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진화에서 혁명으로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질풍노도②
        2015년 09월 12일 12: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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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회 프롤로그: 체포와 탈주

    제 1 장 1970년 ; 1/4분기의 폭풍

    「1/4분기의 폭풍」(The First Quarter Storm ; 1970년 1월~3월(1/4분기)에 마닐라와 수도권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일련의 반정부 학생시위)이 필리핀을 뒤흔든 것은 내가 15살 때였다. 「1/4분기의 폭풍」은 1970년 1월에서 3월까지, 즉 1/4분기의 역사적인 격동기를 말한다.

    이 시기, 대(大)마닐라권(그 당시에는 아직 「메트로 마닐라」란 명칭이 없었다)에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의 대규모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수도 마닐라에서는 연일 수 만 명 규모의 집회와 학생 시위가 벌어졌고, 대개 경찰과의 충돌과 전투로 이어졌다. 1970년 1월 30일 밤에서 31일 새벽에 걸쳐 말라카냥 궁〔필리핀 대통령 관저〕과 그 주변을 뒤흔든 일련의 시위에 의해 「1/4분기의 폭풍」은 그 기세를 더해 갔다.

    나는 「1/4분기의 폭풍」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우리 형은 「1/4분기의 폭풍」이 일어났을 때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경험을 할 수 있었다. 「1/4분기의 폭풍」에 대한 나의 지식은 대부분이 형이 해준 얘기나 신문을 통해 읽은 것들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피트 라카바에 의한 「1/4분기의 폭풍」 르뽀는 나오자마자 읽었다. 그것들은 나중에 『불온의 나날, 분노의 밤』이라는 책으로 발행되었다.

    내가 모아놓은 자료들에 의하면, 「1/4분기의 폭풍」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1970년 1월 26일, 여러 학교들에서 모인 5만 명 가량의 학생들이 마닐라의 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이것은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회의에서의 일반 교서 연설을 겨냥해 열린 것이었다.

    오후가 되어 마르코스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오자, 시위대는 골판지로 만든 모의 관과 악어 인형을 대통령에게 던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경찰들은 의사당 계단을 뛰어내려와 방어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경찰봉을 휘둘렀다.

    1월 30일, 학생들은 화염병과 「필 박스」(화약과 금속조각으로 만든 수제 폭발물), 창과 돌 등으로 전투 준비를 하고 다시 모였다. 격돌의 무대는 말라카냥 궁으로 옮겨졌다. 그날 말라카냥 궁 근처에 있는 멘디올라 교(橋)라는 작은 다리 주변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후에 「멘디올라 전투」로 불리게 된 사건이다.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됐다.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말라카냥 궁으로 돌진했다. 군대가 저지에 나섰고 급기야 전차까지 동원됐다. 학생들은 퇴각하면서 수제폭탄을 던지면서 차량과 버스 등에 방화했다. 공방이 끝나고 연기가 걷히자, 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4명의 젊은이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쓰러져있었다. 부상자 또한 수백여 명을 넘었다.

    다음 날 마르코스는 국내의 모택동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 「폭동」을 필리핀 국군이 격퇴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후 어떠한 혁명의 시도도 총력을 경주하여 격퇴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마르코스의 경고나 협박, 나아가 학생들의 죽음조차도 소요사태를 잠재울 수 없었다. 학생과 청년들은 반란을 더욱 확대시켜나가기 위해 급진적인 조직을 만들었고, 소요는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어진 수개월 동안, 반정부활동의 요괴가 마닐라수도권의 대학과 가두를 배회했다. 1970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타오른 청년들의 반란은 「1/4분기의 폭풍」으로 명명되었다. 이 시기를 「1/4분기의 폭풍」으로 명명한 최초의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필리핀 대학의 학생신문 『필리핀 학생』의 사설이 최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설은 시적인 산문체로 쓰여져, 대학과 여타 학교에 불어 닥친 폭풍의 이미지를 잘 그려냈다. 그러나 이 분노의 불꽃은 시작에 불과했다.

    1년 동안의 폭풍

    계엄령 전인 이 시기의 학생 반란을 「1/4분기의 폭풍」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마닐라 수도권을 휩쓴 정치적 폭풍은 이 해 내내, 나아가 이듬해인 1971년까지 2년간이나 이어졌기 때문이다.

    폭풍은 더욱 격렬해져 필리핀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1/4분기의 폭풍」은 1970년의 처음 3개월로 끝나지 않고 1년 내내 거칠게 불어 닥치는 태풍이 되었고, 이후 3년간 격렬한 분노의 불꽃을 태우게 된다. 1972년 9월 21일의 계엄령에 의해 분노의 폭풍은 가라앉게 되지만, 그 역시 짧은 동안의 고요에 불과했다.

    소요사태는 계속되어 학교로부터 지역으로, 지역에서 공장으로, 그리고 도시로부터 지방으로 번져나갔다. 처음 가두집회와 시위의 형태를 띤 저항운동은 이윽고 필리핀 중부나 북부의 평야지대에서의 군사행동을 수반하기에 이르러 신인민군(NPA)〔New People’s Army; 필리핀 공산당의 군사 조직〕 게릴라부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

    「1/4분기의 폭풍」은 주로 마닐라 수도권의 학생들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반란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필리핀의 공산주의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의 재건을 통해 주로 학생이나 도시의 공장노동자 등 젊은 급진적 세대가 운동에 가세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지도부의 체포로 인해 붕괴된 소련파 필리핀 공산당 PKP〔필리핀 공산당 ; 타갈로그어 Partido Komunista ng Pilipinas의 약자로, 필리핀에서 최초로 결성된 친소련 성향의 공산당〕가 이 재조직화를 주도했다.

    시손

    1986년의 호세 마리아 시손(www.jacobinmag.com)

    1968년, 영어교사 호세 마리아 시손이 이끄는 젊은 활동가들이 필리핀 공산당 PKP로부터 분열했다. 그들은 새로운 필리핀 공산당 「CPP」(Communist Party of the Philippines)〔그 의미는 「필리핀공산당」 으로 PKP와 같지만, PKP와 구분하기 위해 영어 약자를 사용했다〕를 마르크스-레닌-모택동주의 노선 아래 결성했다. 그들에 의하면 「재건된」 당─그들은 분열이라고 하지 않았다─은 소련파 공산당 PKP 지도부의 「정치적 파산, 수정주의, 투항주의,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만든 것이었다. CPP는 마오주의 노선에 입각해 필리핀에 있어서의 투쟁 방향을 재검토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아 당의 전략을 PKP의 「의회주의」로부터 CPP의 「인민 지구전」으로 전환하려 했다. 그들은 이듬해인 1969년에 PKP 게릴라 전 지도부 10명을 모아 무장조직인 「NPA」(신인민군)를 창설했다.

    공산주의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마닐라 수도권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 학내 문제나 베트남전 반대를 둘러싼 학생운동이 격화되고, 필리핀 경제는 악화되어 정치상황은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4분기의 폭풍」이 마닐라 수도권을 휩쓸었을 때, 그 운동은 필리핀 공산당 PKP로부터 분열한 새로운 공산당 CPP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다.

    급진화에서 혁명으로

    이 시기 필리핀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의해 혁명적 정세의 객관적 기반이 만들어졌다. 이미 「1/4분기의 폭풍」 이전부터 대중들은 반항적이 되었고, 계급투쟁이 격화되어 갔다.

    빈농들의 토지문제에 대한 실망과 악화되는 농촌지역의 경제 상태는 1967년 5월 21일, 끔찍한 사건을 초래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날 비콜 지방을 기반으로 한 천년왕국파 신자─ 「라피앙 말라야」라고 불렸다─100여명의 농민들이 마닐라의 태프트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색 유니폼에 붉은색과 황색의 케이프〔망토의 일종〕를 입고 있었고, 그 중 몇 명인가는 벌목용 칼과 부적을 들고 있었다.

    필리핀 경찰기동대가 그들의 행진을 저지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농민들이 해산을 거부하자 경찰은 허공에 공포탄을 쏘며 위협사격을 가했다. 보도에 의하면 농민들은 이에 대항해 벌목용 칼을 휘두르며 돌진했고, 군과 경찰은 농민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 사건으로 여러 명의 농민이 학살되었고, 라피앙 말라야의 지도자 발렌틴 산토스가 체포됐다.

    이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군의 젊은 카톨릭 신부들이 자발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의 계절노동자가 되어 네그로스 섬의 농업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 (이 신부들 중에는 후에 신부생활을 포기하고 필리핀 민족민주전선(NDF)의 지도자가 되는 루이스 하랑드니가 있었다) 농업노동자들은 노동자 거주지의 돼지우리와도 같은 불결한 환경 속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대규모 농장의 사탕수수 수확노동에 종사했다. 그들의 비참한 노동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중산층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대중들의 비참한 상황과 지금까지 온순했던 세력(예를 들면 빈농)의 산발적인 저항을 보면서 한 카톨릭 사제는 “이 나라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과 같다”고 말했다.

    「1/4분기의 폭풍」은 급진화된 학생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운동은 고양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되었다. 노동자의 파업투쟁이 확대되는 가운데 새로운 노조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급진적 학생들은 학교나 파업 현장, 공장과 지역의 모든 곳에서 혁명을 호소했다. 계급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체제를 뒤엎는 변혁을 바라게 되었고, 가진 자들은 체제를 구하기 위한 변혁을 희망했다. 목적은 달랐지만 양자 모두가 사회변혁을 바라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 자체도 두 진영으로 분열됐다. 「온건파」는 제당파가 참여하는 제헌의회에 의한 개량을 주장했으나, 「급진파」는 혁명을 내걸었다. 양 쪽 모두 변혁을 희구했고, “제헌의회 또는 혁명을!”이라는 구호가 곳곳에서 외쳐졌다.

    폭발을 피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1970년 11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공고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강력한 대통령제를 굳히기 위해 몇 명의 심복을 입후보시켰다. 한편 필리핀 공산당 CPP는 선거와 제헌의회 소집 보이콧을 주창했다. (그 호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대학의 급진파 학생 볼테르 가르시아 3세가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그 후 의회를 혁명의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전쟁과 혁명

    지금 돌이켜 보면 계급투쟁이 아직 성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CPP는 이 기회를 지지기반의 확대에 활용했어야 했다. 특히나 이제 겨우 급진적인 조직이 태동하기 시작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확대해가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혁명과 개량 사이에 망설이고 있는 대중들에게 혁명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도 CPP는 선거와 의회를 활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CPP는 자신의 마오주의 노선으로 인해 혁명을 추구하기보다 전쟁을 지향했다. 계급투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느닷없이 인민들에 의한 지구전을 개시하기 위해 정세의 유동화를 획책했던 것이다. 초보적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조응하여 혁명을 발전시키고 대중들의 투쟁의 경험을 축적시켜 나가는 대신에 CPP는 「인민 지구전」이라는 지름길을 택했다.

    당시 필리핀은 전쟁을 조직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고, CPP는 다른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했다(필리핀의 상황은 마오가 일본의 점령에 대항해 「인민 지구전」을 주창한 1930년대 후반의 중국과는 전혀 달랐다). CPP는 투쟁의 격화를 위해 시기상조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의 게릴라전을 개시했을 뿐만 아니라, 몇 명의 지도부가 후에 인정한 것처럼 정세의 격화를 노린 폭탄사건을 여기저기서 터뜨렸다. 또한 CPP는 외국으로부터 대량의 무기가 유입되는 것을 기대했으며, 「무르익은 정세」가 학생들로 하여금 지방으로 가서 초동단계의 게릴라전에 불을 붙이기를 희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계급투쟁의 진전을 저해했다.

    제 2 장 폭풍의 전조

    나는 「1/4분기의 폭풍」, 즉 1970년의 1월에서 3월에 걸쳐 일어난 항의행동이나 시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4분기의 폭풍」 세대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세대는 들불처럼 마닐라 수도권 각지로 퍼져나갔고, 또 필리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섬들로 번져나갔다. 나는 「1/4분기의 폭풍」에 감화되었다. 그 천둥소리와도 같은 충격에 의해 내 삶은 바뀌어졌다. 나는 그 급진주의의 토양 위에서 성장했고, 「1/4분기의 폭풍」이 추구한 미완의 혁명을 위해 계엄령의 암흑기 아래서도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한편 「1/4분기의 폭풍」에도 그 자신의 역사가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느닷없이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폭풍의 도래를 예고하는 전주곡이 있었다. 1969년의 학생 개혁운동이 분노의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1969년의 학생 운동

    1969년은 인류가 달에 착륙했던 해였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TV로 방영된 이 기념할만한 사건을 목격했다.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을 걸으면서 “이것은 한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작은 한걸음이지만, 인류에 있어서는 위대한 비약”이라고 말했다. 필리핀에서는 기쁜 소식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달 착륙 며칠 전, 글로리아 디아스가 필리핀에서는 최초로 미스 유니버스에 선발된 것이다. 이들 사건들은 필리핀의 새 학기 초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그 후 대학에서 터져 나온 일련의 시위와 반란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1969년 전 기간을 통해 「학생반란」 ─언론은 이렇게 불렀다─이 마닐라와 근교의 대학 캠퍼스에 소용돌이쳤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복도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교실을 뒤집어엎고 의자나 책상을 부수고 유리창을 깼다. 항의행동이 절정에 달하자 건물에 방화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들, 즉 냄새나는 화장실에서부터 치솟는 등록금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학원 문제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항의행동과 함께 학생들은 때로 대학 당국에 시설과 제도의 개선 또는 개혁을 요구하는 리스트를 제출했다. 이 저항의 바람이 학생들에 의한 대학개혁운동의 탄생을 예고했다.

    학생들의 개혁운동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리세움 대학, 산토 토마스 대학, 아렐라노 대학, 마푸아 대학, 마닐라 대학, 동부대학, 마닐라 중앙대학, 필리핀 해양대학, 극동항공대학, 극동대학, 애덤슨 대학, 마뉴엘 케손 대학, 필리핀 대학, 그리고 미션계 상류학교인 아테네오와 라살 대학에까지 파급됐다. 필리핀 학생운동사상 전례 없는 격화와 확대의 양상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연대감이 고양된 것은 이 시기로, 자신들을 사회에 있어 강력한 하나의 계층으로 재확인하게 되었다. 한 대학에서 항의행동이 일어나게 되면 다른 대학에서 연대를 표명했다. 특히 마닐라의 대학가에서는 일체감이 형성되어, 어떤 하나의 캠퍼스에서 항의행동이 가두로 이어지면 인근 대학 학생들이 응원을 나와 가세해 교통을 차단시키곤 했다. 그 무렵 「스튜던트 파워」라는 슬로건과 그 엠블럼이었던 불끈 쥔 주먹 그림이 학생들 사이의 상징물이 되고 구호가 되었다. 급진화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스튜던트 파워」의 슬로건이 국제적인 투쟁구호가 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1968년의 세계적 격동

    1968년에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이미 이 슬로건을 내걸었다. 북미의 학생들과 유럽의 학생들은 이미 대학 내의 제 문제를 비롯한 베트남전쟁, 경찰의 횡포나 폭력, 정부의 부패와 오만, 그 밖의 많은 문제들에 항의해 가두로 진출하고 있었다. 몇 개 나라의 학생들은 노동자나 기타 억압받고 있는 계층과 연대했다.

    미국 학생들은 공민권운동이나 흑인운동 활동가들과 손을 잡고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정치 지배층의 편견과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투쟁했다. 흑인 공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에 항의하는 폭동이 미국 주요도시에서 일어났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폭동은 최대 규모의 것으로, 시의 상당부분이 방화에 의해 불태워졌다.

    프랑스에서는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합류했다. 파리의 가두에 바리케이드가 등장했고, 5월 13일에는 프랑스 사상 최대의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그 날 백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와 학생들이 파리 시내를 행진했다. 그들은 샤를 드골 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의 진지를 구축했는데, 그것은 프랑스 공산당의 배신에 의해 겨우 진압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나 독일, 스페인에서도 대학은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 대학은 아카데믹 센터로서 겨우 기능하고 있었으나, 그조차 때때로 폐쇄되거나 점거되곤 했다. 학생과 경찰의 폭력적인 충돌은 멕시코, 리오데 자네이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 에콰도르, 칠레에서도 일어났다. 폴란드의 학생들도 스탈린 체제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학생과 노동자들이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의 전차에 맞서 저항했다.

    학생 반란은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전투성은 노동자, 농민, 기타 사회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학생들과의 연대를 추구했다.

    “1968년에 세계는 역전됐다” ─이 때 전 세계에 불어 닥친 폭풍을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투쟁이나 혁명이 시대착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불과 몇 개월 만에 상황이 돌변했고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필리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자명했다.

    격동의 1970년

    필리핀 학생운동이 다른 나라 학생들의 움직임을 쫓아가게 된 것은 1970년이 되어서였다. 운동은 학내 문제로부터 전국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문제로 그 영역과 관심을 확대해 나갔다. 그 중에는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투쟁의 장소도 학내로부터 말라카냥 궁이나 미 대사관으로 옮겨졌다. 이 즈음 미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전에 대한 항의를 강화해, 1970년 5월 14일~15일에는 400만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450개의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총파업이 실시되었고, 폭력적이거나 또는 비폭력적 항의행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미국의 학생들이 전개한 항의행동은 필리핀의 급진파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 역시 베트남전 반대의 항의행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학생들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폭격의 중지와 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필리핀의 학생들은 민생활동부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필리핀 국군은 베트남에 「민생활동」을 구실로 부대를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 「1/4분기의 폭풍」은 미국과 전 세계를 뒤흔든 반전투쟁으로부터도 그 에너지를 얻었다.

    학생 개혁운동 시즌 2

    그러나 1970년 당시 대학의 「고참」 활동가들이 말라카냥궁 근처의 화약고와도 같은 대학가에서 반란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우리들 고교생, 그 중에서도 마닐라 수도권 주변지역 「고삐리」들은 겨우 1/4분기 폭풍의 뒤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교생활 후반의 2년간 학교개혁운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급진적인 정치활동과 혁명투쟁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70년 봄 경, 내가 말라본 시에 있는 호세 리잘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형이 학교당국에 대한 요구서 초안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요구서에는 수업료 인하, 학교 시설의 개선, 학생 조직인 「스튜드」(Students for Democracy;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연합)의 승인 등이 담겨져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는 만약 그런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겠다고 하는 경고성 문구를 넣어 파업을 암시했다.

    어느 날 우리는 수업 종료 후 교실에서 「스튜드」의 임원 선거를 했다. 투표에서 클래스의 인기 있는 다른 학생에게 지는 바람에 나는 의장이 되지는 못했으나, 「스튜드」의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만약 학교당국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스튜드」 회의가 열렸다. 나는 수업 보이콧을 주장했지만, 의장이 된 학생은 내 안에 찬동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고 조직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요구서를 교장에게 전달했으나 교장은 그것을 마닐라에 있는 알레라노 대학에 전달했다. 이 대학이 말라본 시에 있는 글레고리오 산티아고 고등학교와 우리 고등학교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알레라노 대학 사무실로 호출되어 학교당국 담당자와 짧은 시간 동안 면담했다. 전년에 이미 학생 분쟁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당국의 담당자는 시설의 개선과 우리들 조직의 승인을 약속했고 학생들과의 대결을 피했다.

    우리는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리는 「애국 청년회」 KM의 말라본 지부를 찾아갔다. 우리 형은 그 창설자 중 한 명이었다. KM은 수업 보이콧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수업 거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항의행동의 전야, 우리는 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한 멤버의 집에서 수업 거부 포스터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었다. 또 다른 몇 명은 KM에서 받은 「레시피」에 의거해 「필 박스」를 만들었다. 새벽에 우리는 교문 앞에 집결해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한 피켓라인을 펼쳤다.

    등굣길의 학생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교문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인가가 교내로 들어가자고 선동하며 진입을 시도했고, 우리는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우리 쪽 몇 명이 당황한 나머지 교내를 향해 두 발의 필 박스를 던졌다. 폭발음에 기겁한 교장은 즉각 학교 폐쇄를 지시했다. 우리는 환호작약했다. 우리의 첫 무대는 화려하게 성공한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우리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며 수업 거부를 더 오래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수업거부는 학교 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내가 복도를 걸어가면 많은 학생들이 인사를 했다. 이렇게 주목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수업거부 이전의 나는 평범한 학생으로, 친한 친구나 선생 외에는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학교 측은 나를 운동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과외활동에 끌어들이려 혈안이 되었다. 1970년 6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자 담임은 나를 학생평의회의 오후 클래스 대표 평의원에 입후보시켰다. 나는 우리 조직인 「스튜드」의 일원으로 입후보했고 선거활동을 했다. 커다란 주먹이 그려진 포스터를 통해 활동가임을 나타냈다. 형이 연설원고를 써주었고, 난 그것을 외워가지고 클래스마다 돌면서 연설했다. 미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레토릭을 쓴 것은 대단히 정치적이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개표에서 나는 오전반의 여학생에게 근소한 표차로 졌다. 그녀는 전에 나보타스 초등학교 졸업생 대표를 했던 학생이었다. 담임은 근소한 표차로 떨어진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며 위로했다. 내가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체육교사는 나를 교내 대항전에 대비한 농구 코치로 임명했다. 담임은 또 내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인 호세 리잘의 순교와 사랑의 생애에 대해 열변을 토해 제 1회 대회에서 우승했다. 학생회 기관지의 집필자가 되어 뉴스 편집자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또 고등학교 철자 맞추기 경연대회에도 나갔는데, 시험지를 나눠주던 교사가 너는 다른 학생에게 영예를 양보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그냥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정치활동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포츠나 그 외의 과외활동들은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집회라든가 사회정의나 혁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집회에 비하면 하찮케 느껴졌다.<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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