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체포와 탈주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질풍노도①
    2015년 09월 03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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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리핀 좌파운동의 산 증인의 한 사람인 시저 소니 멜렌시오의 1970년부터 2010년까지의 자전적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앞으로 매주 연재할 계획이다. 아시아는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곳이다. 우리 스스로가 아시아에 속해 있음에도 그들의 역사, 그들의 투쟁과 좌절, 승리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에 레디앙은 필리핀 노동운동과의 국제 연대와 교류를 해왔던 국제노동자제교류센터의 석치순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번역한 이 기록을 아시아와의 교류를 위한 작은 다리로 삼고자 게재한다. 자전적 기록이기 때문에 멜렌시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시저 소니 멜렌시오(Cesar Sonny Melencio)는 필리핀의 좌파 운동가로, 고등학교 때 대학생이던 형의 영향을 받아 운동에 참가하게 된 후, 1971년 필리핀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마르코스 군사독재와 계엄령 하의 엄혹한 상황 아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헌신하는 한편, 필리핀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16세이던 1972년에 비합법 지하정당인 필리핀 공산당(CPP)에 입당했다. 이후 CPP의 마닐라 리잘 지역위원회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교육 선전 등을 담당, BMP(필리핀 노동자연대)의 결성에 기여하는 등 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노선과 혁명 전략 등을 둘러싸고 당 중앙과 대립, 1993년에 CPP를 탈당했다. 최근 새로운 좌파 정당인 PLM(노동대중당 ; Party of the Laboring Masses)을 결성해 의장으로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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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20일 목요일 오후, 당시 22세였던 나는 로돌프 아기날도 대장이 이끄는 제5 치안경찰대에 납치되었다. 라오악 시(마닐라에서 약 500Km 떨어진 루손섬 북부에 있는 도시-역자)로부터 철야의 긴 여행을 통해 마닐라에 막 도착한 길이었다. 쿠바오〔마닐라시의 북동에 인접한 케손시 남부의 도시〕에 있는 우리 집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오후 늦게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나는 카티푸난로(路)에서 지프니를 타고 판솔로(路) 모퉁이에 있는 교회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동지들의 아지트까지는 걸어서 얼마 되지 않았다. 전에부터 우리는 아지트가 무사한지 아닌지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우리만 알고 있는 표시를 약속해 두었다. 동지들의 아파트 창에 있는 화분이 깨져있거나 없어졌으면 그것은 군의 수색 내지는 습격이 있었다는 신호였다. 나는 화분이 제대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 동지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 동지들의 아파트는 저층 연립으로, 이웃해 있는 다른 4개 동과 같은 단지 내에 있었다.왼쪽 첫 번째 동에 있는 동지의 아파트로 간 나는 블라인드가 쳐져있는 창 너머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르는 남자들이 방 안에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는 속히 그 자리를 떠나 가장 안쪽에 있는 아파트로 향했다. 잠시 후 3명의 남자가 쫓아와 나를 둘러쌌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태연을 가장하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중 한 명이 왜 남의 집을 들여다 보냐고 물었다. 나는 안쪽에 있는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지나가던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태연히 “로라, 로라” 라고 부르며 가장 안쪽에 있는 집 도어를 노크했다.

도어로부터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항의하는 나를 아까 그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를 벽에 밀어붙인 후 교대로 추궁했다.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그 때 나는 필리핀 공산당 지하신문인 『앙 바얀』 복사판과 아지트에 있는 동지들에게 전해주려던 주요 문건이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건이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처리해야만 했다. 사내들이 일제히 덤벼들어 후려갈기기 시작했고, 나는 마루로 넘어지면서 책장 밑으로 서류봉투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그 봉투를 꺼냈다. 그가 문건 다발 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도시 빨치산 부대 창설에 관한 자료였다.

“이 새끼는 빨치산 부대 멤버다!” 사내가 말했다. 이어 사내는 왜 이 서류봉투를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무슨 봉투 말입니까?” 나는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이거 말이야!” 사내가 문건을 들이대며 말했다. “전 몰라요, 내 꺼 아니라구요!” 나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사내들이 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명이 내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댔다. 섬뜩하고 놀라는 순간 그가 공이치기를 당겨 러시안 룰렛을 시작했다. 방아쇠가 당겨질 때마다 내 몸은 전율했다. 잠시 후 무전기가 울렸다. 누구로부턴가 지시가 내려온 듯했다. 사내들은 내 눈에 눈가리개를 한 후 손을 뒤로 묶어 수갑을 채웠다. 집 앞에서 차가 멎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집밖으로 끌려 나가 대기하고 있던 차에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뒷좌석의 두 사람 사이에 앉혀졌다. 차가 출발하자 옆자리의 한 놈이 내 머리를 차 바닥으로 쳐 박았다. 문득 나는 아서 헨리〔영국의 작가〕의 소설 『머니 체인저』(Money Changer)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한 사람의 등장인물이 납치되어 눈가리개를 한 채 차를 타고 끌려 다니는 장면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차의 주행시간을 어림잡아 자신이 어디쯤 있는가를 추측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해보려 했다. 내가 차에서 내려진 것은 쿠바오나 산톨란 거리 어디쯤이 아닐까 짐작했다.

여전히 눈가리개를 한 상태로 나는 어느 건물 2층으로 끌려들어갔다. 에어컨이 가동 중인 방으로 끌려 들어서자 눈가리개와 양 손을 묶은 포박이 풀려졌다. 그 방은 어두침침했기 때문에 나를 납치한 사내들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방 한가운데 있는 책상 앞에 앉혀졌다. 잠시 후 보디빌더처럼 단단한 체격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는 책상 위의 전등을 켜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 낮은 위치로부터의 조명을 보면서 나는 형사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렸다. 가련한 포로에게는 반대 측에 앉은 심문자의 얼굴이 아랫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장면 말이다.

근육질의 사내가 위압적으로 나를 심문했다.

“아까 네가 들어가려던 방에는 누가 살고 있어?” “너의 당 동지들은 누구누구고 어디에 있나?” “트리닝 에레라를 아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트리닝을 비롯한 도시빈민운동의 리더들도 이번 제 5치안경찰대의 톤도 지구 일제 수색으로 체포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 정체를 물었다. 나는 계속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고 변명하면서 가명을 댔다.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한 안쪽 끝 집에 사는 사람은 나를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아파트에 누구를 만나러 간 거야?” 사내는 거친 목소리로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말을 바꿔 대답했다. “실은…. 오랫동안 못 본 고향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친구가 거기 산다는 걸 뒤늦게 알았거든요” “그 친구가 누군데?” 남자는 다시 물었다. 머릿속에 있는 이름들을 적당히 조합해 대답하자 심문자는 주먹을 쳐들며 욕을 퍼부었다.

“거짓말 작작해, 이 새끼야” 그리고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진짜 이름은 소니 멜렌시오! 조직명은 「BJ」, 필리핀 공산당 마닐라 · 리잘 지역 조직 소속으로 필몬 라그만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 지금 장난쳐?”

필몬 라그만은 당시 지하에 잠복해 있던 필리핀 공산당(CPP) 마닐라 · 리잘 지역 위원회의 위원장 혹은 서기장이었다.

필리핀1

1970년 학생들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 자료사진 (출처 fqslibrary.wordpress.com)

아기날도 대장

체격 좋은 이 심문자가 활동가들에 대한 고문이나 학살로 악명 높은 제5치안경찰대 로돌프 · 아기날도 대장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 끔찍한 사건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거짓말에 격노한 아기날도는 일어서더니 벽의 책장에서 나에 관한 「조사기록」이라는 한 권의 파일을 꺼냈다. 그 중에서 한 장의 용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가장했다. 거기 쓰여 있는 정보는 모두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기날도는 나에게 펜과 종이를 건네주며 지하활동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쓰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는 필몬 라그만의 소재와 마닐라 · 리잘 지역 본부 지도부에 대해, 또 프란시스코 네멘소나 챠리토 플라나스, 그 외의 몇몇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도 빠짐없이 적을 것을 요구했다. 네멘소는 당시 필리핀대학 교양학부장이었고, 플라나스 변호사는 마르코스 일족, 특히 이멜다 마르코스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였다. 아기날도는 이러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엮어서 체포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뭘 쓰라는 겁니까, 저는 필몬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 나는 초조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보타스 시〔마닐라 북쪽에 있는 도시〕에 같이 살고 있는 양친의 주소뿐이라고 덧붙였다(실은 양친과는 같이 살고 있지 않았지만, 나의 납치에 대해 아무도 모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놈들이 알려주었으면 해서였다). 나보타스의 집을 수색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몇 사람의 동지들이 우리 집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이 또한 거짓말로, 나는 몇 년 전부터 본가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기날도는 내 셔츠를 움켜쥐고 주먹을 쳐들었다. 내가 협조하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다며 겁을 주었다. 그리고는 도어를 열어 바깥쪽 거실 같은 곳에 모여 있던 남자 몇 명을 불렀다. 그러자 한 남자가 목을 졸라 죽이려는 듯 내 목에 줄을 감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들은 비아냥거리며 만약 입을 열지 않는다면 골로 보내주겠다는 등 한마디씩을 던졌다. 그들 대부분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운명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 사건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를 납치한 자들 가운데 몇 명이 「국군개혁운동(RAM)」의 지도자가 되었다. 국군개혁운동은 1986년의 제 1차 「엣사(EDSA)혁명」〔1986년의 피플파워 혁명. 시위가 전개됐던 거리 이름(엣사 대로)을 따서 명명〕과 마르코스 독재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된 군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제1차 엣사 혁명 후, 아기날도는 대령이 되고 그 후 국회의원까지 되었지만, 2001년 6월 12일, 그 거친 삶의 궤적에 걸맞게 고향인 뚜게가라오에서 신인민군 게릴라부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치게 된다.

아기날도는 시간을 줄 테니까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쓰라고 명령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들이 벽 틈 사이로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임을 알고 있던 나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후회하고 있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하얀 종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 아기날도가 다시 방에 돌아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내 종이를 보더니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나를 방에서 끌고 나가 옆방에 밀어 넣었다. 한 남자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군의관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 혈압을 잰 후 옷을 벗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몸을 첵크했다. 이제부터 시작될 고문에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를 검사하는 것인 듯 했다.

고문

나는 다시 눈가리개를 한 채 그 건물에서 끌려나왔다. 그리고는 차 트렁크에 쑤셔 넣어졌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없게 되어 끌려가는 장소를 추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내가 끌려 온 곳은 케손 시 교외의 사마르 가(街)와 보로메오 거리의 교차점에 있는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들 중의 한 건물이었다. 그곳은 군의 「안가」로, 군 첩보부대가 활동가들을 처형하기 전에 고문하고 감금하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운이 좋은 활동가는 거기서 감옥으로 보내지는 수도 있었다.

나는 눈가리개를 한 채 건물 2층으로 끌려 올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불문곡직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됐다. 한 놈이 두드려 패고 다른 한 놈은 계속 발길질을 해댔다. 또 다른 한 놈이 곤봉으로 정강이를 내리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아는 동지의 이름이나, 그들이 있는 곳을 불게 하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한참 후 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누군가가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더니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플래시 불빛을 비춰주면서 보라고 했다. 그것은 포포이, 즉 필몬 라그만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이었다. 이 때 고문자들이 했던 말이 나중에 우리 동지들 사이에 두고두고 웃음거리의 안주가 되었다.

엄혹한 상황 속, 즐거웠던 한 때

여기서 잠깐 이야기의 분위기를 바꿔보자. 삶에서 체험한 극도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즐거웠던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고문자가 포포이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빈정거렸다.

“야 이 병신 새끼야, 이런 못생긴 새끼의 쫄따구 노릇이나 하냐! 너처럼 잘 생긴 놈이?”

나는 놈들로부터 도망친 후 동지들에게 “내가 고문당한 것은 사상이나 신념 때문이 아니고 「추남」하고 같이 논 것 때문”이라고 조크를 했다. 포포이가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땐 너도 해골처럼 삐쩍 말라서 조금도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어! 사흘 굶은 사람처럼 뼈만 남은 데다 눈가엔 기미 투성이었고….”

그러면서 포포이는 내 몰골이 당시 묘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비슷하다면서 나를 마닐라 수도권의 묘지 노동자 조직 담당으로 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영화 『죽은 자를 살리지 마라』가 상영되고 있었고, 주연은 인기 스타였던 제스토니 알라콘이었다. 내가 계속 포포이의 못생긴 얼굴에 대한 농담을 하자 포포이는 “그래 잘났어! 너 제스토니 닮았다고 치자, 하지만 제스토니는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거야” 라며 반박했다. 나는 “오케이, 그래도 난 제스토니 할 거야” 라고 맞장구쳤다.

포포이와 나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건 포포이가 논쟁에서 나를 논박하며 몰아 부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물고문

납치된 첫 날은 철야로 고문이 이어졌다. 두들겨 맞아 내 몸은 마비되었다. 그런데 두세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통증이 사라지고 맞아도 별로 느낌이 없어졌다. 나는 구타를 당할 때마다 2,3미터 정도 떼굴떼굴 굴렀다. 이렇게 두세 번 구르면서 잠시라도 숨을 돌리면서 시간을 벌고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이것은 몇 년 전 「에셍」 동지가 체포되어 고문 받았을 때 써먹은 방법이라며 알려준 요령이었다(제9장 참조). 고문자들 역시 이때쯤에는 구타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를 발가벗긴 후 매트리스 없이 철제 스프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침대에 눕히고는 네 기둥에 몸을 묶었다.

물고문의 시작이었다. 타올을 얼굴에 얹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물은 침대 밑에 놓인 양동이로 떨어졌다. 그러나 물의 대부분은 내 코로 들어갔고, 지독한 아픔이 머리를 찔렀다. 머리의 아픔과 함께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하는 끔찍한 고문이었다. 고통을 못 이겨 의식불명을 가장하자 놈들은 물을 붓는 것을 중지했다. 그리고는 곧 내 뺨을 때리며 물고문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나를 소생시키려 했다. 이 물고문 사이사이에 다른 고문자가 불붙은 담배를 내 페니스와 몸 여기저기에 대고 지졌다. 나는 그조차 의식하지 못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네 몸을 재떨이로 만들었다”고 하는 얘길 듣고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고문은 꽤 처참한 것이었으나 나는 나보다도 더 심한 경우를 당했던 동지들을 떠올리면서 견뎌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이번 사건이 있기 전, 먼저 경험했던 동지들로부터 전기고문이나 성기 지지기 고문, 성폭력 등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고문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어떤 동지는 달궈진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도 선배 동지들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이 견뎌낼 수 있었다면 나도 해낼 수 있다”고 자신을 달구질했다.

다음날 아침 고문이 중단되었다. 나는 눈가리개를 하고 침대의 기둥에 묶여진 채 방 가운데 혼자 남겨졌다. 온 몸을 쑤시는 통증과 고통으로 하루 종일 고열에 시달렸다. 한 사내가 들어와 억지로 커피를 마시게 했다. 또 다른 사내들이 지하조직과의 연결고리를 대라며 끊임없이 추궁했다. 자신을 군 장교라고 말한 한 놈은 민다나오 섬에서의 전투에 대해 울화를 터뜨렸다. 자기 친구가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과 민다나오에서 싸우다 전사했다며 내 머리를 여러 차례 때리고 배에 펀치를 먹였다. 당시 모로 민족해방전선은 민다나오에서 모로 민족의 자치권 획득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잡혀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문이 이어졌다. 첫 날 밤이 가장 지독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정신적인 고문으로 바뀌어져 갔다. 예를 들면 “네 친구들은 이미 군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따위였다. 이는 물론 거짓말로 그들의 상투적인 심리작전이었다. 그러다가도 한밤중에 누군가가 느닷없이 들어와 얼굴과 머리, 그리고 신체 중 데미지를 입을 수 있는 곳을 골라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곤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괴물은 사라졌다…..

인간의 정

나는 인간의 정이 그리워졌다. 잠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할 것 없이 그에 대한 상상을 했다. 내 삶 속에서 겪은 인간적인 정의 작은 기억들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 빨래를 해주신 것, 친절한 이웃이 집에서 만든 생선요리를 나누어준 것, 나이 든 동지 에셍이 내 옷을 다리미질 해 준 것, 오르그 활동을 하고 있던 나에게 생선 행상이나 빈민가 사람들이 간식거리나 음료수를 주던 일 등등… 수많은 사연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집회 때 성금을 내거나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주던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이런 공상에 잠기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것을 통해 나의 이성은 겨우 정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를 감금하고 있는 놈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신념이 더 깊어졌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이 때로 짐승으로 변해 고문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체포되어 있는 동안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내가 겪고 있는 일 그 자체가 악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은 도망치고 난 후였다.

나는 인간적인 정이나 연대감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탈출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탈출계획을 짜내기 시작했다. 내 관찰에 의하면, 아침에는 조용했고, 안가를 지키는 자도 한두 명밖에는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많은 수의 첩보요원들이 우글거렸다. 계단 아래에서 사내들이 술에 취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가끔은 여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2~3명의 술에 취한 사내들이 느닷없이 내 방에 들어와서는 나를 구타하기도 했다.

나는 혼자가 되는 낮 동안, 침대에 앉아 침대 옆에 있는 창을 관찰했다. 창은 신문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바람이 부는 날은 신문지가 날려 창밖 풍경이 잠깐씩 보이는 수가 있었다. 아침에는 차의 흐름이 서쪽으로 향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망가는 길은 서쪽이다! 서쪽이야말로 자유로의 탈출구라는 것을 머리에 새겨두었다.

탈주

납치된 지 11일째가 되는 날 아침, 식사를 갖다 준 감시요원에게 수갑이 너무 세게 조여져 오른쪽 손목이 부어올랐다고 호소했다. 감시원은 수갑을 약간 느슨하게 조절해주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오른손을 수갑에서 빼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 기둥에 가죽벨트로 묶여져있던 내 왼쪽 손도 풀었다. “지금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수갑을 다시 채울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놈들에게 걸리면 더 심한 고문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다른 방들과 이어지는 복도가 있었다.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나가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1층에는 주방이 있었고 요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이 열린 방이 보였다. 그 방으로 들어서자 그곳은 바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베란다로 이어져 있었다.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나는 베란다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바로 그 순간, 자가용 지프니 한 대가 안가 앞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들켰다고 생각했다. 베란다 손잡이 뒤로 몸을 웅크리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차에서 내린 몇 명의 남자들이 감시요원들과 큰 소리로 무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남자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별로 높지 않은 높이였으나 오랜 감금과 고문으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오른쪽 발목을 삐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오직 서쪽으로 서쪽으로 정신없이 달렸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도로 폭이 넓어지고 차들이 달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들로 혼잡한 티모그 가(街) 사거리에 서 있었다. 다가오는 차들에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심장이 요동쳤다. 놈들이 이미 나를 쫓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 채 택시는 좀처럼 서 주지 않았다. 시간이 빠르게 경과하고 있었다. 차의 흐름을 막아보려 길 한복판에 뛰어들었지만 차들은 용케도 나를 피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약중독자처럼…

이때 나는 자신의 행색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우선 나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잡혀있던 어느 날 밤, 나는 방 밖에서 감시원이 내 가죽 구두를 신고 왔다 갔다 하면서 “괜찮은 구두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머리는 헝클어진데다 얼굴은 마치 해골처럼 흉악한 몰골이었다. 거리를 헤매는 마약중독자,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 한 대가 속도를 떨어트렸다. 남자가 운전을 하고 부인이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나는 무조건 덮개가 없는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남자는 나를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깡패를 만나 구두도 지갑도 책까지도 다 털렸다고 대답했다.

태워주긴 했으나 내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본 이 부부는 점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남자는 자동차의 스피드를 올리면서 집사람이 두려워하니까 곧 내려달라고 말했다. 티모그 가(街)와 케손로 교차점에서 차를 세운 남자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나는 그 부부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고,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라타 서둘러 쿠바오의 주소를 택시운전사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운전사도 내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듯, 먼저 택시비를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집에까지 가면 「마마」가 지불해 줄 거라고 말했다. 부잣집 아들인 것처럼 일부러 「마마」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운전사를 안심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운전사가 신경이 쓰인 것은 택시비만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던 그는 트러블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며 택시비를 안 내도 좋으니 내려서 다른 택시를 타라는 것이었다. 운전사는 쿠바오의 엣사로와 트와종 거리의 교차로에 있는 초소에 차를 세웠다.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교통경찰을 가리키며 경찰에게 사정을 얘기하라면서 택시에서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내가 내리자마자 택시는 잽싸게 사라졌다.

내 이야기를 들은 경관은 나를 그야말로 마약중독자로 판단한 듯 했다. 이 때 그가 한 말이 이 사건에 대한 또 한 가지 얘깃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허우대는 멀쩡한 양반이 마약으로 인생을 망치면 되겠어!”

나는 초조해졌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쯤 군 첩보부대는 나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대로 한 복판에서 경찰과 함께 있는 황당한 상황이니 말이다.

내가 다리를 쩔뚝거리자 그 경찰은 내 왼쪽 발목이 검게 부어올라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초소 가까이에 있는 콘크리트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서 말했다.

“일단 다른 택시를 잡아주겠소”

경관은 나를 태워주지 않으려는 택시 운전사들을 큰 소리로 욕하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운전사와 차장에게 태워줄 것을 명령했다. 그 버스에는 승객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16번 거리의 교차로에서 버스를 내렸으나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왼쪽 발목이 상당히 부어올라 서 있기조차 힘든 지경으로, 걸음을 뗄 때마다 넘어지곤 했다. 지나가던 두 사람이 나를 부축해 걷는 것을 도와주었다. 목적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운 좋게 택시가 지나갔다. 나를 부축해주던 남자가 택시를 세워주었고, 나는 겨우 아지트로 갈 수 있었다.

도피

그 후는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 때 아이를 임신 중이던 집사람과 재회했다. 집사람은 군으로부터의 추적을 피할 수 있도록 나를 메트로 마닐라〔마닐라수도권〕의 다른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2~3주간 계속해서 도망을 다녀야했다. 군의 일제수색으로 많은 당 조직의 활동이 중지되어 지하조직과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필리핀 공산당 마닐라 · 리잘 지역 위원회의 캡이었던 포포이 동지의 지시로 나를 데리러 온 한 여성 동지가 지팡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은 내가 시골에 숨어 있을 때였다. 발목의 붓기는 좀처럼 빠지지 않아 그 지팡이를 마닐라에서 약 4개월이나 사용해야만 했다.

고문을 받는 동안 귀를 얻어맞은 것 때문에 몇 개월이나 이명이 계속됐다. 그리고 나는 동지들의 이름이나 주소,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납치되기 전까지는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문을 당하더라도 일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중압감이 비밀사항을 기억하고 있던 뇌 회로의 일부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다친 발목은 그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나 장거리의 보행에는 항상 절뚝이며 걷게 되었다.

탈출한 이후에도 한동안 흥분상태가 이어졌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는 환희도 있었지만, 그보다 내가 구속 중에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은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들, 또는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나를 돌봐 준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배려와 따뜻한 정 속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지들의 투쟁에의 헌신을 보면서, 또 권리와 정의, 그리고 보다 나은 생활과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묵묵히 투쟁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다시 인간에 대한 신뢰를 확신할 수 있었다. <계속>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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