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국론의 유혹 넘어서야
    [에정칼럼] 기후정의 운동의 능동적 기획이 더욱 중요
        2015년 10월 07일 03: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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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주의자, 혹은 좌파들은 다른 무엇보다 이윤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인류의 역사 초기부터 많은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있었지만,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과 자본 축적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필요를 넘어서는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규모와 정도의 폭력과 비극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의 이윤 동기는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그야말로 ‘쥐어짜낸다’는 의미의 착취가 가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좌파들은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에 반대하며,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 인간과 자연이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폭력들은 시장 탓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의 축적은 스스로 모순을 쌓아가고 위기를 초래하며,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좌파들에게 익숙한 논리 전개다. 그러나 그러한 파국이 실제로 언제 어떤 모양새로 다가오게 될지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수의 좌파들은 모종의 파국론을 전제하여 미래를 예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며 전략을 궁리하려 한다.

    절반만 실현된 파국론의 시나리오

    좌파의 정치경제학에서 이런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두 이론이 있다면 아마도 노동대중 궁핍화론과 공황이론일 것 같다.

    자본가가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동력의 가치를 일정 부분 수탈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착취가 노동대중을 점점 궁핍하게 만들고 이를 견디다 못해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각성하게 되면서 혁명의 주체로 성장한다는 게 기본 논리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경험에서 우리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절반 정도만 실현되었음을 보았다.

    한편에서는 더욱 궁핍해지는 노동자들이 있지만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노동귀족과 중간계급이 생겨나서 계급타협에 나섰다. 수탈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마이카와 세탁기, 냉장고는 노동자들을 체제 내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착취에 따른 노동자들의 구매력 부족 때문이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공황 또는 주기적인 경제위기가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교란하거나 붕괴시킬 것이라는 예상도 비슷하다. 1930년대의 공황부터 최근의 오큐파이 운동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여러 차례 구조적 경제 위기가 닥쳤고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었지만, 자본주의는 때로는 전쟁을 포함하는 의도적 낭비와 소비로 때로는 국제기구를 통한 개입 수단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물론 이면에서는 제국주의, 파시즘, 파워엘리트의 그림자 정부, 제3세계의 희생 등의 온갖 ‘나쁜 짓’들이 벌어졌으니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의 책임은 면해질 수 없다. 또 위기가 온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어서 앞으로 더 큰 위기를 불러오게 될 것이며 사람들이 분노해 떨쳐 일어설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역시 시나리오의 나머지 절반은 실현되지 않았다.

    기후변화

    자연 착취와 기상 변화에 대해서도 파국론을 넘어야

    자연에 대한 착취 측면에서도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이라는 서로 연결되는 두 개의 큰 이슈가 있으니, 여기서도 좌파들의 설명은 기본적으로 파국론에 가깝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될 경우 금세기말 4도 안팎의 평균 기온 상승이 있을 것인데, 이는 인간의 생존 조건 측면에서도 파국에 가까운 결과다.

    하지만 IPCC가 주문하는 바 또는 더 진지한 환경단체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2도 상승에서 멈추게 하기 위해 선진국 중심의 온실가스 다배출국들이 급격히 배출을 줄일 것이라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미국, 중국은 물론 현재 OECD 국가 중 온실가스 배출 순위 6위인 한국도 모두 축적을 위한 생산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국제 협상에서 서로 눈치만 보는 형편이라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국제 기후변화 체제 논의도 공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룡에 이어 인간의 멸종은 불가피한가? 이 역시 단언하기는 어렵다.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될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만, 중국의 성장 위축에 따른 세계적 경기 하락은 온실가스 배출 추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급격히 높아지는 평균 기온과 빈번해지는 기상 재해가 배출 저감에 기여하는 사업을 더 빨리 성장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자본가들은 당연히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석유정점은 여전히 현실의 논리다. 땅 속에 묻힌 재래식 석유의 부존량은 한계가 있고 중동에 편중된 매장량도 국제 수급의 위협 요인으로 상존한다. 최근 배럴당 50달러 선으로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는 국제 유가조차 북미의 셰일에너지와의 출혈경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셰일혁명은 오히려 석유정점의 그림자가 언제나 어른거림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 시장의 경쟁이 재래식 석유의 십 수 년 내 고갈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하루아침에 각국의 민중들이 주유소 앞에서 긴 줄을 서게 될 것이라는 그림은 그리 현실적인 게 아니다. 중국과 인도의 석유 수요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늘어나겠지만, 셰일가스뿐 아니라 태양에너지 발전, 전기차, 대체 합성물 소재가 시장에 진출하면서 석유 수요의 상승 추세도 수그러들 것이다. 석유정점은 전문가들이 기술적으로 예측하는 시점과 그것이 만들어낼 위기 상황 전망의 근처 어딘가에서 매우 복잡한 소동과 현상으로 나타날 것 같다.

    시장은 어떻게든 작동한다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이며, 그것이 더 큰 위기나 폭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극복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금도 미국의 파생상품 경제의 위기,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논란은 국제 금융 기구들의 개입들이 언 발에 오줌누기 대책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탄소배출권 거래제 같은 시장을 통한 기후위기 해결 장치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석유 자본들이 기존의 시장 장악력으로 재생에너지의 보급을 방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은 잘 작동하지 않더라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가 초래하는 숱한 문제들에 대해서 시장은 나름대로 반응해왔고 또 작동해왔다. 그것이 인간을 위한, 자연을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자본의 대행자들이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해법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다라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자본과 시장은 ‘파국’에 대해서도 ‘나름’의 반응을 보일 것이며, 이미 어느 정도는 그래왔다.

    그렇다면 파국을 예상하고 폭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혁명가와 개혁가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체제의 능동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봉기로는 불충분했고, 1960년대의 저항들은 파편적이었다. 때문에 좌파는 간단히 정치적, 경제적 파국을 예단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사회 변혁을 위한 어려운 모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 게다. 요컨대는 파국을 기다리기 전에 자본주의적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기획들을 현실의 운동과 접목시키고 가교를 놓는 노력들이다.

    기후정의 운동 역시 파국론에 기대지 않는 그러한 능동적 기획들이 긴요한 시점이 아닐까. 코펜하겐과 뉴욕에서 울려 퍼진 “기후 말고 체제를 전환하라(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큰 구호와 에너지 전환마을(Transition Town)의 지역적 프로그램 사이의 공백을 잇는 담론들, 에너지 체제의 중장기적 변화와 지금 밀양과 삼척, 영덕의 싸움을 잇는 기획들 말이다. 지금의 시장은 나쁘지만 그 시장은 파국을 통해 극복되지 않을 것이며, 에너지 전환과 체제 전환은 봉기의 선언이 아니라 어쩌면 도둑처럼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국이 저절로 오지 않는 것만큼이나 도둑도 저절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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