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당을 위한 변명
    [기고] 진보혁신의 키워드는 '존중'과 '배려'
        2015년 09월 24일 03: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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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혁신회의’의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논의의 이해와 관심을 위해 정의당 인천시당 김성진 위원장과 민주노총 이근원 전 정치위원장(링크)의 두 글을 게재한다. 김성진 위원장의 글은 자신의 블로그에 있는 걸 본인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이근원 전 정치위원장은 직접 글을 기고해줬다. 약간 결이 달라보이지만 진보정치의 단결과 혁신을 위한 마음과 진정성에서는 똑같았다. 일독들을 권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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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큰 희망과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정의당, 진보정치+,노동정치연대, 국민모임이 모여 ‘진보결집과 혁신을 위한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국민들에게 결집과 혁신을 약속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려오는 얘기들은 또 다른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정의당의 당명을 바꾸어야 하고, 강령도 고쳐야 하고, 당권을 나누어야 하고 대의체계 지분도 나누어야 한단다. 서로 양보를 강요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 또 다시 재현되고 있다. 논의의 그 어느 꼭지에도 진보진영이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불과 몇 년전 우리가 진보정치를 어떻게 말아 먹었는지, 회한도,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찾아 볼 수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도 없다.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면서 대중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면서 그 옛날처럼 대장들 몇몇이 테이블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다.

    당 이름을 바꾸고 대표를 나눠하고 지분을 나누는 것이 혁신이라면 그렇게 하자. 누구말대로 그 까짓게 뭐라고..

    민주노동당 시절, 진보대통합 논의가 있었다. 나는 진보신당과의 통합이 우선이고 참여당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진보신당의 모모한 사람들은 참여당과의 통합을 위한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부결이 되어야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신당을 배제한 참여당과의 통합 결의를 부결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안건은 작은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위한 안건은 부결되어 버렸다.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이 강령에 들어가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었다.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 그까짓 게 뭐라고…

    그때 나는 이쪽 저쪽에서 내가 평생에 얻어 먹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김성진

    2014년인천시장 후보 시절의 김성진 위원장(오른쪽. 사진=정의당)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사람들과 참여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모여 통합진보당이 탄생되었다. 국민들은 희망을 보았고 통합진보당에게 13석이나 되는 국회 의석을 주었다. 진보정당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스스로 밥상을 둘러 엎어 버렸다.

    새누리당이 위대한 것은 아무리 이해관계가 복잡해도 숟가락만 들고 왔다갔다할 뿐 절대로 자신들의 밥상은 걷어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뱃지 하나를 지키기 위해 통합진보당은 보여 줄 것 못 보여 줄 것 할 것 없이 온 국민들에게 다 보여 주었다. 그까짓 금뱃지 하나가 뭐라고…

    대중주체 관점과 단결은 이른바 자민통의 핵심 키워드이다. 대중을 운동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끊임없이 그 지위와 역할을 높혀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을 믿지 못했는지 그 모든 자리를 자신들이 독점하였다. 자신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자신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혁명에 이를 수 없다는 태도는 단결의 구심이 아니라 분열의 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앙위 폭력사태는 패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었고, 온 국민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갈등이 깊어짐에 따라 참여계의 모모한 인사를 일러 미국의 세작이라는 말까지 돌렸다. 도대체 미국의 세작을 끌어 들인 사람이 누구인데 말이다. 갈라설 수밖에 없었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폐허 위에서 정의당은 만들어졌다.

    당의 분열은 진보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만들었고, 탈당을 하고서도 아무 당적도 갖지 않는 사람들을 양산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었지만, 이른바 활동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그러했다. 정의당더러 개량이라고 했고,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고 했다. 방관자로 평론가로 스스로를 위치지었다. 정의당의 참여계를 빗대어 개량 운운하는 사람 중에는 내가 참여당과의 선통합을 반대할 때 찬성을 하지 않았다고 욕을 욕을 해댄 사람도 있다.

    어느날, 정동영씨가 진보정치의 대표주자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놀라왔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것보다 더 놀라왔던 것은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주장했던 분들이 정동영씨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동영씨가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얼마나 체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 많았던 관악 보궐선거 이후에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구하나 그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 또한 한 사람도 없다.

    정의당은 참 이상한 정당이다. 참여당을 끌어들인 사람들과는 원수가 되었고, 통합을 꺼렸던 사람들이 모여 당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했고 그래서 더 악착같이 지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렇게 우리는 겨우 여기까지 왔다.

    지난 지방선거 때, 유권자들은 우리더러 통진당이 아니냐고 했다. 우리는 통진당이 아니라 정의당이라고 했다. 설명할 길이 없어 노회찬, 심상정이 있는 당이라고 했다. 노회찬, 심상정마저 모르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인천에서 금쪽보다 귀한 구청장 둘을 잃었고, 뼈저린 패배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몇번째인지 모르지만 나는 내년 총선에 또 출마해야 한다. 당명을 바꾸고 그 짓을 또 하라고?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정의당은 이미 당명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홍을 겪은 바 있다. 5공시절 민주정의당도 아닌 정의당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당원총투표를 통해서이다. 사회민주당으로 하자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의당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공통점을 찾아 가는 정당이지 하나의 이념으로 일색화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는 통합하는 정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바꾸자. 그까짓 당이름이 뭐라고. 사회민주당으로? 사회주의당으로? 아니면 평등평화의 당으로? 그러나 안타깝지만 지금과 같이 대표들 몇몇이 모여 합의하는 방식으로는 당명은 바꿀 수가 없다. 심상정 대표가 아니라 심상정 할머니가 와도 자신할 수가 없다. 당원 어느 누구도 대표에게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다. 그러다 당대회나 당원총투표에 부쳐서 부결되면 그냥 없었던 일로? 탈당이라도 해야 되는 건가?

    당명뿐만 아니라 강령이든 당헌이든 언제든지 바꿀수 있다. 당원이든 당대의원이든 의견을 모아 당 대회를 소집할 수 있고, 당명이든 당헌이든 개정안을 낼 수 있으며 당원들의 의견을 물어 바꾸면 된다. 대중적 진보정당의 당명은 대중적으로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정의당은 당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당명을 바꾸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당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노동자, 누구인지 내가 한번 만나고 싶다. 내가 아는 노동자는 어려울 때 함께 싸워주고 곁을 지켜 줬을 때, 동지가 되었고, 입당 권유도 하지 않았는데 정의당 당원이 되어 주었다.

    희한하게도 바람잘 날 없는 정의당이 단일지도 체계를 가지고 있다. 소위 정파별, 계파별 안배라는 명목으로 지분 나누고 아무 결정도 못하는 지도체계는 옛날 말이다. 당대표가 되고 싶으면 출마를 해서 당원들의 마음을 얻으면 된다. 그래도 정의당이라는 계파가 생기지 않겠냐고? 정의당의 절반은 생애 첫 당원이 정의당인 사람이다. 가지 각색의 다양한 생각과 사람이 모여있고 그래서 유지되는 당이 정의당이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당대표, 그까짓 게 뭐라고..

    나는 패권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사람들이 자신과 싸우고있는 패권주의를 닮아가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면 상대를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또 다른 패권을 부리는 것이다.

    진보정치. 우리는 그 동안 볼 것 다 보았다. 그 쓰라린 역사를 견디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진보의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어쩌면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 혁신의 키워드는 존중과 배려이다. 상대방도 옳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나보다 더 험한 세월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어디쯤엔가 있을 최대공약수를 찾아 서로 노력하는 것이다. 소수라면 다수를 존중하고 다수라면 소수를 배려하는, 어쩌면 세상사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가 그동안 우리가 겪은 고통속에서 얻는 뼈아픈 교훈은 아닐까?

    진보정치란 무엇일까? 진보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뿐인 지구에서 저마다 다른 자유로운 개인들이 세상을 공유하고 나누며,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존중하고, 다른 사람이 있어 나의 삶이 빛나기에 배려하는 세상말이다. 그런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지금 여기에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진보적인 삶이란 말인가?

    필자소개
    정의당 인천시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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