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리만 꼬뮨과 대학 이후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③
        2015년 09월 18일 03: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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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좌파운동의 회고-2 ‘급진화에서 혁명으로’

    제 3 장 딜리만(Dilliman)꼬뮨과「붉은 대학

    「1/4분기의 폭풍」 이후에도 학생 활동가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여타 계층 사람들과의 연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선동하거나 빈민들을 조직하기 위해 빈민가로 들어갔다. 1971년 1월말에는 마닐라 수도권 대학생 수백 명이 모여 석유 대기업에 의한 석유가격인상에 항의했다. 필리핀 대학 학생들은 대학의 자유화를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필리핀 대학의 심볼인 타원형 광장과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체의 남성을 묘사한 「오블레이션」〔헌신이라는 의미〕상이 있는 대학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했다.

    2월 1일 필리핀 대학의 수학교수 이노센트 캄포스가 차를 탄 채 바리케이드에 돌진하려 했으나 학생들에 저지당했다. 그러자 캄포스 교수는 차에서 내려 방탄조끼와 헬멧을 쓰고 라이플총을 난사했다. 학생 1명이 그 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어 3일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 학생은 급진파 학생운동그룹인 SDK(민청협)의 멤버였다.

    일부 학생들은 캄포스가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주장했으나, 일설에는 그가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고 계획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캠퍼스에 난입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경찰이 캄포스를 연행해가자 격분한 학생들이 캄포스의 자동차를 불태웠다. 당시의 시위를 보도하고 있던 라디오방송국 「라디오 패트롤」은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했다.

    오후가 되자 경찰은 군의 보호를 받으며 대학에 난입해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학생들을 연행하려 했으나 학생들은 돌이나 화염병, 필 박스 등으로 저항했다. 경찰은 캠퍼스에서 철수했지만 밤이 될 무렵 군 몇 개 소대인가가 정찰을 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고, 밤이 되자 학생들을 쫓아내기 위해 기숙사에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렇게 해서 딜리만 꼬뮨(딜리만(Diliman)캠퍼스 ; 케손시티에 있는 필리핀대학교(UP) 최대의 캠퍼스)이 탄생했다. 〔1871년의 빠리꼬뮨을 염두에 둔 것으로 투쟁 참가자들은 빠리꼬뮨에서처럼 「꼬뮤나르」로 불리웠다〕

    대학교의 모든 출입구에 쳐진 바리케이드를 사수하기 위해 마닐라 전역에서 활동가들이 집결했다. 학생과 교직원, 학생 클럽, 캠퍼스 구내 거주자 등이 바리케이드의 보강에 나섰다. 군과 경찰의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 수천 개의 화염병과 필 박스, 기타 여러 가지 사제 무기가 만들어졌다. 학문의 자유라는 영광스런 필리핀 대학의 전통을 군과 경찰의 폭력적인 유린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

    경찰과 군대가 대학을 급습한 밤, 매스컴 연구소의 학생들은 대학 라디오방송국을 탈취하여 「딜리만 민주꼬뮨 자유방송」을 시작했다. 자유방송은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24시간 쉬지 않고 방송했다. 또 제국주의 등 시사문제에 대한 장시간의 토론을 방송했다. 나는 호르헤 시발 등 학생활동가들의 얘기에 열중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꼬뮤나르」는 대학 건물을 점거해 그것들에 혁명과 연관된 이름을 붙였다. 남학생 기숙사에는 「단테 사령관〔필리핀 공산당 신인민군(NPA)의 총사령관〕홀」, 「아마도 게레로〔필리핀 공산당 CPP의 의장인 호세 마리아 시손의 별명〕회관」과 같은 혁명가의 이름이 붙여졌다. 몇 명인가의 꼬뮤나르들은 「교양학부 옥상평의회」라는 이름으로 교양학부 건물(지금은 팔마 홀로 불린다) 옥상에 텐트를 쳤다. 그곳에서 필리핀 대학의 광대한 부지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려 했던 것이다.

    구내에 있는 네 군데의 남학생 기숙사와 여학생 기숙사는 활발한 저항 거점이 되었다. 필리핀 대학 주위의 발라라와 쿠르스나 리가스 인근지역의 단체들은 바리케이드를 방비하기 위한 지원 인력을 보내주었다. 꼬뮤나르와 군대 사이의 작은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지원을 받아 꼬뮤나르들은 9일간에 걸쳐 그들의 진지를 사수했다.

    2월 9일, 꼬뮤나르는 마르코스 정부와 대학당국으로부터 캠퍼스의 자유를 더 이상 침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바리케이드를 해제했다. 경찰과 군대도 철수했다. 대학이 정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 받은 것이다.

    2월 13일, 에릭슨 바쿠리나오가 이끄는 필리핀 학생평의회는 “파시스트 국가와 그 캠퍼스 내의 앞잡이들과의 대결에서 딜리만 꼬뮨을 영웅적으로 지켜낸 혁명적 용기”를 칭송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급진적 학생운동에 의해 전개된 성공적인 저항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딜리만 꼬뮨에 대한 이러한 내용들은 주로 라디오나 신문기사를 통해 얻은 것으로, 나의 꼬뮨 참가 체험은 사실상 형과 지역의 노조지도자들과 함께 필리핀 대학에 가서 두 통 분량의 생선을 꼬뮤나르들에게 전달한 것 정도이다. 그조차도 대학 한 쪽에서 꼬뮤나르의 군사행동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학 입구의 바리케이드에 그 물품들을 전달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딜리만 코문

    딜리만 코뮨 당시 필리핀 대학의 모습(사진=필리핀대학 홈페이지)

    「붉은 대학」전략

    돌이켜보면 딜리만 꼬뮨은 단순히 경찰과 군대의 침탈에 대한 저항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꼬뮤나르들이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 투쟁은 68년에서 70년에 걸친 격동기에 일어난 세계 학생반란과 맥락이 닿아 있었다.

    68년 5월 13일,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이 소르본느 대학을 점거했다. 점거는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68년 6월에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1만 명 이상의 유고슬라비아의 학생들이 베오그라드 대학을 일주일 이상 점거했다. 베오그라드의 학생들은 이후 학생운동의 급진화 전략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 “노동자에게 봉사하는 대학, 붉은 대학을 만들자!”

    68년부터 70년까지 전 세계 학생 반란의 절정기에 급진적 학생운동 내에는 대립하는 두 가지 경향이 존재했다. 대학을 노동자 농민들에 의해 행해지는 「진짜」 투쟁에 참가할 수 있는 자원을 교육하고 공급하는 장으로 보는 극좌파의 조류가 그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대학을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센터로 자리매김하고, 그것을 통해 학교 밖의 대중투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는 조류였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유고 베오그라드의 「붉은 대학」의 주창자들이었다. 이 조류를 대표한 또 다른 그룹은 미국 청년사회주의 동맹(YSA)이나 프랑스의 혁명적 공산주의청년(JCR) 등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YSA는 「반전 대학」을 주장했다. 즉 대학을 접수하고 이를 조직화센터로 만들어 외부에 개방하여 운동을 강화하는데 활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켄트 주립대학에서 일어난 4명의 학생 학살사건 〔1970년 5월 4일 미국의 오하이오 주립 켄트대학에서 주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4명의 학생이 학살된 사건으로, 전국 대학에서 항의시위가 촉발됐다〕 후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본교는 동남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반대하는 조직화센터로 대학을 재편하기 위해 파업을 결행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필리핀에서 전자의 조류를 대표하는 것은 애국청년회(KM)였다. KM은 71년에 학생 멤버들에게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대중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대학을 떠날 것을 호소했다. 한편 SDK(민청협)는 학생들 가운데서 기반형성을 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국이나 유럽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추진한 「붉은 대학」 전략을 추구하겠다는 인식은 없었다.

    「붉은 대학」 전략은 「스튜던트 파워」의 외침 속에서 학생운동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시기에 등장했다. 스튜던트 파워는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 민중의 급진화나 학생운동의 고양에 의해 퍼져나갔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급격한 고등교육 보급의 흐름 속에서 생긴 것이었다.

    고등교육이 보급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자녀들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자유로운 학습이나 훈련의 장,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대학이 체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현실과의 괴리와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튜던트 파워는 노동자계급이나 민중들의 투쟁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완벽한 전략이 될 수 없었다. 학생들은 계급으로서 생산에 특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과도적 계층」인 것이다. 따라서 어느 계급으로부터 왔는가, 또 장차 어느 계급에 속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으로 학생의 사회적 역할을 특정지울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사회 안에서 노동자들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또 많은 정보나 지식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

    「붉은 대학」이라는 전략에 적용된 스튜던트 파워의 사고방식은, 학생의 사회적인 힘을 그 사회에 있어 특수한 역할과 위상에 맞춰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대학을 「로봇 생산 공장」으로부터 반자본주의 활동의 조직화센터로, 또 혁명교육의 발전소로 자리매김하여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청년들을 조직하는 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추구했다.

    이 전략은 68년 파리에서는 대학의 설비를 지속적인 투쟁을 위해 활용하는 것, 예를 들면 미술관계의 설비를 시위 포스터나 선전물의 작성에, 의료관계 설비를 「바리케이드의 밤」〔5월 10일에 파리에서 일어난 학생들과 경찰과의 대규모 충돌 사건〕의 부상자 구호에 활용하는 것 등을 의미했다.

    천지를 진동시킨 딜리만 꼬뮨의 경험을 별도로 하더라도, 70년대 필리핀의 경험에서 「붉은 대학」과 가장 근접한 것은 필리핀 상과대학(현재는 필리핀 폴리텍 대학)에서의 활동이었다. 네메시오 프루덴테 학장의 지휘 아래 이 대학은 마닐라 학원가에서 모든 반란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제 4 장 운동의 세례

    딜리만 꼬뮨이 있은지 얼마 후, 나는 말라본의 학교에서 마닐라의 부스틸로스 광장까지의 시위행진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 4학년이었고, 제복 차림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그 날 오전,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때 활동가들의 일단이 우리 학교를 향해 행진해 왔다. 스피커를 통해 그들은 「데모에 동참하라, 데모에 동참하라!」고 외쳤다. 나는 그 외침이 나를 부르는 소리인 것으로 느껴졌다. 나와 또 몇 명의 클래스메이트가 교문을 나섰다. 밖에서 더 합류할 사람을 위해 잠시 기다렸으나 수위가 이내 교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행진했다. 말라본을 나선 시위대는 보니파시오 기념비를 지나 아베니다와 렉토 거리를 거쳐 모레이타 거리의 대학가를 지나 부스틸로스 교회 앞의 작은 공원까지 행진했다. 이 시위행진은 당시로서는 아주 평화적인 것이었다. 대학 지역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다른 학교나 지역에서 온 그룹들과 계속 합류했다.

    나는 행진 중에 형을 만났다. 형은 시위대 속에 있던 유명한 학생 리더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내가 「라디오 패트롤」에서 항상 그 이름을 듣고 있던 활동가들─필리핀 대학 학생평의회의 에릭슨 바쿠리나오, 같은 필리핀 대학의 갈리 올리버, 전국학생연맹의 포르티아 일라간,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명의 리더들이 있었다.

    부스틸로스 교회 근처에서 나는 죱슨이라는 슈퍼마켓의 벽에 붉고 굵은 글씨로 쓰여진 「에드가 죱슨 파시스트 중놈!」이란 낙서를 보았다. 형에게 무슨 의미냐고 묻자, 파시스트 중놈이란 것은 원래 스페인에서 팔랑헤당처럼 파시즘을 지지한 카톨릭교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필리핀에서는 에드가 죱슨이 다니는 아테네오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예수회라고 설명해 주었다.

    낙서는 조금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무렵 「중도적」인 활동가였던 에드가 죱슨은 얼마 후 공산당의 지하조직 리더가 되었다. 그는 1982년 12월 20일,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군대에 의해 살해되어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계엄령 반대투쟁의 심볼이 되었다.

    이 날의 집회는 활동가 기준으로 본다면 온건한 것이었지만, 내게는 수천 명의 민중들이 사회의 혁명적 개혁을 외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말라본의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받은 것이었는데, 그도 나처럼 끝까지 집회에 참석했다. 나는 다소 흥분하여 멘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머리가 핑 돌 때까지 빨아댔다. 그 날은 내게 있어 말하자면 성인식, 즉 청소년 시대를 넘어 한 사람의 급진 활동가가 되는 통과의례를 치룬 날이었다.

    대학생활

    얼마 후 나는 고교 생활과 청소년 시대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에 들어갔다. 내 주변에는 정치적으로도 또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것은 가장 급진적 성향의 대학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필리핀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필리핀 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필리핀 대학의 마닐라 캠퍼스와 바기오 캠퍼스에서 입학허가가 나왔다. 바기오는 멀기 때문에 마닐라를 선택했다. 나는 필리핀대학교 71학번이 되었다.

    필리핀 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학생운동의 온상이었다. 클래스메이트는 물론 교수들 중에도 활동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역사 교수는 수업의 교과서로 아마도 게레로〔CPP 의장 호세 마리아 시손의 별명〕의 명저 『필리핀 사회와 혁명』을 채택했다. 수업은 마치 교실 내에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토론 집회」 같았다. 이 교수는 우리가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어도 질타하기는커녕 오히려 집회 참가를 독려했다.

    그녀는 또 지역 사회 조사의 일환으로 비타스 주택가〔마닐라의 톤도 지구에 있는 빈민가〕 주민들에게 직접 그 실태를 들어보게 하는 실습을 시켰다. 실습의 마지막 날 오후에는 산티아고 요새〔마닐라 중심부에 있는 요새 유적〕의 잔디에 둘러앉아 조사결과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때때로 캠퍼스에서 긴급 토론 집회가 열렸다. 레나토 콘스탄티노의 팜플렛이나 『필리핀 사회와 혁명』을 읽으면서 상급생들이 토론하는 것을 우리는 「ㅁ」자형으로 둘러앉아 들었다. 집회가 있기 전 날에는 활동가들이 교실을 돌면서 교수들에게 수업 전 몇 분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런 대학의 교과 외 활동의 모든 것을 즐겼지만, 지역 활동가 그룹들과 있을 때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아마도 멤버 대부분이 옛날부터 아는 얼굴들이거나 어릴 때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KM 나보타스 지부

    나는 당시 이미 KM(애국청년회) 나보타스 지부의 멤버가 되어 있었다. 나는 KM의 집회나 탕고스 강가에 있는 사무실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참가했다. 지부는 시내에 살고 있는 활동가가 자주적으로 결성한 것이었지만, KM 중앙의 리더들을 초청해 제반 문제들에 대해 함께 토론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말라본의 고교생 조직화에 종사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그레고리오 산시앙코 고교에 다니고 있던 누이동생으로부터 학생회와 학교 당국 간에 몇 가지 요구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학생회장인 레이 네폼세노를 만나 자기소개를 하고 예전에 호세 리잘 고교에서 파업투쟁을 지도한 적이 있고, 학생들의 수업거부를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레이는 나의 지원을 수락했다.

    파업 당일 새벽, 종이점토로 만든 검은 관에 「학생 데모크라시의 죽음」이라고 쓴 띠를 붙여 산시앙코 고등학교 교문에 놓았다. 우리는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는 피켓라인을 펴지 않았으나 보이콧은 성공했다. 아마도 관짝을 타 넘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은 교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서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보이콧에 호의적이었고, 수백여 명이 루나 장군로(路)에서부터 파스쿠알 총독가(街)에 있는 내 모교 앞까지 행진에 참가했다.

    이 성공에 고무된 레이와 나는 곧 말라본과 나보타스의 고등학교 순례를 시작했다. 학생회 임원들을 만나 학생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을 설득했다. 우리는 교내에서 그들과 만났는데, 얼마쯤 지나자 수위가 우리의 학교 출입을 막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학생 리더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집으로 찾아가야 했는데, 그들의 부모들은 화를 내면서 우리를 “공산주의자”, “트러블 메이커”라고 힐난했다.

    어느 날 말라본 메모리얼 고등학교 교내에서 우리를 쫓아내려는 수위가 내 가방을 잡아채 고는 안에 있던 모택동어록을 꺼내 교장에게 건넸다. 교장은 우리에게 공산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설교하며 모택동어록 대신 성경을 읽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두 번 다시 교내에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헤어지면서 자기 아들도 나처럼 말을 안 듣는다며 한숨을 쉬고는 모택동어록을 돌려주었다.

    1971년 여름, 나는 UKP(진보운동연합) 대오와 함께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했다. KM(애국청년회) 나보타스 지부의 상급조직은 당연히 케손시에 있는 KM 중앙본부였다. 그러나 우리는 UKP를 우리의 정치센터로 간주하고 있었다.

    UKP는 칼루칸 시, 말라본 시, 나보타스 시 등 카마나 지역 일대 급진조직의 연합체로, 본부는 말라본 시 통수야에 있었다. UKP 본부는 카마나 지역에 있는 수많은 급진조직의 대표들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지원이나 조언을 해주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는 UKP 중에 공산당 조직이 있었고, 이것이 카마나 지역의 급진적 운동을 지도하는 지하조직이었다.

    그 해의 메이데이에 우리 대오는 아침 일찍 지역을 출발, 폭염 속에 수 km를 행진하여 점심 무렵 마닐라의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도착한 다른 UKP 대오들과 합류했다.

    미국 담배회사의 노동자로 베테랑 활동가인 피터 무툭이 국기 게양탑 근처의 연단에서 연설을 하고 있을 즈음,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피터가 연단에서 뛰어 내림과 동시에 그가 있던 곳에 시커먼 물체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로, 그들 역시 연단에서 뛰어내리면서 연단 아래 있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경찰봉을 휘둘렀다. 뒷걸음치면서 보니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있었고, 연단에는 필박스가 소나기처럼 터지고 있었다.

    나는 시영 골프장을 향해 뛰었다. 그린을 가로질러가려 했을 때, 한 대의 헬기가 상공에 멈춰선 채 지상을 향해 발포했다. 총탄이 지면에 닿자 잔디와 흙이 튀어 올랐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새 군중들과 함께 퀴아포 다리 옆에까지 와 있었다. 그곳에서 동지 「빙」이 군중들을 향해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빙은 칼루칸 시의 활동적인 동지로 필리핀 대학 학생이었다. 우리는 필리핀 대학에서의 예비역 훈련 반대 투쟁에 함께 참가했다.

    빙과 나는 간신히 몇 명의 활동가를 끌어 모았다. 우리가 다시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자 경찰의 비상선은 해제되어 있었다. 거리 한복판에 세워둔 「리디오 패트롤」의 지프차 옆에서 리포터가 소요사건에 대해 리포트하고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 경찰이 여러 명의 활동가를 군 트럭에 태우고 있었고 그 옆에 필리핀 종합 병원의 구급차가 서 있었다.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된 몇몇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지만 다친 사람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늦게 라디오 방송이 칼루칸 시의 롯시니 니트웨어 노조의 여성조합원 1명이 집회에서 수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부의 폭력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71년 8월 21일, 야당인 자유당의 상원의원 선거와 시장 선거의 후보자가 정치 집회를 열고 있을 때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두 발의 수류탄이 무대로 날라 와 9명이 사망하고 97명이 부상당했다. 이 폭탄 사건 후 마르코스는 인신보호령의 효력을 중지시켜 네메시오 프루덴테 박사, 갈리 올리버, 루즈비민도 데이빗, 로저 아리엔다 등 13명의 지도자를 체포했다. 이들은 후에 전원 석방되었으나, 어떤 혐의로 체포된 것인지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전임활동가가 되다

    활동가에 대한 엄중한 단속과 탄압이 다시 시작된 것은 1학기 방학 무렵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전임활동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수개월여 동안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양친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전에부터 우리 집 형편으로는 한 명밖에 대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말하곤 했고, 형은 이미 4학년이기 때문에 그 한 명은 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비를 절약하기 위해 원한다면 직업훈련코스로 바꿔도 좋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새로운 탄압이 시작된 날 저녁, 나는 다소 들뜬 기분으로 KM 나보타스 지부 사무소로 가서 동지들에게 전임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전임활동가가 되는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운동을 위한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

    학습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전공인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선전이나 지하활동을 위한 집필 임무 속에서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UKP(진보운동연합)를 통해 나에게는 카마나 지역의 「청년학생공작」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말라본 시와 나보타스 시의 고등학생을 조직화하는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 밖의 시간을 KM 나보타스 지부 사무실에서 정세나 현상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토론을 조직하고 참가하는 것에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1971년의 마지막 수개월은 나에게 있어 상당히 바쁜 나날들이었다. 집회나 시위, 토론집회, 회의, 그리고 마닐라와 리잘 지역 급진단체의 연합체인 MDP(민주적 필리핀을 위한 운동) 활동과 UKP가 조직한 카마나 지역 차원의 활동에 참가했다. UKP는 카마나 지역의 공장노동자조직화에 착수하고 있었다. 「팍맙」(전국노동자운동)과 지프니 운전사들의 조직인 「빠상 마스다」가 UKP 산하로 들어왔다.

    카마나 지역의 몇 군데 공장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나는 그 중 몇 군데를 방문해 토론집회에 참가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말라본의 LK · 가린 셔츠 공장이다. 내가 보고 있는 가운데 파업 대오에 대한 경찰의 침탈이 벌어졌고, 고(故) 포포이 동지를 포함한 여러 명의 활동가들이 말라본 형무소로 끌려 간 것이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두 번째 여름

    5월 20일에 미 대사관 근처에서 열린 집회는 1972년을 잊을 수 없는 해로 만들었다. 반제국주의, 반베트남 전쟁을 내걸고 개최된 이 집회에는 수도 마닐라와 리잘 만이 아니라 중부 루손섬의 급진세력들도 결합한다고 알려졌다. 이것은 마닐라 수도권의 학생 · 노동자 등 활동가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중부 루손은 신인민군에 의한 게릴라 조직화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게릴라 동상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필리핀 게릴라를 기념하는 동상

    중부 루손은 불라칸 주, 팜팡가 주, 타를락 주, 바탕 주, 잠발레스 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는 구 필리핀 공산당(PKP)이 「훅발라합」〔일본 점령 시대에 결성된 항일인민군 조직. 독립 후인 1950년대에 HMB(인민해방군)로 변천〕이라고 불린 게릴라 단체를 구축한 장소이기도 하다. 중부 루손에서 PKP나 HMB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CPP를 만든 「아마도 게레로」〔CPP 의장 호세 마리아 시손의 별명〕의 새로운 지하조직이 성장하여 루손 섬 중앙평야에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인민군에 관한 기쁜 뉴스가 급진파들 사이에 떠돌았다.

    5월 20일은 토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500명의 UKP 대오는 나보타스에서 행진을 시작해 말라본을 지나 칼루칸의 보니파시오 기념비까지 왔다. 거기에서 불라칸 주 미카와얀 시로부터 맥아더 하이웨이를 통해 행진해 온 대오와 합류했다. 수도 마닐라의 주력 대오는 3개소─톤도 지구의 푸리틸, 산 안드레스 원형홀, 케손시의 웰컴 원형홀─에 집결, 리잘 공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우리 UKP 대오가 리잘 공원의 물소상에 도착하자 루손 섬 북부와 중부에서 온 대오가 칼라우 거리에 줄지어 있는 대절버스와 지프니로 이미 도착해 있었다. 소수 민족(아에타스 족) 몇 명인가가 그 가운데 섞여 있었고, 집회주최자가 준비해 둔 사수대가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시위행진 중 인기가 높았던 것은 마오의 유명한 말들을 타갈로그어로 바꾸어 개사한 『전세계의 시민들』이란 노래였다. 전세계 인민들에게 단결하여 미제 침략자와 그 앞잡이들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노래는 리잘 광장에 울려 퍼졌고 집결한 군중이 경찰기동대와 대치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경찰기동대는 시위대가 미 대사관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교섭 대표단이 대사관 앞에까지의 행진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교섭을 하는 동안 짧은 평온이 찾아왔다.

    우리들은 교섭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 후 주최 측에서 우리에게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아에타스족이나 종교 그룹의 앞 쪽 최전선으로 이동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우리는 그것을 「혼성 그룹」이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선봉대」의 암호였다. 밀집해 있는 기동대에 돌진할 준비를 하고 집회군중들을 보위하는 한편, 필요시에는 즉시 퇴각 가능하도록 “물량”(필 박스) 확보를 하라는 지시가 작은 목소리로 전해져 왔다.

    지붕 위에서 큰 소리로 선동하고 있는 지프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지프니는 행진 선두에 위치하고 있었다. KM의 대변인으로 타고난 선동가였던 발 핑구엘이 지프니 위에서 연설을 막 마치는 순간 경찰에 의해 끌려 내려졌다. 그러자 혼란이 벌어졌고, 집회 중에 혼란의 막간극이 일어나게 되면 항상 그랬듯이 모두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중들은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 선봉대가 임무 수행을 위해 앞으로 나가는 시그널은 국가의 마지막 부분 “당신을 위해 죽으리…”라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까지 가기 전에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돌멩이와 필 박스가 소나기처럼 난무했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가 삽시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도로와 인도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진 것이다. 가스 마스크를 쓴 기동경찰이 경찰봉과 방패를 들고 시위대를 향해 몰려왔다.

    연막이 빠지자 피투성이인 사람들이 여러 명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필 박스나 곤봉, 돌로 인한 부상일 것이다. 공원 쪽으로 퇴각해 리잘 기념비와 중국 정원을 지날 즈음, 나는 타는 듯한 눈의 통증을 느꼈다. 숨 막힐 것 같은 고통에 사람들이 괴로워했고, 구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과 코, 그리고 얼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식히기 위해 물을 찾았다. 물을 발견한 사람들은 셔츠를 찢어 물을 적셔 눈과 얼굴을 문질렀다. 최루가스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젖은 셔츠가 시위대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집회에 대한 폭력적 탄압이었다. 내 머리 속에는 그 날의 선열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분노에 찬 한 여성이 맨발로 길거리에 서서 경찰의 폭력과 자신의 샌달을 잃어버린 것에 항의하며 경찰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에타스족 그룹은 흩어지면서 길을 잃어, 다음 날 마닐라 수도권 지역 여기저기서 발견됐다.

    입당

    72년 여름, 나는 카마나 지역의 필리핀 공산당(CPP)에 입당했다. 이 조직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MR)의 제3구(D3)로 불렸다. 그 때 나는 아직 16살로 CPP의 당 규약에는 입당연령이 18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입당시킨 당원은 다소 불안해했다.

    어느 날 밤, 나를 입당시킨 동지가 말라본의 어떤 빈 집으로 신입당원들을 소집했다.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양초를 켜야만 했다. 우리가 들어간 방에는 망치와 낫이 그려진 필리핀 공산당의 깃발이 벽에 붙어있었고, 그 아래 작은 테이블에는 붉은 색의 작은 모택동어록이 놓여있었다. 필리핀 공산당과 그 혁명 전략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이 있은 후, 우리는 당에서 사용할 가명을 종이에 적어내야 했다.

    나는 베르겔(Vergel)─타갈로그어로는 비르길(Virgil)─이라는 이름을 써냈다. 그것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에서 따 온 것으로, 그의 시를 읽은 적은 없었지만, 그 이름은 내게 호메로스나 트로이 전쟁을 연상케 하는 울림이 있었다. 계엄령 동안 지하 조직에서 이 베르겔이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게 「VJ」로 바뀌었고, 나중엔 아예 미국식의 「BJ」로 되었다.

    처음 입당한 조직과 함께 한 기간은 아주 짧은 동안이었다. 우리는 곧 다른 임무를 맡아야 했다. 나는 최근 결성된 당 지부의 위원회 멤버로 지명됐다. 내 임무는 이 지역의 청년들과 학생들에 대한 오르그 활동이었다.

    계엄령이 발포되자 나보타스 시의 당 지부는 폐쇄됐다. 그것은 지역별 조직에서 부문별 조직으로의 당 재편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MR(마닐라 · 리잘)재편」으로 불린 이 최초의 당 재편은 대중기반을 구축하고 당의 대중공작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 지부 동지들은 이 재편에 대해 부문을 기초로 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당을 만든다는 이유로 그동안 고생하며 구축해온 지역당 구조를 와해시켜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었고, 그것은 납득할만한 것이었다.

    당은 학생들이 주도한 반란에 의해 이제 겨우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고, 당에는 극히 소수의 지역 조직밖에는 없기 때문에 간부들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전략적인 부문에 집중배치 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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