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자유인이자 세계인
    [책소개]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글항아리)
        2015년 09월 26일 11: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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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의 노래』는 나의 기원이다.” ―가토 슈이치

    이 책은 20세기를 이해하는 데 평생을 바쳐온 ‘세계사적 자유인’ 가토 슈이치(1919~2008)가 50대에 출간한 자서전이다. 일본에서 출간 후 40여 쇄 이상을 찍으며 널리 읽히고 곧 영미권과 유럽에도 번역 출간된 것을 생각하면 한국어판은 상당히 늦은 셈이다.

    한국어판 『양의 노래』는 저자가 1966년부터 『아사히저널』에 연재한 『양의 노래』와 『(속)양의 노래』 그리고 수년 후 미국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쓴 『양의 노래 그 후』를 엮은 것이다.

    가토 슈이치는 20대에 태평양전쟁과 히로시마 폭격을 겪은 뒤 프랑스에 유학했고 이후 일생에 걸쳐 온 대륙을 다니며 글 쓰고 강의했다. 유연하고도 철두철미한 지성으로 평생 특정 환경에 묶이지 않고 그 자신의 길을 갔던 그는 세계의 다양한 사안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으며 말년에는 일본 평화헌법 9조 수호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반생을 담은 『양의 노래』는, 한 인간의 견고한 정신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은 놀라운 기록이자 극단의 시대에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한 세계시민의 문명비평 비망록이다.

    세계사적 지성의 성장

    가토 슈이치는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다. 그는 혜택 받은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조부는 간토평야의 대지주였고 외조부는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유학하여 서양풍의 교양과 미식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부친은 도쿄의 개업의였으나 돈벌이와 무관하게 성미대로 진찰을 했고 환자를 대접해 돈을 벌겠다는 식의 영업의식이 없었다. 그 덕에 환자는 극히 적었지만 생계는 검소하며 평온했고, 가토는 금욕주의적 합리성이 견고한 집과 군국주의 색채가 강한 수재학교를 오가며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어려서 가토는 자연과학을 좋아했고 독서와 공부 모두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한 학년을 건너뛰어 일류중학교에 합격했지만 그는 그 시절을 가장 따분하고 괴로웠던 시기, ‘공백’이라 표현한다. 이 극단적인 공백에 그가 채워 넣은 것이 그의 평생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식견이었다.

    중학 시절 가토는 외조부를 따라 영화와 극을 보러 다니며 문학과 공연예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문학에 심취해 고등학교 수험에 실패하기도 했으나 본시 주관이 선명했던 소년의 세계에 문화예술이 더해진 이후 그의 삶에 좌절이라 할 만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으로 도쿄가 술렁이던 날 극장에서 분라쿠文樂공연을 보았고 매일이 전쟁 소식으로 뒤덮일 때 국민복國民服 차림의 사람들이 늘어선 도쿄 거리를 여행자처럼 걸었다. 이즈음 그는 스스로가 처음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후 대륙을 건너다니며 여러 사회의 주변부에서 진지한 관찰자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는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해 대학에서 의사로서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당대의 여러 문인과 지우를 얻어 글을 쓰고 문학회를 꾸렸다. 그러는 동안 천황제 파시즘을 겪었고 전쟁에 동원된 친구들의 죽음과 상처를 보았으며 미일합동 원폭의학조사단에 참여해 히로시마에 가기도 했다.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서 슬픔에 잠기기도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어떤 국면에서든 그는 놀랍도록 그 자신이다. 패전 후 폐허가 된 도쿄에서 정부가 비장하게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를 선전하는 가운데 공연한 분노나 선동된 비감함 한 점 없이 일상의 풍경에서 사람들의 활기를 읽어내는 모습은 가토 슈이치라는 인간의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가토 슈이치

    견문을 거듭한 반생

    태평양전쟁 이후 가토 슈이치는 기회를 얻어 프랑스로 유학한다. 이를 그는 스스로 ‘제2의 출발’이라고 썼다. 파리의 대학촌에 방을 얻어 각국의 청년들과 문학, 그림, 시에 관해 논하는가 하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건축과 음악, 공연을 깊이 즐기는 나날이 이어진다. 단기 통역을 하거나 일본에 견문을 글로 써 보내는 등의 벌이로 넉넉지 않은 생활이지만 그는 언제든 해당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엄정한 자기성찰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감탄으로, 때로는 그저 세계에 관한 끝없는 탐구와 질문으로 나아간다. 어느 때건 놀라운 것은 그의 동나지 않는 날카로운 호기심이다. ‘제2의 출발’ 이후의 여정은 가토의 친구들이 그를 ‘세계사적 자유인’이라고 한 뜻을 절감케 한다.

    뒤에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 참석해 인도를 거쳐 타슈켄트에 거하기도 하고, 좀 더 후에는 유럽과 미국, 캐나다, 중국과 소련, 동유럽을 넘나들며 여러 도시에서 글을 쓰고 강의했다. 반전운동, 일본 학생운동, 오월혁명, 문화대혁명, 프라하의 봄, 독일 통일, 신좌파의 부흥과 침체, 중국식 사회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현장 등을 몸소 체험하거나 목격하는 동안 당대 인물들과 교분을 맺었고 그 자신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정치세력에 깊이 몸담거나 특정 집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 주변을 호령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에 비켜서서 20세기의 풍경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 원칙과 판단을 구축해나간다.

    2015년에 가토 슈이치를 읽는다는 것

    『양의 노래』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의 중턱에서 끝난다. 그는 수십 년 동안에도 정부 정책에 반대해 참여지식인으로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지만 책에서는 스스로 “목숨 걸고 정치활동에 뛰어들 만큼 정치적 도의를 믿었던 적은 없다”고 썼다. 다만 그 이상으로 출세와 영달을 믿지 않았기에, 지적 만족을 추구하는 가운데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의견을 표명했을 따름이다.

    기시 노부스케 정권에 반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전쟁은 정치적 행위이며 모든 정치적 행동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잃은 생명의 가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절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방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이 흐른 뒤, 『양의 노래』의 기록보다 뒤의 시기에 그는 분명 일종의 ‘정치활동’에 발 벗고 나선다. 오에 겐자부로, 쓰루미 슌스케 등과 ‘9조 모임’을 만들어 일본 평화헌법 수호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상대적인 목적과 이념들이 난무했던 20세기를 관통한 끝에 그가 얻은 답은 ‘생명 가치’였던 셈이다. 가토는 일본헌법 9조를 “일본인이 이어가고 있는 ‘정신의 모험’”이라 말했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를 향한 서약을 담은 국제적 공약이자, 전후 수십 년간 일본인이 평화라는 이상을 지켜내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양의 노래』는 수많은 정치 이념의 상대성과 일면성 반대편에 있는 어떤 절대적인 것의 가치를 스스로 온전히 납득할 때까지 세계 속에서 멈춤 없이 사유해온 인물의 이야기다. 그가 말년에 확고한 행동으로 지지한 평화헌법에 그가 붙인 이름을 이 책에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노래』는 ‘가토 슈이치가 이어간 정신의 모험’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대성했다가 상황에 따라 끌어내려지는 어떤 다른 사회적 삶들과 달리, 그의 이야기는 평생에 걸쳐 완성되어가는 듯 보인다. 어떤 이상을 지켜내면서, 그리고 어떤 상대적인 가치에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으면서. 양의 해에 태어나 스스로 부드러운 양의 성품을 닮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무리 짓지 않는 양이다. 너무도 자유롭게 자신만의 모험을 계속해나간다. 인생을 일생에 걸친 모험으로서 감당하면서 어떤 이상을 유연하게 지켜간 가토 슈이치의 삶이 하나의 전범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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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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