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 기름 묻히기 싫다'
    [왼쪽에서 본 F1]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2015년 08월 25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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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오스트리아에 열네 번째 생일을 맞아 할아버지가 선물해준 돈을 모아 낡디 낡은 폭스바겐 쿠페 한 대를 산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자동차가 생긴 소년은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까요?

    따로 자동차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네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첫 차를 갖게 된 소년이 한 행동은 놀랍게도 ‘자동차를 분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곧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낡은 자동차를 엔진까지 완전히 분해했고, 이를 다시 조립하기까지 2년이 더 걸렸습니다.

    자동차를 좋아했고 그래서 자동차를 더 알고 싶었던 소년은 그렇게 ‘자동차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십 대 중후반에는 자신의 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차를 정비하는 일을 하기도 했죠. 이 소년에게 자동차란 장식장에 박제된 장식품이 아니라, 손에 기름을 묻히고 분해하고 조립하며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친구였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니키 라우다, 바로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러시( 우리나라에서의 제목은 ‘러시:더 라이벌’ )’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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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1 코리아 그랑프리 당시 한국을 방문한 니키 라우다 ]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가 낯설지 않을 듯합니다. 차를 좋아하는 시작은 차를 더 잘 알아가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차를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여기저기 살펴보고 뜯어보는 것일 테니까요. 50년 전이든 요즘이든, F1 드라이버든 일반인이든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손에 기름을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차를 뜯어보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별도의 작업 공간으로서의 차고를 가질만한 ‘공간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 이야기는 니키 라우다의 어린 시절 얘기와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손에 기름 묻힌다.”

    왜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을 저렇게 얘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런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어르신들에게 ‘공장 노동자’를 상징하는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은 왠지 꺼리게 되는, 자녀가 있다면 선택하게 하고 싶지 않은 직종으로 여겨졌던 것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가끔은 직접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을 하고 있거나 노동자 편에 서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식 손에는 기름을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지만, 적어도 자동차 정비업소나 공장 노동자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필요 이상으로 우러러보는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 듯하고요.

    어떻게 보면 자동차를 정비하는 분들이 차의 입장에서는 의사 선생님이고, 나와 가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분들이란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관점으로 본다면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 노동자 여러분은 산부인과 의사나 산파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고마운 분들인 셈이죠.

    무엇보다 차를 좋아한다면 손에 기름 묻히는 것을 싫어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는 고가의 장신구 정도로 여기지 않는다면, 정비업소에서 뒷짐 지고 하인 부리듯이 정비사를 대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차를 좋아할수록 보닛을 많이 열어 직접 엔진 룸을 살피고 부품들을 만지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손에 기름을 묻히며 그 과정을 즐기게 될 테니까요. 제원을 외우고 가격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부품을 만지고 기름 냄새에 익숙해지는 것이 ‘차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동차를 좋아하고 차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은 엄청난 고액 연봉을 받는 F1의 스타 드라이버나 일반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니키 라우다가 소년 시절 자동차를 분해하던 50년 전이나 지금의 상황 역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F1 드라이버들도 기회가 된다면 손에 기름 묻히는 것을 마다치 않습니다. 이미 스타덤에 올라 있던 세바스찬 베텔이 2009년 작은 카트 레이스 이벤트에 참가해 자신의 카트를 직접 정비하고 스타팅 그리드로 직접 카트를 들어 옮기는 모습이 포착된 것도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라우더

    [ 카트 레이스를 앞두고 타이어 공기압을 직접 점검하고 있는 세바스찬 베텔 ]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미하엘 슈마허는 10대 중반에 여섯 살 어린 동생 랄프의 카트 엔지니어로 한동안 정비를 도맡았습니다. 따로 정비해줄 사람을 구할 여력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충분히 차를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차와 정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훗날 위대한 챔피언을 만드는데 분명히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물론 슈마허의 경우라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갔을 법한 길을 간 것뿐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F1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미하엘 슈마허가 그랬고, 현역 드라이버 중 가장 뛰어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베텔이 그랬다면, ‘손에 기름 묻히는 일’에 대한 일부 잘못된 인식은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손에 기름 묻히기 싫어하는 분들 대부분이 자동차나 기계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없었거나, 공장 노동자 혹은 정비사 등에 대해 심한 편견에 쌓여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이 편견이었다면 어떻게든 깨뜨리는 것이 좋겠죠.

    ‘노동의 신성함’이나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의 고귀함’에 대해서 진지함 200%의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차를 정말 좋아한다면 손톱에 기름때가 끼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질 때가 올 수도 있단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재밌으면 누가 손에 기름 묻히지 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이야 천만 원이 넘는 큰돈을 들여 차를 사고도 보닛 한 번 열어보지 않는( 때로는 여는 방법조차 모르는 ) 분들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앞으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차를 좋아하면서 왠지 손에 기름 묻히는 것을 꺼렸고, 노동자의 편에서 생각한다면서도 내 자식만큼은 손톱에 기름때 묻히고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필자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얘기는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네요.

    보고 듣고 자란 환경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보다는, 손에 기름을 묻히든 안 묻히든 ( 좋아하는 기계를 만지면서 ) ‘행복한 노동으로 땀 흘리며 사는 것의 가치’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 자식만큼은 그런 노동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도록 가르치고 키우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훌륭한 F1 드라이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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