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헌법, 강요된 헌법인가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은 '개헌' 목표로 가는 길
        2015년 09월 22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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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본 참의원을 통과해 ‘전쟁 법안’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안보관련 법안이 국제적 관심을 받고 있다. 안보관련 법안은 현행 일본 헌법이 부정하고 있는 집단자위권 등을 행사하기 위한 법률적 근거로 야당과 시민사회는 물론 많은 법률가들도 위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자민당 등 일본의 보수파들이 안보법안 통과를 추진하는 궁극적 목표는 집단자위권과 군대 보유를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을 무력화하고 개정하는 것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최근 발행된 <일본 재무장의 새로운 단계>(임필수)에서 1945년 패전 이후 평화헌법이 제정되는 과정 및 최근 일본 사회운동에 대한 내용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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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사령부의 헌법 개정 구상

    1946년 2월 13일 헌법 개정을 다루기 위해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 대표회담이 열렸다. 최고사령부 대표로서 민정국장 휘트니와 소속 케이디스, 허시, 로웰, 그리고 일본 정부 대표로서 외상 요시다, 국무상 마츠모토, 종전연락중앙사무국 차장 시라스가 참여했다.

    일본 정부 측은 ‘마츠모토 안’을 제시했으나, 최고사령부는 이를 거부하고 미리 준비한 최고사령부 안을 제시했다. 휘트니는 최고사령부 안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최고사령부, 특히 맥아더 원수는 천황제 존치와 천황을 전범으로 내몰지 말 것을 강력하게 희망하지만, 극동위원회와 미국을 비롯하여 소련, 호주 여론은 천황의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헌법 초안에서 제시한 정도의 국체 변혁과 전쟁포기, 인권 존중의 원칙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천황제 존치는 물론, 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곤란해진다.”

    즉 미국의 헌법개정안이 천황제 존속, 천황 전범면책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휘트니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만약 이 헌법을 거부한다면 최고사령부는 직접 일본 국민에게 이 헌법초안에 들어 있는 원칙을 제시하여 국민의 선택을 요구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현 정부는 면목이 크게 실추될 것이다.”

    만약 두 가지 안을 두고 국민에게 선택하도록 한다면 대다수가 최고사령부 안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로서도 일본 정부 안이 먼저 공표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만약 정부 안이 발표되고 최고사령부가 수정을 요구하면 헌법이 연합국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황의 전범 소추와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는 극동위원회의 개입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기존 헌법은 무엇이었고, 마츠모토안은 무엇이었나?

    이토 히로부미와 대일본제국헌법

    메이지 헌법이라고도 불리는 대일본제국 헌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안 작성을 책임졌다. 그는 1841년 태어나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이토는 1882~1883년 1년 3개월 동안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입헌제도를 조사했고 특히 베를린에서 총 5개월 동안 독일 헌법학을 공부했다.

    프러시아 헌법은 1850년에 제정되었고 독일제국헌법(일명 비스마르크 헌법)은 1871년에 발포되었다. 독일형 입헌군주제는 ‘군주는 군림하고 또 통치한다’는 말로 표현된다. 입법권은 국왕과 의회가 공동으로 행사하며, 국왕은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갖는다. 국왕은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는 긴급칙령을 발령하는 권한을 지닌다.

    대일본제국 헌법 초안 심의는 1888년 6월부터 추밀원에서 시작되었다. 심의는 1889년 2월에 마무리되어 1889년 2월 11일 공포된다. 이 헌법은 일본 천황이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 대신에게 하사한 흠정헌법의 형태로 발포되었다. 흠정헌법이란 군주가 제정한 헌법으로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유보하고 일종의 ‘은혜’로서 국민의 권리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헌법은 왕이 베푸는 은혜라는 말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며, 이 헌법의 규정에 따라 이를 행한다.
    제5조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찬으로써 입법권을 행사한다.
    제6조 천황은 법률을 재가하며 그 공포 및 집행을 명한다.
    제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며 그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 해산을 명한다.
    제8조 천황은 공공의 긴급의 필요에 따라 제국의회 폐회의 경우 법률을 대신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제9조 천황은 필요한 명령을 발한다. 단 명령으로 법률을 변경할 수는 없다.
    제10조 천황은 행정각부의 관제 및 문무관의 봉급을 정하고 문무관을 임명한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2조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 및 상비병액을 정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제31조 본 장에 실린 (신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조규는 전시, 또는 국가 위급의 때에 천황 대권의 시행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제55조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며, 그 책임을 진다.
    제73조 헌법 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칙명으로 의안을 제국의회에 부쳐야 한다.

    당시 추밀원에서 헌법초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쟁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4조에서 “이 헌법의 규정에 따라”를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천황의 통치권은 원천적으로 고유한 권한인데 마치 이 헌법에 의해 비로소 생긴 것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토는 이 문구가 없으면 입헌군주제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그냥 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두 번째는 5조의 초안이 “제국의회의 승인을 거쳐”라고 나왔기 때문에 발생했다. ‘승인’이 위에서 아래에 인가한다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마치 의회가 천황보다 상위 기관이라는 인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논란 끝에 대등한 뉘앙스가 있는 “제국의회의 협찬으로써”라고 문구가 결정되었다.

    메이지1

    메이지헌법반포약도(위키피디아)

    이 논쟁을 살펴보면 심의에 참가한 자들 대부분이 천황 대권에 조금이나마 손상을 가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반면, 민주주의라는 관점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민’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인민은 여전히 ‘왕의 백성’이었다. 나아가 이토는 헌법 공포와 동시에 출간된 해설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는 순간부터 신성한 왕권이 성립되었다. 천황은 하늘의 후손이며 신성한 존재다. 사실 천황이 법을 존중하는 것이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법이 천황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은 없다. 천황의 성신에 대해 절대 불경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며, 그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주제는 물론 어떤 논의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천황의 ‘신성불가침성’과 ‘천황대권’이라는 메이지 헌법의 기본 정신은 1945년 일본의 항복 시기까지 계속 강화된다. 천황 우상화는 전장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절정에 도달했다.

    1941년 도죠 히데키가 발표한 ‘전진훈’(전장의 가르침)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전장이란 천황의 명을 받은 황군이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이김으로써 적이 경외감에 가득 차 폐하를 우러러 볼 정도로 황도를 밝히는 곳이다.” 전진훈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고 명시함으로써 수많은 일본 병사를 자살공격으로 이끌었다. 나아가 메이지 헌법은 일본 패전 후 천황에게 책임이 없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3조에 따라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할 수 없고, 55조에 따라 천황을 보필하는 대신이 그 책임을 진다는 논리였다.

    마츠모토 헌법개정안

    이처럼 메이지 헌법은 입헌군주제의 형식을 취하고자 했으나, 현대적인 자유주의, 민주주의 이념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마츠모토 안’은 천황대권을 얼마나 바꾸고자 했나?

    일본 정부가 헌법 개정을 검토한 계기는 1945년 10월 11일 맥아더 최고사령관과 시데하라 수상의 회견이었다. 이 당시 맥아더는 미국이 헌법 개정을 강요한 것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가 주도해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1945년 10월 25일 외무대신 요시다가 강력히 추천한 마츠모토를 위원장으로 세운 ‘헌법문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 위원회 명칭으로 개정이나 개헌 대신에 ‘조사’라는 표현을 선택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처럼 헌법 개정이 정말 필요한지 조사하겠다, 즉 개헌이 꼭 필요하다고 전제하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마츠모토는 1946년 2월 중순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법률 제도란 식물과 같은 것이다. 한 나라의 식물을 다른 나라에 이식했을 때 성질이 바뀌거나 말라죽기도 한다. 구미의 장미를 일본에 이식하면 그 향기는 사라지게 된다.” 즉 서구의 헌법은 일본 토양에 맞지 않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3월에 이르기까지 마츠모토 위원회 안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12개의 헌법 개정안이 제안되었다. 공산당, 자유당, 진보당, 사회당 등 정당과 ‘대일본변호사회’, ‘헌법연구회’, ‘헌법조사회’ 등 단체, 다카노 이와사부로 등 개인이 개헌 권고안을 제출했다. 이 중에서 천황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한 안은 공산당과 다카노 안이었다. 즉 마츠모토 위원회는 여러 정당과 단체에서 제국헌법을 갈아엎자는 제안을 쏟아내고 있는 시점에도 이러한 제안을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 고유의 토양’을 운운하는 보수적 태도로 일관했다.

    1946년 2월 13일 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 대표회담에서 일본 측이 제시한 마츠모토 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 천황
    1.천황은 지존으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2.
    천황은 중의원 해산을 명할 수 있다.
    3.
    천황은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또는 행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명령을 발할 수 있다.
    4.
    천황은 군을 통수한다.

    제2 신민의 권리와 의무
    9.
    일본 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것에 따라 노역에 따를 의무를 지닌다.
    10.
    천황은 제국의회가 의결한 헌법 개정을 재가하여 그 사실의 공포 및 집행을 명한다.

    즉 ‘천황은 신성하며 침해해서 안 된다’는 조항이 ‘천황은 지존하며 침해해서 안 된다’로 바뀐 것뿐이었다. 여기서 ‘지존’은 임금의 높임말이다. 미군정이 강력히 요구했던 천황의 신성 부정을 표현했을 뿐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메이지 헌법의 기본 원칙은 완전히 유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인민은 주권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천황의 신하, 즉 ‘신민’이었다.

    일본국 헌법은 어떻게 수립되었나

    1946년 2월 4일 최고사령부 민정국장 휘트니는 참모를 모아 2월 12일까지 새 헌법 초안을 만들라는 맥아더의 명령을 전달했다. 곧장 장교 16명, 민간인 8명으로 구성된 24명의 워킹그룹이 활동에 돌입했다. 맥아더는 휘트니에게 세 가지 원칙만을 제시했다.

    1. 천황은 국가의 수장이다. 왕위는 세습된다. 천황의 의무와 권력은 헌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행사될 것이며 거기에 규정된 인민의 기본 의지에 조응해야 한다.

    2. 국가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폐지된다. 분쟁해결, 심지어는 안전 보장을 위해서도 전쟁은 일본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한다. 일본은 스스로의 방위와 보호를 위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좀 더 숭고한 이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육군, 해군, 공군의 존재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형태의 교전권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3. 일본의 봉건제는 중단될 것이다. 황족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지금 현재 귀족인 자를 제외하면 앞으로는 귀족이 될 수 없다. 지금부터 귀족은 국민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누릴 수 없다. 황실 예산에 관해서는 영국식 제도를 채용한다.

    메이지 헌법에 기초한 마츠모토 안과는 정반대로 민정국은 메이지 헌법을 세밀히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메이지 헌법이란 단지 나쁜 헌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최고사령부의 헌법 초안은 인민이 주권자이고 천황의 정치적 권한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원칙에 입각했다.

    1946년 2월 13일 대표회담 후 시데하라 총리나 마츠모토 위원장은 최고사령부의 안을 수정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원칙과 기본 형태는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최고사령부의 강경한 태도를 접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일본 내각은 3월 4일 ‘일본 정부 최초안’으로 알려진 개헌안을 공식적으로 최고사령부에 전달했고, 양자는 30시간 가까이 검토한 끝에 일본어와 영어로 합의안을 마련했다. 3월 6일 새 헌법안(헌법개정초안요강)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때 천황의 칙어도 발표되었다.

    “전쟁을 포기하며 (…) 인격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는 주의에 따라 헌법에 근본적 개정을 가하고 국가재건의 바탕을 다질 것을 바란다. 정부 당국은 짐의 뜻을 헤아려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라.”

    천황이 칙어를 통해 신민에게 새 헌법안을 지지하라고 명령을 내린 셈이었다. 그 후 헌법 개정은 철저히 메이지 헌법이 규정한 절차를 따랐다. 메이지 헌법은 “헌법 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칙명으로 의안을 제국의회에 부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새 헌법은 여전히 흠정헌법의 형식을 따랐다.

    1946년 4월 10일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1946년 6월 20일 천황은 임시국회 개회사를 행한 후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시데하라 연합 내각의 중추를 이루었던 양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진보당은 이미 3월 시점부터 헌법 개정안을 지지했다. 유일하게 공산당만이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은 반민주적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

    1947년 5월 3일 황궁 앞 광장에서 헌법 발효 기념행사가 열렸다. 천황 히로히토는 행사 도중에 장엄하게 등장했다. 요시다 총리는 이때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새 헌법은 천황이 하사한 선물임을 다시 한 번 암시하는 행위였다.

    일본국 헌법

    새 헌법은 명칭부터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국 헌법’으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제1장 천황에서 ‘상징 천황제’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2장에 ‘전쟁의 포기’가 명시되었고, 3장에서 ‘신민의 권리와 의무’가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먼저 1장을 보자.

    제1장 천황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제2조 황위는 세습되는 것으로써 국회가 의결한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이것을 계승한다.
    제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에는 내각의 조건과 승인이 필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
    제4조 천황은 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제6조 천황은 국회의 지명에 기초하여 내각 총리대신을 임명한다. 천황은 내각의 지명에 기초하여 최고 재판소의 장을 임명한다.

    의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검토될 때 초미의 관심사는 ‘국체’(國體)가 변경된 것인지, 즉 주권의 담당자가 바뀐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내각과 집권당은 주권의 담당자가 변경된다는 사실, 즉 인민주권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물러난 마츠모토를 대신해 헌법 문제의 책임자가 된 가나모리 도쿠지로 국무상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물은 흐르되 강은 머문다.” 또한 중의원 헌법개정소위원회를 이끈 자유당의 이시다 히토시도 이렇게 말했다. “제1장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국민 지고의 총의에 기초하여 국민을 통합하는 군주로서 지위를 확보하심을 명기한 것이다.”

    하지만 의회에서는 내각과 집권당을 조롱하는 농담이 유행했다. “가나모리의 검법(일본어 발음이 헌법과 같다)은 무엇인가? 가나모리는 이도류(二刀流)이라네. 국체를 바꾸면서 안 바꾼다고 하네.”

    헌법 2장 전쟁 포기

    한편 또 하나의 초미의 쟁점은 2장 전쟁의 포기였다.

    제2장 전쟁의 포기

    제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을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헌법 검토 과정에서 나온 질문은 단순하다. “9조는 자위를 위한 무장마저도 부정하는 것인가.” 이에 관해 1946년 6월 25일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이렇게 답했다.

    “전쟁 포기에 관한 본안의 규정은 직접적으로 자위권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2장에서 일체의 군비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 자위권 발동으로서의 전쟁도 교전권도 포기한 것입니다. 과거의 전쟁이 대부분 자위라는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만주사변, 대동아전쟁 등. 그러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교전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이시다 위원장 역시 자위를 위한 무장도 포기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시다는 헌법이 공포된 직후부터 바로 입장을 바꾼다.)

    “침략전쟁을 헌법에 법제화하는 것이 전례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 헌법에 전면적으로 군비를 철거하고 모든 전쟁을 부인하는 규정을 한 헌법은 아마도 세계의 효시일 것입니다. 근대과학이 원자폭탄을 만든 결과 대국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인류의 참화는 자명한 것입니다. 과거의 참화에 대하여 전쟁혐오를 통감할 뿐만 아니라 세계문명의 파괴로부터 구하려는 이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방위와 안전보장은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이에 대해 요시다 총리는 ‘아직 논할 시기가 아니다’, ‘독립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헌법 9조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면서 일본의 안전보장 문제는 유엔에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1946년 헌법개정안이 의회에서 논의되던 시점에 일본 정부는 이처럼 새 헌법이 자위를 위한 무장도 포기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헌법개정 직후부터 일본이 자위권을 명분으로 재군사화에 착수하자 헌법 원리와의 충돌이라는 문제가 곧바로 발생했다. 이것이 곧 ‘헌법해석 변경’ 또는 ‘해석 개헌’의 역사를 낳았다.

    아베

    방송화면

    일본국 헌법, 강요된 헌법인가

    일본국 헌법 개정 흐름은 1950년대와 1980년대에 활발해진 후, 1990년대 이후 세 번째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헌법 개정 흐름이 등장할 때마다 그 ‘강요론’이 유력한 근거로 활용된다. 즉 일본 헌법이 자주적으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점령군이 강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연 정당한가?

    첫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국 헌법이 연합군 점령 중에 총사령부의 주도로 제정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총사령부가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초까지 헌법 개정을 일본 정부에 위임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천황대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주권, 인권보장, 평화주의라는 원리에 따라 헌법을 개정하는 작업을 도리어 방해했다. 당시 일본 정부의 헌법문제조사위원회를 비롯한 보수파는 민간에서 제안한 다양한 헌법개정안도 완전히 무시했다. 따라서 주도권이 연합군 최고사령부로 다시 돌아간 것에는 분명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

    둘째, 일본 내에서 자유민권사상의 역사적 흐름이 존재했다. 최고사령부 케이데스는 최고사령부의 헌법안이 홀로 작성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인들이 제시한 자료가 가장 유용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민정국이 ‘헌법연구회’ 안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밀로 로웰 중령이 민정국 휘트니 장군에게 보고한 비밀각서에서도 확인된다.

    헌법연구회 안은 1945년 12월 18일에 발표된 것으로 민간이 제출한 초안 중 가장 빠른 시기에 나왔다. 최고사령부는 1945년 12월 31일자로 초안을 번역했다. 그것은 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의 논리를 계승하며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서구 전통을 참조했다.

    로웰의 비밀각서는 헌법연구회 안이 빼어난 자유주의적 조항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구체적으로 ‘인민주권’, ‘출생, 지위, 성별, 인종, 국적에 의한 차별금지’, ‘귀족제 폐지’, ‘노동자 권익의 광범위한 보장’을 그 예로 들었다. 헌법연구회안은 천황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고 천황의 기능을 ‘인민의 대표로서 국가의례를 주관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더 호의를 느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내에 자유민권사상이 존재했고, 일본 패전이라는 조건에서 그러한 사상이 부상했기 때문에 최고사령부 안이 환영 받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일본인은 새로운 헌법 원리를 환영했다. 1946년 5월 26일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쟁포기 조항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필요하다’가 69.8%, 필요하지 않다가 28.4%였다. 이 여론 조사는 헌법 초안이 검토된 시점에 이뤄진 유일한 전국 설문조사였다.

    일본인이 원하지 않고, 일본인이 생각하지도 않은 헌법 안을 최고사령부가 일방적으로 강요했다는 ‘강요론’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

    필자소개
    임필수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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