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진핑과 장쩌민
    옛 권력과 현 권력의 충돌
    [중국과 중국인] '법치'와 '인치'
        2015년 09월 02일 09: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시진핑(习近平)과 장쩌민(江泽民)의 갈등에 대한 국내외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중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얼마 전 사법 당국에 공식으로 기소된 전 정치국 상무위원 조우용캉(周永康)을 비롯해 그의 측근들이 줄줄이 의법 조치 되었으며, 최근에는 장쩌민과 그의 심복으로 알려진 쩡칭홍(曾庆红)의 가족들에 대한 소환설까지 나돌면서 신구 권력 간의 갈등설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중국정치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곡해하는 지름길이다.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을 현실 문제에 여전히 개입하려는 전임 권력자와 전권을 행사하려는 현 권력자 사이의 개인적 갈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중국의 정치 관행의 변화에서 오는 갈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약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을 개인 대 개인의 갈등으로 파악하면, 우리는 시진핑 퇴임 후 시진핑과 시진핑 후임자 사이에 발생하는 권력 투쟁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

    장쩌민은, 중국정치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치(人治)에서 법치(法治)로의 전환이 막 시작한 시기에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고, 시진핑은 중국 정치에 법치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에 권좌에 올랐다. 법치의 출발점이었지만 당 원로들의 현실 개입에 익숙하고 어느 정도 몸에 밴 장쩌민과, 전임인 후진타오(胡锦涛)의 전권이양과 정치 불개입 선언으로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진핑의 갈등은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진핑 장쩌민

    시진핑(왼쪽)과 장쩌민

    1989년 발생한 “6.4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갑작스레 최고 권력자가 된 장쩌민은 떵샤오핑(邓小平) 등 당 원로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권력을 다졌고 동시에 천윈(陈云, 1995), 떵샤오핑(1997) 등 당시 당의 양대 주주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재임기간(1987~2012. 총서기 외에도 중앙군사위 주석을 유지한 기간 포함)은 물론 은퇴 후에도 중국정치의 핵심 권력자들의 사무실이 집중해 있는 종난하이(中南海, 천안문 광장 서쪽에 위치)와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중앙군사위원회 건물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후진타오 집권 마지막 해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장쩌민의 지나치게 강한 권력욕이다. 그는 떵샤오핑처럼 은퇴 후에도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후임인 후진타오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실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총서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후진타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진타오의 직계인 현 총리 리커챵을 장쩌민 세력이 거부하는 대신 시진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시진핑과 장쩌민은 한 배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더 이상의 현실 정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당-정-군의 모든 직위를 시진핑에게 전면 이양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후진타오의 전권 이양과 은퇴 간부의 현실 정치 불개입 요구는 당의 전현직 고위 간부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시진핑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조치였다.

    시진핑과 후진타오의 연합은 장쩌민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결국 시진핑 집권 전후에 불거진 보시라이(薄熙来)-조우용캉을 통한 시진핑 제거 계획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시진핑 역시 반부패의 기치를 들고 장쩌민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시진핑 집권 후 당-정-군에서 부패로 낙마한 인물들의 면면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시진핑과 후진타오 연합의 힘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조우용캉과 인민해방군의 실세였던 전 군사위 부주석 두 명(궈보숑(郭伯雄)과 쉬차이호우(徐才厚, 사법처리 직전 암으로 사망))이 모두 낙마했고, 이제는 칼날이 장쩌민과 쩡칭홍 일가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을 단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시진핑의 반부패운동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2014년 초 시진핑, 후진타오, 떵샤오핑 등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가족이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설립하고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유출했다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발표가 있었다.

    이들 최고위 지도자들과 그들 가족에 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중국에서도 아주 한정되어 있다.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정치를 쥐락펴락했던 장쩌민도 적지 않은 대비책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문가들이 시진핑 등의 조세회피처를 통한 자본유출 사건을 장쩌민의 시진핑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중국정치에서 부정축재에 자유로운 인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개혁개방의 최대 수혜자가 당-정 고위 간부들이라는 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반부패운동의 집행자들 역시 반부패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이 시진핑의 반부패운동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당-정-군의 중견 간부들 및 기층 간부들에게서 반부패운동에 대한 피로감과 편향성에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이 어떤 모습으로 결말을 맺을지 쉽게 장담하기는 어렵다. 시진핑이 칼자루를 쥐고는 있지만 변수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인물을 직접 처벌하는 것은 당의 위상과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아들들에 대한 간단한 처벌과 장쩌민의 정치 불개입 확약 또는 다음 당 대회에서 장쩌민의 텃밭인 샹하이(上海) 당위원회 서기의 양보 등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두 인물(또는 두 세력)의 갈등의 결말이 중국정치의 변화에 어떻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가이다.

    필자소개
    중국의 현대정치를 전공한 연구자. 한국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