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스펙트(respect)
    [왼쪽에서 본 F1] 극한에서의 룰
        2015년 09월 14일 01: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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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하면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지만, 때로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의미 전달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해를 만들 때가 있습니다. F1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 ‘’리스펙트'(respect)’가 한 가지 예입니다. 혹자는 단순하게 우리말로 ‘존중, 존경, 경의, 배려’ 등의 단어로 대체해 사용하자고 얘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번역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긴 얘기가 ‘리스펙트’라는 말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번역의 애매함만큼이나 F1에서 사용되는 ‘리스펙트’란 단어는 개념이 모호합니다. 특히 두 드라이버가 순위를 끌어 올리거나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순위 싸움(배틀)을 벌일 때 적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합니다. 최선을 다해 싸우되 ‘상대를 ‘리스펙트’해야 한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상대를 높이 생각하고 배려해준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큽니다.

    그런데 F1을 비롯한 모터스포츠, 레이스, 넓게 봤을 때 모든 종류의 경주 종목 스포츠에서는 어떻게든 남들보다 빨리 달려 이겨야 합니다. 규칙이란 것이 존재하지만, 규칙에 명시되지 않았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죠. 그러나 ‘리스펙트’는 규칙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몇몇 민감한 경우를 제외하면 F1 규정에도 ‘리스펙트’와 관련된 규정은 상세하게 적혀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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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 그대로 불꽃 튀기는 배틀을 벌였던 나이젤 만셀과 아일톤 세나

    막상 치열한 배틀이 시작되면 ‘리스펙트’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시속 300km/h로 달리는 차 안에서, 스티어링 휠을 1도만 돌려도 순간 차가 돌아버리는 상황에서 정확한 컨트롤부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배틀은 상대를 밀어내는 싸움입니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해서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길을 비키라고 강요하는 싸움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뭔가 해준다는 의미의 ‘리스펙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레이스에서의 배틀입니다.

    그러나 배틀이 벌어지면 드라이버들은 자신의 차를 잘 컨트롤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위치를 확인하고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앞을 보기에도 바쁘지만 조그만 사이드 미러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동시에 상대와 직접 접촉하거나 사고를 일으켜선 안 됩니다. 최대한 압박하되 한계를 지켜야 하고, 상대의 압박을 참아낼 때도 분명한 선까지만 고집을 부려야 합니다. 이런 애매한 상황이 바로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곳입니다.

    상대가 압박한다고 쉽게 자리를 내준다면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압박해서 밀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리스펙트’만큼은 꼭 지켜야 하는 가치입니다. ‘리스펙트’가 없다면 F1의 레이스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제 차 하나 간수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상대의 레이스를 망쳐서는 안 됩니다. 강하게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되, 상대방에 대한 ‘리스펙트’만큼은 잊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리스펙트’가 돋보이는 배틀은 보는 사람들을 환호하게 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코너를 공략하며 혼자 제대로 빠져나가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두 대의 차량이 나란히 서서 바퀴가 겹쳐질 듯 바짝 붙어 달리며 자리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흥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두 드라이버가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를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경쟁을 벌이는 장면이야말로 F1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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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펙트’의 의미를 잘 보여줬던 키미 라이코넨과 미하엘 슈마허의 배틀

    유독 F1에서의 ‘리스펙트’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리스펙트’가 없다면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며 경쟁해야 하는 모터스포츠 중에도 F1은 특히 더 빠른 속도를 내기 때문에 더없이 위험합니다. 그런 위험한 속도에서 다른 차량과 바퀴가 겹치도록 바짝 붙어 달린다? 이보다 위험할 수는 없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위기 상황이기 때문에 이기기 위한 욕구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다른 여러 가지 스포츠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겠지만, 때로 F1에서 배운 교훈이 다른 곳에 적용해 얘기해도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리스펙트’ 역시 레이스가 아닌 다른 곳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목표를 정하고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을 펼쳐야 하는 모든 상황에 ‘리스펙트’가 지켜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방향을 보고 달려가고 있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뜻을 관철하고 다른 이들을 밀어내야 하는 것은 F1이든 보통 사람이 사는 세상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순진하게 상대를 마냥 배려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지만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일수록, 모든 것을 건 싸움일수록 ‘리스펙트’는 더 중요한 가치인 것 같습니다.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든, 내가 힘들고 한계에 달한 상황이라도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를 지키는 것. 그냥 물러나라는 것과는 다른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라는 것. 한 번 쯤 고민해볼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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