보타스로 가는 차를 잡기 위해 아베니다 거리의 인기척 없는 보도를 걷고 있었다. 아베니다 거리에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거리는 시위대가 자주 모이는 거리였지만 그 날은 새벽이었기 때문에 매우 조용해 죽은 듯 고요했다.

    그후 수개월간 나는 보이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별을 고하려 나를 찾아온 그는 자신이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기서 나를 훈련시켜 내가 그의 청년 조직화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게 그의 바램이었다.

    좌파 내의 분열

    산틸라노의 철야추도회에서 경험한 좌파 내부의 분열은 다음 해가 되자 내게도 닥쳐왔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나는 학교 근처의 지역청년 그룹의 토론회에 몇 번인가 초대되어 갔다. 구 소련파 공산당 PKP의 세력이 강했던 말라본의 통수야 지구에도 불려갔다.

    말라본은 크리산토 에반게리스타가 구 필리핀공산당 PKP를 창설한 1930년대로부터 PKP-HMB(공산당-인민해방군)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반란의 전통을 짙게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PKP-HMB의 유명한 리더들은 그 시대에 주로 말라본이나 칼루칸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보타스 시에서는 집을 개축하려고 공사할 때, 천정에 감춰둔 에반게리스타가 쓴 1940년대의 책들이 발견되곤 했다.

    내가 참가한 통수야에서의 한 토론회에서는 MPKP〔소련파 공산당 PKP의 청년조직〕출신의 젊은 리더들이 KM〔애국청년회〕과 호세 마리아 시손〔중국파 공산당 CPP의 의장〕의 「CIA와의 커넥션」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내겐 믿기 어려운 일이어서 이것저것 계속 질문하자 화가 난 의장은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내가 KM에 “완전히 오염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다른 한편 나는 어떤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여러 번 초대를 받았는데, 그 친구의 양친과 조부모는 PKP와 연계가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나는 양 진영의 대립과는 무관했고 초월해 있었다. 그래서 보이나 형으로부터 PKP를 공격하는 CPP의 신문 『앙 바얀』을 받는 한편, PKP로부터는 CPP와 시손에 대한 욕설로 가득찬 PKP 신문 『코뮤니케』를 받았다. PKP로부터 받은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타갈로그어로 쓰여진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지만 1971년 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KM 나보타스 지부에서 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등학교 동지인 레이 네폼세노가 보이 나바레테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보이는 나와 레이를 불라칸 주에 있는 자신의 사무소로 와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불라칸 주의 어디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우리가 찾아 간 사무소는 흔해빠진 2층짜리 빌딩이었다. 외관은 아무리 보아도 활동가 사무실 같지 않은 곳이었다.

    보이는 나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비합 활동을 하고 있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불라칸은 소련파 공산당 PKP와 그 대중조직의 본거지로, 마오주의 노선의 CPP 관련조직에 속해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그가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퀴오그 장례식장의 철야추도회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에게 이 지역에서의 고교생 오르그 활동을 도와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일단 말라본의 동지들과 상의해 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후 우리가 말라본에 돌아와 그룹의 대표에게 이 건을 보고하자, 그는 우리가 말라본에 남아 있어야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며, 불라칸에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지 2~3주 정도 지나, 보이 나바레테는 어느날 밤 우리 집에 왔다.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 사람들은 나바레테처럼 마르고 검게 탔지만 나바레테보다 연상이었고 태도나 행동이 거칠어 보였다. 나바레테는 그들을 동지라고 소개했고 우리 형과 형의 동지들은 그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나바레테와 형의 동지들과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보이 나바레테는 나를 만나러 돌아왔다. 그는 나를 껴안고 “잉갓”이라고 말했다. 잉갓은 활동가들 사이에 작별의 인사말로 “부디 무사히”란 의미의 말이었다. 나중에서야 그 때 그의 방문이, 산 속에 있는 자신의 그룹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는 걸 형에게서 들었다. 그의 태도에 다소간 자포자기적인 느낌이 있었고, 그 요청이 정당한 채널, 즉 해당 당 기관을 통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형은 그의 설득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수개월 후 나는 어느 지방에서 보이 나바레테가 필리핀 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알았던 동지의 죽음에 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혁명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의 희생을 목격하게 될 것임을 당시의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보이 나바레테에 대한 추신

    이 글을 쓰게 되면서 1968년 12월 26일에 있었던 필리핀 공산당 CPP의 결성대회 장소에 대해 「인콰일러 넷」에 게재된 기사를 발견했다. 초대 의장인 호세 마리아 시손은 그 장소를 벽촌의 외진 곳인 바랑가이 듀라칵이었다고 확인했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팡가시낭 주의 아라미노스 시와 바니 마을과 마비니 마을의 경계 지점이다. 회의장은 나바레테 일족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창고로, 나바레테 가(家)는 CPP의 부의장으로 1969년에 죽은 아서 가르시아의 처가였다. 1970~72년의 짧은 기간 동안 알게 됐던 저 보이 나바레테가 이 일족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곤 했다. 설사 관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필리핀 계엄

    계엄령 하 1972년의 경찰 진압 모습(출처=arkibongbayan.org)

    파트2: 계엄령 시대(1972년~1985년)

    제 7 장 계엄령의 발포

    1972년 9월 23일 아침, 눈을 뜨자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TV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도 부웅~하는 잡음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의 나보타스 지부의 한 동지가 나를 마닐라의 다른 동지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후 몇 명의 동지가 오더니 계엄령이 발포되었고, 어젯밤에 몇 명의 동지들과 반정부 인사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 동지가 당 중앙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지만, 그 때까지 집에 있는 당의 서류나 증거물을 태워 없애거나 숨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보타스의 KM〔애국청년회〕과 다른 모든 대중조직의 사무소로부터 철수하고 집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경찰이나 군에 의한 일제 검속을 피하기 위해 밤에는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 했다. 「안전한 장소」라는 건 급진운동과 관계없는 친구나 친척집을 말하는 것으로, 군의 일제 단속을 받기 쉬운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

    우리는 오후에 나보타스로 돌아와 한 동지의 집에 모여 마르코스의 라디오 성명을 기다렸다. 라디오는 저녁 무렵 방송을 재개했다. 포고령 1081호를 마르코스가 읽어 내렸다. 필리핀 전국에 계엄령 및 관계되는 일반 명령이 발포되었고, 그에 의해 KM〔애국청년회〕과 SDK〔민청협〕등 모든 급진조직은 비합법화 되었다. 또 인신보호령이 철폐되고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야간통행금지령이 발령되는 등 수많은 탄압 수단이 강구되었다.

    유언비어나 4인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일반명령도 있었다. 필리핀에서 조상의 묘에 성묘하는 11월 1일의 만령제(萬靈祭)와 4인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일반명령이 충돌했다. 그 해 만령제 일주일 전에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독극물을 살포하여 마닐라 인근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시위로 번지게 되는 것을 우려한 계엄 당국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우리는 사무실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행동은 다음과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 중에는 자택에 있다가 저녁 무렵부터 잠 잘 장소를 물색했다. 야간통행금지령이 전국에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옥내에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노상에서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어느날 나는 말라본에 있는 형이 아는 사람 집에 묵기 위해 동지들을 여러 명 데리고 갔다. 다음 날, 형의 친지는 나 혼자라면 문제없으나 다른 사람들까지 묵게 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어느 학교 동창의 집에 다른 한 사람의 동지와 함께 묵기로 했을 때, 그 친구의 부친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계엄령은 사람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나는 하루라도 집에 묵게 해준 것을 감사하면서 이후 두 번 다시 그 사람들의 집에는 가지 않았다.

    계엄령 발포 후 2, 3주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동지의 집이 군에 의해 급습을 받았다거나 활동가의 리더가 체포됐다는 소식, 때로는 살해됐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 견디지 못한 몇 명의 동지들이 군에 투항하거나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

    절호의 타이밍

    계엄령과 군정의 포고는 독재자 마르코스에 있어 이 이상 좋을 수 없는 절호의 타이밍에 행해졌다. 마르코스의 독단과 전횡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자유주의 야당의 압력에 의해 구성된 제헌의회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가 패배하고 숙적 베니그노 아키노가 정권을 잡을 것이 확실했다. 또한 마르코스에게는 학생과 노동자 농민들의 급진화라고 하는 점증하는 위협이 있었고, 그것이 국민 전체에 전염되어 마르코스 체제를 현실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공산당 CPP의 조직화 계획은 계엄령 이전부터 이미 포커스가 농촌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로 인해 도시부의 노동자 계급운동의 전진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자명했다. 대중을 동원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무대가 갖추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CPP는 농촌부에 게릴라 지역을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전개한다는 기존의 군사방침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은 계급투쟁의 강화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의 지구전 전략을 펼쳐나가려 했다. 이 게릴라 지역의 확대라고 하는 미숙한 방침에 의해 당의 우수한 간부와 당원들 중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 때문에 1970년 「1/4분기의 폭풍」에 의해 마닐라 수도권에서 형성된 대중운동의 고양은 1972년의 계엄령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공산당 간부는 도시부에서의 저항 운동의 지도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 새로운 게릴라 지역을 확대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이 1972년의 계엄령 포고에 대항해 내건 슬로건이 “계엄령에 반격하는 인민전쟁을!”이었다.

    도시부의 저항투쟁을 선동하려다 실패로 끝난 어설픈 계획도 있었다. 계엄령이 포고된 지 2~3주가 지난 즈음, 마닐라의 산타크루즈 교회에 모여 시위를 조직하라는 지령이 당 지역위원회로부터 내려왔다. 이 계획은 해산된 의회의 상하 양원 의원 몇 명이 모여 계엄령 포고에 대한 반대투표를 실시하려고 하는 계획과 연동되어 있었다. 우리는 대중운동의 힘으로, 그리고 필요하면 무력에 의한 저항으로 교회에서의 집회를 사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무력에 의한 저항”은 무장한 소그룹이 교회의 첨탑을 점거, 경찰과 군대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다행이 이 유혈 시나리오는 실행되지 않았다)

    뒤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리고벨토 티글리아(그는 2002년에 아로요 대통령의 수석보좌관이 된다)의 지도하에 있던 당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가 이 실패로 끝난 투쟁을 계획했다.

    그 날 교회에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몇 명인가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로 인해 집회 장소는 비논도 성당으로 급거 변경되었고, 활동을 금지당한 야당 의원 수명이 참가한 가운데 순수한 미사가 항의의 의사를 담아 행해졌다. 이후 새로운 투쟁의 재조직화 계획은 들려오지 않았다.

    계엄령 초기 도시부에서의 지하활동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당 간부와 당원들의 자부심과 헌신에 의해 필리핀공산당 CPP는 1970년대 중반에는 나름의 재건에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수많은 희생이 수반되었다.

    카마나의 재건

    수개월 후 나는 카마나 지구에 남아있는 당원들의 재조직에 착수했다. 당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도 재건되었다. 일부 당원들이 체포되거나 타 지방 또는 타 주로 전속되었지만 마닐라 수도권과 인근 지역 활동가들을 재결집해 나갔다.

    우리 지구에서는 당원과 활동가의 네트웍으로 구성된 지하활동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다. 각 멤버는 6명 이하로 구성되는 집단에 속해 「지하 아지트」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지하 아지트」는 일반 가정처럼 보이게 하여 당 사무실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위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집에는 일반적인 가족, 즉 부부와 노인, 어린이가 있도록 해야 한다는 방침이 내려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모두 젊었기 때문에(나는 17세였고, 우리 집단의 평균연령은 20세였다)방침대로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사촌지간으로 함께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거나, 혹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든가 마닐라 수도권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방어와 공격

    계엄령 하에서 자기방어를 위해 좌익 활동에는 다양한 행동이 요구됐다. 조직과 개인의 보위가 그 중심이었고, 「적」의 눈을 피해 어떻게 숨어 다녀야 하는가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도주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권총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마닐라 수도권의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총을 소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포포이 동지도 가지고 있었고 나도 총신을 짧게 만든 세뇨리타 리볼버를 가지고 다녔다.

    공공장소에서 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위험했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회자되었다. 어느 날 나는 권총을 왼 발 양말 속에 감추고 지프니〔소형버스와 같은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 지프차를 개조해 만든 것이 그 유래〕작은 버스를 탔는데 도중에 권총이 양말에서 빠져나와 차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총을 본 승객들이 숨을 죽인 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승객들은 아마도 나를 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총을 집어 들어 운전사에게 속도를 낮출 것을 주문하고선 잽싸게 지프니에서 뛰어내려 어두운 골목으로 뛰었다.

    또 한 번은 한 여성동지가 당시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 대열에 서 있도록 명령받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핸드백에 든 물건들을 도로에 떨어트려 궁지를 벗어났다. 경찰은 그녀가 떨어트린 물건들을 줍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몸수색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몸수색을 당했더라면 그녀의 양장 차림 속 허리에 찬 포치에서 총이 나왔을 것이다.

    공격 작전도 몇 번인가 시도되었다. 두 명의 여성동지가 말라본 대학 당국의 어떤 남자 직원을 처형하라는 특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남자는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체포하는 것을 도와준 군의 협력자였다. 두 명의 여성 동지는 다른 지역의 활동가로, 대학에서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밤 짙은 화장을 하고,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드레스를 입고 대학으로 향하는 그녀들을 배웅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녀들은 대학 거리의 가장 끝 건물에서 그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구내에서 이용 가능한 유일한 교통수단은 고속도로와 대학 구내를 부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지프니 뿐이었다.

    그 남자가 나오자 그녀들은 파티에 가야하는데 좀처럼 지프니가 안 온다고 큰소리로 얘기했다. 여학생을 유혹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있는 그 직원(제거대상으로 결정하게 된 그의 죄상 중에는 강간 사건도 있었다)은 그녀들을 자신의 차에 타도록 유혹했다. 한 사람이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고, 또 한 사람이 뒷좌석에 앉았다. 남자가 운전을 하는 동안 두 여인은 수다를 떨었다.

    어두운 장소에 이르자 뒷좌석에 앉아있던 여성 동지가 핸드백에서 총을 꺼내 남자의 목덜미에 총구를 들이댔다.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이유에선가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차는 급회전하여 나무에 충돌했고 차 안에 있던 3명은 거꾸로 뒤집혀졌다. 두 명의 여성 동지들은 겨우 차에서 빠져나와 미리 대학구내에 세워 둔 도주용 차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이 작전이 실패한 후 두 여성 동지는 카마나를 떠나 각각 자신들의 당 조직으로 돌아갔다. <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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