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담화를 보며
        2015년 08월 07일 11:11 오전

    Print Friendly

    6일 오전 10시 좀 넘어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담화문 발표장 풍경은 정면을 응시하고 준비된 자료를 읽어 (몇 대목에서 버벅거렸지만) 내려가는 대통령,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양 옆으로 도열해서 눈만 뻐끔대는 노회한 비서관과 장관들, 대통령 앞의 의자에 앉아서 간간히 메모를 하며 시간만 쳐다보는 기자들….

    준비된 원고를 다 읽은 대통령. 곧이어 “이상으로 대통령 담화문 발표를 마치겠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오고, 대통령은 연단에서 내려가 앞줄에 앉은 기자들 몇 명과 악수를 나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4차 대국민 담화문 발표는 끝났다.

    “대통령 담화에는 평소 나왔던 이야기 외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면서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남긴 멘트 중 일부다.

    내가 좀 궁금한 것은 기자들의 질문을 단 한 명도 안 받고 대통령 혼자서 준비된 원고를 읽고 끝낼 대국민 담화문 발표장에 기자들은 뭐 하러 참석을 해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까? 담화문 내용도 이미 다 흘러나간 마당에.

    이럴 거면 담벼락에 붙여두면 될 담화문을 왜 생방송 쇼까지 했을까? 국민과 소통한다고?​ 국민과 소통하고,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려는 대통령이라면 하다못해 각본에 따라 질의응답 몇 개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기자들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아닌데.

    국정원의 민간인 해킹문제, 새누리당 심학봉 의원 성폭행사건, 롯데재벌의 경영권을 ​놓고 부자 간, 형제 간 패륜적인 아귀다툼으로 맨 낯이 드러난 대한민국 재벌체제의 심각한 문제 등 오늘날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고, “임금피크제 도입과 노동시장 구조개혁(저성과자 해고조건 완화, 비정규직 확대 등)은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간곡히, 간곡히, 간곡히 호소(?)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저 분은 나와는 딴 나라의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사정 대화를 촉구한 대통령, 그런데 지금 노사정 중 노(勞)의 핵심 중 하나인 민주노총 위원장에게는 “‘체포영장’ 발부해 한상균 위원장이 정동 민주노총 감옥에 갇혀 지낸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고,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 등 지도부는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서 이 폭염 속에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노숙 텐트농성을 벌이고 있다.

    21세기 전 세계 문명국가 중 노동조합의 내셔널센터인 노총의 위원장을 구속(체포영장)한 경우는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거의 유례가 없다. 정부, 사법부 등 이 나라 국가권력이 노동조합 지도자와 노동자들에 대한 구속과 공권력 투입, 집단폭력을 자행하면서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2014년도 세계경제포럼(WEF)은 우리나라의 노사 간 협력은 132위로 사실상 낙제점을 주었습니다”라고 개탄(?)하시니 많이 황당하다.

    특히 “올해 안에 공공기관에 임금피크제 도입을 완료하겠다”는 대통령, 이건 뭐 대통령이 왕정시대의 왕이라도 되는 듯 공공기업 노사 간에 체결한 단체협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공공부문 노동자와 노조에 대해서 “무조건 까라면 까”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담화문을 끝까지 들어봐도 대한민국 재벌문제는 일언반구도 없다.

    얼마 전 삼성그룹이 무리한 합병을 통해서 이재용 남매가 불과 몇 개월 만에 수조원의 시세 차익을 챙겨 대다수 서민들의 원성을 자아냈고, ​최근 롯데그룹의 권력암투가 부자 간, 형제 간 골육상쟁으로 치달으며 전 국민적 분노가 높아져 있는데, 대통령은 국민들을 앞에서 이런 한국 재벌병에 대해서 입도 뻥긋 못하면서 오로지 국민들에게 “양보와 협조”를 강요(?)하니, 과연 누가 그 진정성을 믿고 따를까?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적 화합과 내수시장 진작을 위해서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무료로 해준다고 한다.​ 공공기업 구조개혁을 부르짖는 대통령, 그런데 가뜩이나 적자 구조인 도로공사에 수백억 원의 적자폭을 더 키울 고속도로 무료화를 추진한다니, 참으로 훌륭한 정책이다.

    어제부터 언론에는 8.15 대사면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태원, 김승연 등 재벌 총수들이 사면대상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

    참 대단하다. 롯데그룹의 추악한 재벌문제가 온 세상을 뒤흔드는 이판에 범죄인 재벌 총수들을 사면하겠다는 대통령. 아집인가? 아니면 ‘내가 뭔 일을 해도 다음 선거에는 기호1번 찍는 착한 대한민국 국민들을 믿어요’라는 경험 때문인가?

    회사 돈을 수백억, 수천억씩 횡령하고, 기업에 수천억 원의 손실을 입히는 등 악질적인 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총수와 집행유예 중인 총수들을 죄가 없는 사람처럼 “사면”을 해 준다니.

    재벌과 자본가들에게는 사면과 규제완화를 통해서 “화해”의 러브콜을 보내면서 노동계의 수장은 체포영장을 발부해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둬두고, 길거리 천막으로 내몰아놓은 박근혜 대통령.

    수십년간 기업에 근무한 숙련된 장기근속자 임금을 삭감하고, 희망퇴직과 정리해고가 판치는 상황에서 또 저성과자 해고를 더 쉽게 하고, 지금도 넘쳐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던져놓고 “청년실업 해소와 2중구조 해소를 위한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라고 우기면서 “노사가 양보해서 동참하라”고 주문하는 대통령.​

    ​오늘 대통령 담화를 보면서 “절대공감”을 한 사람들은 재벌과 가진 자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정치자금 받아먹는 인간들이고, 역시나 “왕짜증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고, 현실성도 없는 내용으로 청년실업 문제를 정치적 면피용으로 악용한 대통령 담화문 내용에 대해 “낙담”하는 사람은 청년실업자와 비정규직들일 것이다.

    필자소개
    박유기
    전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