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의미,
    '서로 기대어' 전시에서 돌아보다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세상을 읽다] 이강훈
        2015년 09월 29일 1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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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 인도의 민중사와 현대사를 연재했던 부산외국어대의 이광수 선생이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세상을 읽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 사진이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절규하고 슬며시 건네는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보자는 취지이다. 주로 사진이지만 때로는 책 등의 다른 매체에 대한 얘기도 건넬 계획이다. 독자들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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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온통 사진으로 뒤덮여 있다. 사진이 실재를 만들고, 실재가 사진 이미지에 치여 그 존재감을 잃는 게 비일비재하다. 이제 이 사회에서 사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 사회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언어이며, 무기이며, 권력이다.

    그런데 사실, 사진은 기껏 해 봤자 전유일 뿐이다. 제 아무리 기를 쓰고 용을 써도 대상의 문화적 성격이나 의미를 그대로 적시할 수는 없는 매체다. 사진은 같은 언어이지만, 글이나 말과는 달리 그 재현 방식이 너무나 단순해서 복잡다단한 실재의 의미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전달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다보니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애초 기대와는 달리 의외의 현상이 생기곤 한다.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는 이미지인데다, 그 언어 또한 유추 언어이기 때문이다.

    기호 외에는 마땅한 의사 전달 수단이 없는 사진으로서는 메시지 전달의 역할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생산과 소비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니, 지극히 탈구조 시대의 문화에 잘 맞는 매체다.

    사진은 이러한 본질적 한계 위에서 두 가지의 전혀 색다른 길을 모색해 왔다. 하나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그 위에서 대상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최대한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 이른바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다른 하나는 그 한계를 역으로 더 심화시켜 대상이 갖는 본래의 성격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차이를 더 벌려버리는 것이다.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예술 사진이다.

    어떤 사진이든 기록성과 예술성 모두를 얼마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칼로 무 자르듯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다. 어느 사진을 하는 게 더 우월하다고도 할 수 없다.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많이 갖는 사진을 보고 평가하는 눈과 예술성을 갖는 사진을 보고 평가하는 눈이 서로 다를 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 그 정의가 어디서부터 출발했고, 그 쓰임새가 얼마나 넓은지와 관계없이 – 사진이 갖는 기록성을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서 사진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최대한 바로 닿도록 만드는 양식의 사진이다. 그런데 기록이라는 것은 항상 이 사회에서 글깨나 쓰고 말깨나 하는 기득권자들이 하는 일이라, 그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은 그 영역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 하찮은 자들이 하는 일이고, 무의미 하거나, 때로는 불순한 것이라 평가 받는 것으로, 대부분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그 세상의 주인공들은 역사 없는 자들이 되어버리고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에피소드로 전락할 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 사진가 하면, 사회에서 소외 당하고,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도덕이나 진리의 틀에 맞지 않거나 모순이거나 전복적인 것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을 잔잔하게 전달하든, 가슴 뭉클하게 전달하든, 피를 토하는 사자후로 전달하든 그 방식은 철저히 그것을 말하려 하는 사진가에게 달려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권력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소외된 약자들에게 시선을 꽂는 일이다.

    이강훈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첫 발을 참 잘 뗐다. 전업 작가로서 그의 고민은 ‘사진가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고, ‘사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사진의 양식에 대한 고민이 아니고 사진가로서의 삶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그 첫 관심을 가족에 두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가족 그런 거 말고, 가족이라 말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족 말이다. 2011년 발표한 첫 작업은 남자 둘이 사는 가족이었다. 생면부지의 남자 두 사람, 사회에서 쫓겨난 쪽방촌 노년의 남자 둘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았다. <눈에 밟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5년 이강훈은 이번에 다시 한 번 더 가족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도 가족 아닌 가족 이야기다. 성수동 쪽방촌, 어둡고 깊은 골목 어느 반지하에 사는 두 노인. 말로 할 수 없는, 그렇지만 사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의, 그 서럽고 굴곡진 사연으로 구성진 두 인생이 만나 40년을 함께 살았다,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로. 몸 성한 곳 한 군데도 없고, 이제 그 몸으로 막노동조차 할 수 없는, 돌봐 줄 가족도 없이 사는 삶이다. 그냥 목숨 부지일 뿐일까? 법적 부부가 아니니 부부가 아니요, 가족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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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사진은 이강훈 작가

    이강훈은 작업한 지 1년 만에 그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숙명의 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끈 안에서 ‘살갗’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 ‘살갗’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잊힌 자,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휴머니즘을 말하고 싶었고, 산다는 것, 그 훈훈함을 말하고 싶었다.

    1년 만에, 사진가는 다른 것을 다시 보았다. 그들은 과연 무엇인가? 부부 아닌 부부, 가족 아닌 가족인가? 그저 같이 사는 동거인 아닐까? 두 사람 사이에 자식도 없으니 누구 한 사람 밤 보따리 하나 달랑 싸고, 반지하 그 집 철문 열고 나가면 서로 영영 찾을 수도 없는 그런 사이 아닐까? 순간은 지체 없이 영원한 남이 되는 사이는 아닐까? 그들 사이에 과연 ‘살갗’은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그대, 내 맘 안에 들어와 있는가? 나, 그대 안에 들어가 있기는 하는 것인가? 사진가는 느닷없이 낯선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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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스스로도 모르는 복잡 미묘한 감성의 선을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감성, 그것도 무시로 변하는, 자신도 파악할 수 없는, 그 무(無)본질의 현란한 변화의 세계를 단편적이고 순간적이고 탈맥락적인 사진으로 재현할 수는 있을까? 인간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행하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애매한 메타 감정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기는 하는 것일까?

    사진가 이강훈은 어렵지만 반드시 내딛어야 할 두 번째 발을 내딛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기록하는 것이 사진으로 하는 전유다. 기록이되 문학적인 기록. 서사이되, 객관적이지 않는 자만이 보는 또 하나의 서사다.

    〈서로 기대어〉는 몇 십 장의 이미지로 사진가 이강훈만이 본 것을 때로는 있는 그대로, 때로는 사진가가 전유하여 기록한 작품이다. 사실의 기록도 있지만, 사진가만이 본 느낌의 재현도 있다. 사진가가 재현한 바를 굳이 독자가 다 이해해 주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독자에게는 독자 나름의 해석 공간을 주면 된다.

    혼자 누워 있는 할머니의 방, 또 혼자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방, 둘이 같은 공간에 있으나 그 사이를 벽으로 가르는 그 방, 그 방을 통해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을, 그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독자가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해석하도록 두는 게 좋다. 이강훈의 〈서로 기대어〉가 좋은 다큐멘터리인 것은 그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미묘함이 정리되지 않은 채 섞여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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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 살만한 세상인가? 그 세상에 사람이 살고 있는가? 돈과 권력이 사람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빙벽같이 서 있지 않은가? 그 그늘에서도 꽃은 피는가? 그 꽃을 우리는 보아 주기는 하는가?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세상, 보이되 보이지 않는 그 사람들도 함께 사는 세상, 그 세상에서 이강훈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 기록하되 공감하고, 공감하되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가족 아닌 가족, 세 번째 작업은 무엇이 될까? 남편에게 버림받은 두 여자가 함께 사는 삶일까? 버려진 생명들을 입양하여 자식으로 키우는 가족 이야기일까? 돈과 권력이 만든 세상, 그 뒤안길 어둡고 침침한 세상으로 사진가 이강훈이 간다. 그들의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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