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곤 해결할 특효약인가?
    21세기 신종 고리대금업인가?
    [책소개] <빈곤을 착취하다>(휴 싱클레어/ 민음사)
        2015년 09월 12일 1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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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액 금융(microfinance)’은 세계의 빈곤을 종식시킨다는 미명하에 개발도상국에 선진국의 자금을 끌어와 빈곤층이 소규모 사업을 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저리에 소액을 대출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전 세계를 누비며 소액 금융업계에 10년 이상 몸담았던 저자 휴 싱클레어는 많은 소액 대출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한 투자라는 외양만 덧입었을 뿐, 실상은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는 대부 사업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뉴스 이면의 진실을 밝히며, 목적을 잃어버린 소액 금융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서 나아가 지구촌의 빈곤과 불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난 20년 동안 소액 금융은 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특효약으로 인식되어 왔다. 소액 대출을 통해 빈곤층이 기업가적 자질을 발휘해 창업하고 지역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소액 신용 대출로 빈곤을 타파하는 데 앞장선 그라민은행의 설립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소액 금융은 빈곤 국가 개발의 주요 수단으로 확실히 인정받았다.

    ‘빈곤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이라는 메시지가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며 성장이 가속화되고, 증권 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하는 소액 금융 기관이 속속 생겨나며 이 산업은 700억 달러 규모로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소액 금융 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목격하게 되면서 저자는 소액 금융의 맹점과 실체를 파헤치게 된다. 실제로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는 대출자들을 빚의 악순환으로 내몰고, 공격적인 대금 회수 관행은 강제 매춘과 아동 노동, 자살까지 발생시키고 있다.

    싱클레어는 이 책에서 특히 대형 은행들이 개입되면서 이 시스템이 점차 이윤 극대화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상세히 설명하는 여러 스캔들 중에는 어느 대형 아프리카 소액 금융 기관에 관한 충격적 실화가 있다.

    연 100퍼센트가 넘는 이자를 부과하는 이 기관의 투자자와 후원자 중에는 소액 금융계를 선도하는 유명 단체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싱클레어의 이의제기에 이들은 처음에는 침묵으로, 그다음에는 협박, 다음에는 뇌물, 다음에는 소송으로 차례로 대응했고, 결국 싱클레어는 목적을 상실한 소액 금융의 내부 고발자가 된다.

    소액 금융은 분명히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액 금융이 장기적으로 빈곤 완화에 기여한다는 분명한 증거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안타깝게도 소액 금융계에 부주의와 부패, 착취에 가까운 수단이 만연하다는 증거는 실제로 존재한다.

    싱클레어는 윤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업을 하는 몇몇 단체와 함께 일하며 겪었던 감동적인 일화들 역시 들려준다. 그리고 이들 단체가 다른 소액 금융기관들과는 어떤 점이 다른지 설명한다. 하지만 싱클레어가 이 책에서 신랄하고도 명료하게 이야기하듯이 근본적인 개혁 없이 소액 금융은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허한 약속과 빈 주머니만을 안겨 주는 ‘투자 기회’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빈곤을 착취하다

    소액 금융의 맹점

    이 책에 따르면 소액 금융은 기업가적 비전이라는 핵심 가치에 기대고 있다. 즉 곤궁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건네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자고 말이다. 소액 금융의 기본 개념은 매우 매력적이다. 개발도상국의 허름한 오두막에 사는 여성이 소액 대출을 받아 재봉틀이나 염소 같은 생산적인 자산을 마련한다. 그 자산을 토대로 열심히 일해 소규모 자영업을 이루고 가난에서 벗어나며, 이로써 그 자녀들은 물론 지역 사회까지 혜택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선진국의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자선 단체에 돈을 건네는 방식에 회의를 느껴 온 이들이 늘고 있고, 그냥 돈을 주는 것보다 빈민의 자립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대출된 자본이 현명하게 투자되고 재순환하여 또 다른 빈곤층을 돕는 데 기여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제네바나 워싱턴 등에 있는 투자자들은 합당한 이익을 얻고 빈곤이 퇴치된다. 그러나 저자는 책의 앞부분부터 소액 대출로 재봉틀을 장만해 자립을 일구는 빈곤층 여성이라는 아름답게 포장된 이미지에 숨겨진 맹점과 허점을 몇 가지 언급한다.

    1 실제로 그런 사례는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개 남자들은 대출받는 자리에 부인을 내보낸다. 그래야 대출 승인을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 대출금이 재봉틀이나 염소처럼 생산적인 용도에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텔레비전을 사거나 다른 대출금을 갚거나 이런저런 비용을 납부하거나 일반적인 소비 활동을 하는 데 사용된다. 대출받은 돈이 주는 혜택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빚만 남은 채 엄청난 속도로 이자가 쌓여 간다. 그 때문에 빚 상환을 위해 또 다른 대출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경우 대개 (소액 금융 부문이 없애겠다고 선언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게 된다.

    3 드러나지 않는 비용까지 모두 고려하면, 실제 대출 이자율은 공식 명시되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실제로 이자율이 연 30퍼센트 이하인 경우는 드물며 100퍼센트 또는 그 이상도 흔하다. 멕시코의 한 유명한 소액 금융 기관은 최고 연 195퍼센트의 이자를 받는다.

    4 소규모 사업이 이런 이자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높은 수익을 장기간 창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대출 덕분에 사업이 어느 정도 발전했다 할지라도 그 대신 시장의 다른 사업자들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소도시에 월마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많은 소규모 상점이 결국 문을 닫는다. 소액 금융 관계자들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을 닫는 사업체들을 간과하는 얘기다.

    5 빈곤을 벗어나는 사람의 수는 매우 적으며 전반적 빈곤 수준이 완화되었다는 객관적 증거도 발견된 바 없다. 기껏해야 극소수의 경제 형편이 나아질 뿐인데, 소액 금융 기관은 이 운 좋은 소수의 사례를 마케팅 자료로 적극 활용한다. 정작 빈곤 퇴치에 관한 업계의 실질적인 논의는 늘 미미하거나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한두 세대 안에 빈곤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결국 ‘빈곤 박물관’에 진열되는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을 실제로 찾기는 어렵다.

    6 소액 금융 업계는 모든 빈곤층이 미래의 빌 게이츠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소액 대출을 받아서 창업한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최첨단 혁신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시장에 존재하는 제품을 판매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받는 사람이 모두 창업 준비자는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개발도상국 국민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가?

    7 아동 노동이라는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 가고 있다. 사실 노동집약적인 영세 사업을 하는 많은 가정이 자녀를 노동에 투입하고 있으며, 이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나라들(특히 중남미 지역)에서 의무 교육이 확산되고 있는 마당에, 일부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상품 진열대를 정리하거나 휴대전화 카드를 판매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방침을 마련해 둔 소액 금융 은행은 거의 없으며 소액 금융 펀드 중에는 오직 한 곳만 관련 방침을 세워 놓았다. 자율규제 감시 기구들은 자신들의 ‘고객 보호 원칙’에서 아동 노동에 관한 논의는 교묘히 피해 간다.

    8 소액 금융 이용자의 대부분은 ‘극빈층’이 아니다. 사실 상당수가 하위 중산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이다. 시중 은행이 이들에게 합리적인 조건으로 대출을 해 주지 않는 것은 유감이지만, 소액 금융 기관이 그들에게 텔레비전 살 돈을 연 이자율 60퍼센트에 빌려준다고 해서 반드시 개발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9 소액 금융 기관의 고객 대부분은 선진국 국민들과는 달리 소비자 보호 관련 규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10 채무자들은 상호 연대 보증을 설 때, 나중에 상환을 못 해서 일어날 수 있는 곤란한 상황은 간과한다. 상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소액 금융 기관으로부터 극심한 압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친구까지 잃게 된다. 보증을 선 친구가 남은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액 금융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변질되어 이제는 가장 높은 이자율에 가장 큰 수익을 올리는 금융 기관으로 변모했다. 미션 이탈 리스크(소액 금융이 자체 미션을 잊어버린 채 빈곤층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상업적 목표만을 추구하게 되는 리스크)는 소액 금융 기관들 사이에 이미 만연해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빈곤층이 값비싼 대출을 통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속고 있는 동안, 선의의 투자자들 역시 자신의 돈이 좋은 일에 쓰이리라고 속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또한 대외 원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선진 부국의 재화와 기술, 시장, 금융, 전문 지식에 대한 빈국의 의존도를 높이고, 빈국들을 겉포장만 바뀐 고전적인 식민 착취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액 금융 2.0은 기관이 거두는 정당한 수익과 빈민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소액 금융 부문에 투입된 엄청난 자본이 제대로만 쓰인다면 빈곤 퇴치에 훨씬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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