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이미지와 현실 사이
[안녕? 페미니즘!] 욕망의 기득권
    2015년 09월 18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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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에서의 성공 비법을 일러주는 여성 자기계발서들은 당대 사회상과 여성들의 욕망을 반영하며 변천해왔다. 사랑 전략에서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적으로 매력적인 남성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흔히 바람둥이로 불려온 이 남성상은 오랫동안 안전한 연애와 성공적인 결혼을 위협하는 위험한 상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나쁜 남자라는 말이 부상하면서 적극적인 선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거부할 수 없는 성적 매력을 지닌 호색한이라는 의미는 유사하다. 다만 감미로운 매너와 가공할 테크닉을 나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쁜 줄 알면서도 끌리게 된다는 함의가 강조된다.

나쁜 남자

드라마 ‘나쁜 남자’의 한 장면

2000년대 중반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안은영의 <여자생활백서>는 지레 겁먹고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나쁜 남자를 오히려 유혹하라고 조언하다. 어수룩하고 순진한 여성들에게 꼬인다는 통념과 달리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지적인 여자들이야말로 나쁜 남자들이 제대로 사랑에 빠지는 상대라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나쁜 남자가 유혹하는 대로 순순히 유혹 당해주기’라는 유혹의 방법이다. 꼬시는 여자는 헤픈 여자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꼬임을 당하는 수동적 위치 자체를 당해‘주는’ 적극적인 의미로 전복시키면서(까지) 욕망의 주체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 자기계발서들이 나쁜 남자와의 사랑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일 뿐이라는 조언들도 많다. 그러나 성공의 주체인 만큼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도 포기하지 말라는 입장은 같다.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배우자에게만 의탁하려 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동일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성적 쾌락 역시 동등하게 향유하려는 욕망과 자신감으로 생성된 이미지가 다름 아닌 나쁜 남자인 것이다.

나쁜 남자에 대한 이러한 열광의 의미를 글로벌 남성 잡지 <맥심>이 불안하게 감지한 것 같다. 악역을 주로 맡는 배우를 등장시킨 <맥심> 9월호 특집 화보는 여성 살해 이미지를 담고 있다. 청테이프에 묶인 발, 트렁크에 웅크린 채 팽개쳐진 뒷모습, 시신 유기 주머니에 분산되어 있는 피로서의 존재일 뿐, 공포와 고통에 찬 얼굴마저 지워져버린 여성이다.

맥심

사진=맥심코리아 홈페이지

페미니즘 문화연구의 고전, 수잔나 월터스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여성들』에 따르면 권력은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존재의 이미지를 결정하며, 보여지는 존재는 보는 주체의 시각적 쾌락에만 종사하는 방식으로 조각난다. 남성 권력 사회의 대중 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은 실재하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 욕망의 성적 스펙터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잡지에 대해 누리꾼들이 보이콧 운동을 벌인 것은 타당해 보인다. 여성에 대한 강력 범죄가 만연한 현실이 반영하듯,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일부가 여성에 대한 폭력적 지배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 남성 잡지의 이번 호에 한정될 것도 아니다. 여성 살해 이미지가 지배의 쾌락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미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토론되어야 할 것은 나쁜 남자의 이미지를 범죄자로 대체하려는 데에서 나타나는 남성들의 불안이다. 단서는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라며 표지 카피가 제안하고 있는 내용이다. 진짜 나쁜 남자는 악당이자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폭력과 살해 공포로 나쁜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욕망을 조롱하는 효과를 가진다.

암시된 것은 자신들은 이런 이미지 속의 ‘진짜’ 나쁜 남자도 아니며, 여성들이 현실에 있기를 바라는 나쁜 남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나쁜 남자가 단순히 경제력, 사회적 지위, 외모까지 두루 갖춘 완벽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강력한 문화적 ‘응징’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즉 가부장적 교환 관계의 테두리 안에 있는 완벽남에 대한 선망은 기존의 젠더 관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나쁜 남자에 대한 욕망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위치마저도 스스로의 통제권 안으로 가져와 성적 쾌락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찾으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기존의 가부장적 각본을 벗어나고자 함으로써 젠더 관계를 교란한다.

맥심걸로 우승을 차지한 정두리씨가 예정되어 있던 표지 모델을 거부하며 보이콧 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그녀는 여성을 시각적 쾌락물로만 소비하는 전형적인 남성 잡지의 모델인 동시에, 젊은 여성들의 솔직한 성담론과 이미지를 담아내는 도색 잡지(<젖은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중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이 행보는 나쁜 남자를 욕망하는 여성들의 전략이기도 하다. 성적 대상화와 남성적 응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포기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욕망과 쾌락의 주체가 될 여지와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욕망하며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남성성은 상대의 욕망할 권리를 인정하는 능력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남성상을 오랫동안 규범화 해왔던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는 긴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맞벌이를 당연시하면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기득권 침해로 여기는 것처럼, 성적 쾌락의 주체이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진짜’ 나쁜 남자, 즉 (성)범죄자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니냐는 엄포는 이 불안과 긴장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욕망하는 관계는 대체로 소극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상상되어 왔다. 살해, 강간,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의 범죄와 폭력이 아닌 것일 뿐, 그것의 적극적인 의미 생성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훨씬 더디게 나타나는데, 그 원인이 욕망과 쾌락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데 있음을 이번 화보가 보여준다.

월터스가 제안했듯이 재현물에 대한 비판이 전복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피해자로 정형화된 여성 이미지를 통해 남성 지배를 드러내는 데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미지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화보 사건의 특이성은 욕망할 수 있는 주체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동시대 성별 경합을 나쁜 남자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냈다는 데 있다. 남성과 여성이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함께 하는 사회가 서로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아가야 하듯이, 이번 사건은 주체의 자리로부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풍요로운 사랑과 쾌락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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