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한 여성 정치인의 투쟁
    [책소개] ≪싸울 기회≫(엘리자베스 워렌/ 글항아리)
        2015년 08월 15일 01:30 오후

    Print Friendly

    한 여성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그러나 그 이야기는 곧 미국인들을 수천 개의 칼날에 베여 죽게 한 금융계의 부패를 드러내며 그 막후에서 어떤 정치적 거래와 공격적 책략들이 오갔는지 거침없이 해부해낸다.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거론될 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워런의 이 책은 워싱턴 정계와 월가의 속모습을 남김없이 파헤치며 한 사람의 신념과 행동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워런, 그녀를 기억하라!

    엘리자베스 워런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진보 정치인 중 한 명이며, 매사추세츠 주에서 선출된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다.

    2016년 민주당 차기 대권 주자로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녀는 힐러리 클린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될 정도이며, 최근 힐러리가 진보 친화적 정책을 내는 것도 워런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워런은 매년 『타임』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세 번이나 올랐으며, 『뉴스테이츠먼』에는 “미국 최고의 진보주의자 20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대체 워런이 누구이기에 이처럼 역사의 전경에 나타나 그동안 미국 역사가 보여주지 못했던 지도적 인물의 새로운 전형을 일궈내고 있는 것일까?

    워런을 알려면 먼저 최근 미국의 경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급속하게 악화되었고, 이런 탓에 투자자들은 저위험 고소득 투자처를 찾아다녔는데 마침 그 조건에 들어맞는 시장이 있었다. 바로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이었다.

    대출 회사들은 높은 수입을 단기간에 올리기 위해 서브프라임 등급에도 거침없이 대출을 승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고, 이로 인해 대출 회사가 파산하고 대형 은행들 역시 파산 위기에 놓였다. 그 여파로 미국 중산층의 튼튼했던 집은 지붕이 내려앉고 창문이 박살나는 것과 같은 몰락을 겪었고, 세계경제는 암흑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이때 워런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는데, 그러나 이는 미국의 중산층이 몰락하고 파산해 진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파산법’ 전문가인 법학자로서 정부 정책에 가담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제 매년 80만 명이 넘는 가족이 파산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26초 간격으로 새로운 사람이 파산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런 일이 매시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에서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고 있는 데다 그게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전투에 나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2007년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의 검토위원회로 임명된 후, 그녀는 막대한 공적 자본이 부도 직전의 대형 은행에 부당하게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앞서 1995년 워런은 새 파산법 개정안을 위한 파산법 검토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잠시 정계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은행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새 파산법을 발의해 파산 보호 범위를 줄이려 했던 것이다. 그에 맞서 그녀와 검토위원들은 기존 파산법을 보호하고 개정하려 했지만 결국 새 파산법은 통과되고 말았다. 그러나 워런은 패배를 경험한 뒤에도 싸우려는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이러한 성과가 12년 뒤인 2007년에 드러난 것이다.

    이 일화는 싸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임하는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기세를 몰아 그녀는 소비자보호금융국을 설립하고 민주당 소속으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워런은 ‘월가의 총아’라 불리던 경쟁자 스콧 브라운을 큰 표차로 누르고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지금 워런은 민주당 내 진보 세력의 상징으로 불리며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한 엘리트 여성의 성공담이자 여성 투사의 이야기인 듯 들리는데, 사실 그녀에게는 수면 아래에 잠겨 한평생을 소시민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생각과 삶은 매해, 매순간 깨고 한발 앞서 내딛음으로써 인생을 점진적으로 바꿔간다. 그리고 수많은 점들이 쌓여 몇십 년 후에는 이것이 그녀 삶에서 급진적 전환을 이뤄내며 한 국가의 역사에 무한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싸울기회

    싸움의 발판은 어떻게 마련되었나

    워런이 열두 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후 서서히 가세가 기울어갔다. 워런의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취직을 해야 했다. 면접을 보러 가면서 그녀의 어머니는 꼭 끼는 드레스와 사투를 벌였는데, 눈물이 흘러나오면 흐르게 두지 않고 티슈로 닦아냈다. 하이힐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안해도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싸움을 목격한 것이다. 워런은 그 순간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도 살기 위한 싸움을 시작해 보모, 웨이트리스 등 온갖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워런은 곧 눈을 돌려 더 높은 곳과 싸울 기회를 찾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에 가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뒤 다시 법대에 지원하는 등 꿈을 좇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실패도 뒤따랐다. 남편 짐과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딸 어밀리아와 아들 앨릭스는 워런이 맡았고,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워런이라는 성을 남겨두었다. 워런은 이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결정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파산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는 가난하니까 절대로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자신은 그와 반대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기억 때문에 오히려 경제학을 파고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파산법을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워런은 파산 신청을 하는 자들은 게으름뱅이라는 편견을 깨고 평범한 사람 누구나 파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워런의 개인적인 서사에서 비롯되지만 단순히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이라는 사람이 형성된 계기인 것이다. 차후 워런에게 싸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런 경험들은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되며, 그녀가 월가의 대형 은행들에 맞서는 거대한 싸움의 발판이 된다.

    월가의 저격수가 되어……

    워싱턴 정계에서 워런은 크게 한 번 패한 적이 있었다. 1995년의 파산법 검토위원회 활동이 그것이다. 당시 파산법에서 파산 보호 범위를 늘리느냐 줄이느냐를 두고 검토위원회와 대형 은행은 팽팽하게 맞섰다. 10여 년을 끌었던 싸움은 검토위원회의 패배로 끝났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병으로 잃고, 가까웠던 이모가 세상을 떴으며, 그녀를 검토위원회에 합류시켰던 마이크 시나 의원과 핵심 투사였던 폴 웰스톤 의원이 죽었다. 반려견 페이스도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런은 의연히 일어나 대형 은행들과 맞섰다. 패했어도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2007년 다시 싸울 기회가 왔다. 해리 리드 의원에게서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 TARP의 감독위원회인 COP에 합류하지 않겠냐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워런은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데 이어 2008년 9월 세계 금융위기가 미국을 강타했다. 미국 정부는 금융 시스템 정상화를 위해 긴급 구제 자금을 투입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TARP를 꾸렸다.

    TARP는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모기지 위기를 진압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해놓았고, 워런이 합류한 COP는 TARP를 관리·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COP에는 실권이 없었다. 증인 소환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고서 제출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TARP의 수장이자 재무부 차관보인 닐 카시키리가 COP에 대형 은행의 긴급 구제는 이미 끝났다고 거짓말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바로 옆 사무실에서 시티은행에 200억 달러를 지급하고 3060억 달러를 보증해주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재무부가 실권 없는 COP를 명백히 무시한 처사였다.

    ‘시티의 주말’로 불렸던 이 사건을 통해 워런은 TARP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TARP는 대형 은행을 살리기 위한 프로그램이란 것을. 그녀는 2주 동안 1차 보고서를 완성해 의회에 제출함과 동시에 유튜브와 웹사이트에도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기세에 힘입어 워런과 COP는 첫 공청회도 열었다. 그러나 COP를 무시하는 재무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 COP는 2차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중과 매스컴은 재무부를 공격했지만 당시의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은 돌연 장관직을 사임해버렸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대마불사가 있었다.

    ‘거대 자본을 보유한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는, 대형 기업이 쓰러지면 국가 경제가 커다란 타격을 입기 때문에 국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이를 막으려 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일례로 세계적인 보험 회사 AIG가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 정부가 국민의 혈세로 막대한 TARP 자금을 투입한 바 있다.

    워런과 COP에 이런 거래가 공공연히 벌어지는 걸 막을 권한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이 알 수 있도록 매달 보고서를 썼고 청문회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이를 통해서 미국 내에서는 진정한 금융개혁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압박을 이기지 못한 정부는 대형 은행들에 쏟아 부은 공적 자금을 전부 회수했다. 대형 은행이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다윗 워런이 멋진 일격을 날린 셈이다.

    중산층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COP로 활동할 당시, 워런은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바로 소비자를 위한 금융기관의 설립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정부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소비자 대출 관리의 책임은 연방 정부 기관에 흩어져 있었다. 또 이런 기관의 재정 자금은 대형 은행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엄격한 관리와 감독은 이뤄질 수 없었다.

    워런이 원한 것은 모든 소비자 대출 기관을 통제·감독·규제하는 제대로 된 정부 기관이었다. 워런은 이 금융기관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을 모았다. 그중에는 금융개혁안을 준비하는 바니 프랭크 의원도 있었다. 워런은 그와 손을 잡고 해당 법안에 소비자 보호 기관 설립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대형 은행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로비스트를 고용해 의원들을 포섭해나갔다. 은행가들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소비자 보호 기관을 없애거나, 혹은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만들거나. 하지만 소비자 단체들이 행사하는 압력과 할리우드를 위시한 대중의 크나큰 지지에 힘입어, 소비자 보호 기관 관련 조항이 포함된 도드 프랭크 법안이 마침내 통과되었다. 워런이 원하던 소비자보호금융국이 창설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 있었다. 소비자보호금융국의 국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 자리를 둘러싸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워런의 임명을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원과 은행가들이 불안해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임명 과정이 지지부진할 것이라는 이유를 내놓았다. 결국 대통령은 한발 물러서서 그녀를 ‘재무부 장관 특별고문이자 대통령 보좌관’에 임시 임명했다.

    소비자보호금융국의 출범을 담당하게 된 워런은 먼저 소비자불만상담 서비스부터 개선했다. 신고를 접수한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기존 방식을 버렸다. 이제 소비자는 온라인으로 신고를 접수하고 결과를 신속히 받아볼 수 있었다. 접수 사항은 해당 은행으로 바로 전달되었고, 그 과정은 모두 소비자보호금융국의 관리 하에 진행토록 했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공개해 신용대출 시장을 개선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했다.

    그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군인 대출 문제였다. 워런은 홀리 퍼트레이어스를 기용해 군인 대출서비스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문제들을 감독하게 했다. 그리고 대출 계약서 양식을 최대한 압축시킨, 한 장짜리 대출 계약서를 만들었다. 이전까지의 대출 서류들은 너무나 복잡했고 양이 많았다. 이 서류들에 대해서 대출업체들은 기계적인 서명을 요구했고, 많은 이가 자신이 어떤 서류에 서명했는지도 모른 채 자산을 압류당했다.

    워런을 위시한 소비자금융보호국은 새로 만든 대출 양식을 웹사이트에 공개한 뒤 투표에 부치고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이 양식이 실질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나, 소비자가 기존 대출 양식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뜻하지 않게 모기지 회사들의 압류 스캔들로 인한 의회 청문회에 출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워런은 휘둘리지 않고 소비자보호금융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져놓았다.

    이후 워런은 소비자보호금융국의 국장으로 임명되지 못했지만 대신 함께 실무를 처리했던 리처드 코드레이가 소비자보호금융국의 수장이 되었다. 워런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시 하버드대 교수로 다시 돌아왔다. 2011년 여름이었다.

    미 상원의원 선거의 역사를 다시 쓰다

    2012년 11월에 서거한 테드 케네디 의원의 자리를 두고 매사추세츠 주 의원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다. 공화당이 내세운 후보는 ‘월가의 총아’ 스콧 브라운이었다. 워런은 주변에서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이 싸움을 앞에 두고서는 망설였다.

    여러 싸움을 거치면서 그녀는 이미 나이도 들고 워싱턴 정가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화당원인 스콧 브라운이 당선될 경우,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것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뉴베드퍼드에서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눈 뒤 워런은 새로운 싸움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끝없는 소모전이 시작되었다. 워런은 자신의 부모와 조상, 딸 등 모든 가족이 정치적 공격 대상이 되는 일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선거운동을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때마다 이 선거가 자신만의 싸움이 아닌 모두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워런과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꿈꾸는 것은 모든 아이들을 위한 미래였다. 워런은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그리고 결국 승리했다. 2012년 11월 5일이었다.

    이 책 후반부에서 다루는 이 드라마틱한 과정은 선거자금 모금, 득표율 등 여러 면에서 미국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과정이었다. 상원의원이 된 워런은 자신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을 완전히 뒤엎을 순 없지만, 적어도 속도를 느리게 만들 수는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변화는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며,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워런은 멈추지 않고 싸워온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