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분 - ②
    [글쟁이들] 연재소설 '3분'
        2015년 08월 07일 10:03 오전

    Print Friendly

    3분 – ① 링크

    3 기우

    30년 전, 13~16평형으로 보급된 5층짜리 주공아파트는 점점 도태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 산 7년 간 주공아파트는 거의 멸종해 가고 있었다.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주공아파트 단지는 재개발 됐고, 이곳 역시 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사는 단지 아파트의 외벽은 팔자 사나운 노인의 얼굴처럼 잔금이 가득했고, 페인트는 부스럼이 일어난 건성피부처럼 헐어 있었다. 당장 스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남루한데도 매매가는 오히려 급등해 상종가를 달리고 있었다. 골동품도 아닌,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의 가격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르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로엔그린이 흐르는 카페에서 간만에 기우를 만났다. 딱히 용무가 있어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럽게 연락이 됐고, 간만에 차나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끼리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 게 아니라 차나 한잔 하자고 한 게 조금 어색하긴 했다. 기우가 영업 쪽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나 한잔 하자는 말은 더욱 이상했다. 하지만 기우와 만나야 한다면 술을 같이 하는 것 보다는 차를 한잔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너, 어릴 적에 수지도 여기 살았던 거 알아?”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난 기우는 안부를 나누다가 집값이 오른 게 자신에게 호재였다는 얘기를 했고, 그러다가 수지에 대한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기우가 수지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지가?”

    “얘기한 적 없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러고 보니 수지는 내게 사는 곳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니?”

    “수지는 그걸 창피하게 생각했거든. 수지네 전세였잖아? 뭐 자기네 집이었어도…, 상대적으로 좀 그렇잖아? 어릴 때부터 14층 아파트 사는 아이들을 마주하면 괜히 자격지심 느낄 수 있지.”

    수지에 대하여 전부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수지가 그런 열등감에 잡혀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수가 있구나. 너도 그랬어?”

    기우는 커피 잔을 입에 댔다. 하지만 잔으로는 끝이 씁쓸하게 올라 간 입매를 전부 가릴 수 없었다. 기우는 어릴 때도 자주 저렇게 웃었다. 저 웃음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우리 또래는 그 당시 BB탄 총싸움에 미쳐 있었다. 전장은 주로 내가 살던 14층 아파트 단지였다. 실제와 똑같이 생긴 장난감 총을 들고 우리는 아파트 내부와 공원을 누비며 밤늦게 까지 전투를 벌였다.

    편을 짤 때는 일제 총을 가진 아이들을 균형적으로 갈라놓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산은 모두 수동이라 한발 씩 장전해서 쏴야했지만 일제 총은 전동모터나 가스충전 방식이라 별 다른 장전 없이도 연사가 가능했다. 게다가 사거리의 차이도 두 배 정도였기 때문에 일제 총을 가진 애들을 한 쪽으로 몰아 버리면 승부가 너무 싱겁게 나버렸다. 물론, 이기는 입장에선 그 편이 더 재미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리그가 나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기엔 사람이 너무 적었다.

    일제 총을 가진 아이들은 대부분 14층 아파트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편을 짜놓고 보면 14층 단지 아이들과 5층 단지 아이들이 자연스레 반씩 섞이곤 했다. 기우는 5층 단지에서 유일하게 일제 총을 가진 녀석이었다. 기우의 총은 저격수가 쓰는 가스 충전식 라이플이었는데, 사거리는 물론 관통력이 가장 강한 총이었다. 성능이 좋은 만큼 가격도 가장 비싼 축에 속해 우리 중에 그 총을 가진 건 기우와 나 둘 뿐이었다. 때문에 기우와 난 같은 편이 될 수 없었다. 가장 좋은 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릴 자연스레 경쟁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임을 하면서 나는, 상대편에 기우가 살아남으면 우리 팀의 5층 단지 아이들이 져도 별로 속상해하지 않는 다는 걸 느꼈다. 기우가 혼자 살아남아 우리 팀을 모두 아웃시키는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우리 팀의 5층 단지 아이들은 마치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해했다. 그럴 때 마다 기우는 숨어있던 곳에서 나오면서 지금처럼 씁쓸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올렸다. 그때 내가 느낀 건 분명 패배감이었다. 기우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표정을 본 이후 부터였다.

    “넌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

    기우가 체스 피스를 내려놓듯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그 어조 속에서 염려 보다는 비난을 느꼈다. 기우가 마치 내 미간에 라이플을 겨누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말이야. 선망하는 대상을 가지려면 선망하는 대상이 원하는 걸 갖고 있어야 해. 대부분이 그걸 가지지 못해서 좌절해. 그런데 너는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몰라. 그런 순진함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일 수 있어.”

    기우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랄한 비난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기우와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처음이었다. 둘 다 낯선 모습이었다. 기우는 대체로 과묵한 편이었고, 입을 연다 해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쓴 소리를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기후는 초등학교 때 뿐 아니라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항상 어른스런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기우는 진짜 어른이 됐고, 그래서 조숙함이란 불필요한 허물을 벗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허물을 벗지 않았던 기우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 동안에도 기우는 꽤나 길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조숙함을 탈피하면서 유년시절 들고 다니던 총을 몸속에 넣기라도 한 듯, 날카롭게 쏘아대는 말투에 들어있는 생경한 적개심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수지도 결국 네 깊은 오만에 지쳐서 떠난 건지도 몰라.”

    기우의 말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건 기우가 수지의 이름을 꺼냈을 때부터였다.

    “수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지친다는 말을 자주 했었지.”

    “언제 수지를 만났는데?”

    “얼마 전에도 만났고, 너와 함께 지낼 때도 종종 만난 적이 있어. 친구니까.”

    수지는 기우와 만났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기우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는지를 다시 기억해보려 애썼다.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눴었는지 기억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수지는 네가 가진 것들을 포함해서 널 좋아했어. 넌 수지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널 좋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건 뭐야? 너 자체를 사랑해야 네가 가진 걸 나눠 쓸 자격이 생긴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런 생각은 가진 게 없는 사람은 감히 부릴 수 없는 오만 아닌가? 모욕감을 느끼게 되지.”

    기억 속에서 기우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면을 더듬던 나를 기우의 비난이 밀쳤다. 나는 수지를 처음 만난 장면 속으로 떨어졌다.

    중학생이 됐을 때, 우린 이미 총싸움 같은 건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고등학생들도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면서 총을 들고 다닐 때였으니 우린 꽤나 조숙한 편이었다. 아니, 우리를 조숙하게 만든 건 우리의 부모들이었다. 우린 중학교에 진학하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선행학습을 시작했다. 성적은 어떤 학원을 다니느냐와 학원의 진도를 얼마나 따르느냐로 판가름 났다.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우리는 영어와 수학, 국어만큼은 고등학교 2학년 과정까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수지를 처음 본 건 그 무렵, 중3의 겨울방학이 시작 된 날이었다.

    그땐 수지의 이름이 수지인 줄도 몰랐다. 수지의 첫 모습은 그저 그 추운 겨울 날 여자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내가 살던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에 불과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전부였다. 난 그때 수지가 내가 사는 아파트에 사는 여중생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집 안에서 싸우고 있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아서 집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교복 치맛단 밑으로 보이는 날렵한 레깅스 차림의 종아리와 왠지 분위기 있어 보이는 옆얼굴 때문에 수지에게 눈이 한 번 더 갔던 건 사실이었다.

    난 승강기를 타고 14층에 내려 복도 난간 너머로 수지가 앉아있던 벤치를 내려다봤다. 점처럼 작았지만 수지의 새하얀 얼굴이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난간 너머로 내민 내 얼굴이 수지의 눈에 띌까 싶어 얼른 난간에서 몸을 떼고 집으로 들어갔다.

    수지는 그 다음 날 그 시간에도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수지가 부부싸움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집의 딸이라고 확신했다. 때문에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몇 층을 보고 있는 건지 궁금해 잠시 멈춰 서서 수지가 보고 있는 방향을 잠시 올려다보기도 했다. 수지는 내가 살고 있는 14층을 보고 있었다. 이웃 중에 수지 같은 딸이 있는 집이 혹시 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때 내가 확인한 건 내가 이웃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때 밑에서 올려다본 복도식 아파트의 각층 난간이 노트에 그어진 오선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다시 수지의 옆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옆에서 보이는 수지의 눈매나 입매가 왠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아 의아했다. 가정불화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 하는 여중생의 표정이라기엔 왠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일부러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한 층씩 올라갈 때 마다 아래에 있는 수지의 얼굴을 슬쩍슬쩍 엿보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슬픈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이어폰을 꼽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 층씩 올라갈 때 마다 수지의 얼굴이 작아졌다. 이목구비가 꽤나 또렷해서 한참을 올라갔는데도 수지의 생김새가 보였다.

    그게 수지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그리고 그때는 수지의 이름도, 학교도, 아무것도 알지 못 했다. 그리고 난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미국의 고등학교 진학 전 반년 간 어학원에 다니다가 정규 학기가 시작되면 입학을 할 수 있도록 이미 모든 일정이 잡혀있었다.

    어쩌면 기우는 그때 내가 기우에게 아무 말 없이 미국으로 갔던 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서운해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나는 조금 더 이후의 만남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콜럼비아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귀국했을 무렵, 난 기우와 만나 꽤 괜찮은 사이로 지냈었다. 나에 대한 기우의 미움이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기우는 여전히 커피로 목을 축이면서 나에게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용은 여전히 전달되지 않았고 기우가 가진 적개심만이 전달됐다. 어쩌면 기우가 나에게 적개심을 품은 건 같은 총을 들고 있던 어린 시절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카페에는 로엔그린에서 가장 잘 알려진 행진곡이 흐르고 있었다. 내 궁금증도 ‘기우가 내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게 언제?’에서 ‘그 적개심을 표현하게 된 계기가 무엇?’으로 바뀌어 있었다. 5층 아파트의 매매가가 오르게 된 것이 그 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기우와 같이 차를 마시며 마주앉아 있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졌다. 기우가 이길 때 마다 기뻐하던 5층 단지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문득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묘한 건 이제야 모든 게 제대로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기우와 나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우와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엮이는 건 소모적인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테이블을 사이에 둔 이 전장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우가 수지에 대한 소식을 아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우의 적개심이 분명 수지와 연관 됐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적개심의 역사는 내 짐작보다 길 게 분명했다.

    연극

    연극 공연의 한 장면

    4 첫 만남

    수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스물 하나의 겨울이었다. 날짜는 11월 1일이었다. 그날은 수지의 생일이었고, 난 아주 오랫동안 그날을 수지와 내가 처음 만난 날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날이 수지의 생일이란 걸 그날은 몰랐고, 중학교 시절 봤던 벤치의 소녀가 수지였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그 무렵 난 대학로 연극 공연의 모니터링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의 창작극으로도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걸 뉴욕의 학부에 입증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콘텐츠와 흥행실적을 분석해야 했다.

    12월의 대학로는 콘텐츠에 관계없이 붐볐다. 오픈 런을 하는 공연 뿐 아니라, 새롭게 올린 창작극도 모두 만석이었다. 수십 년 만에 찾아 온 때 이른 한파 따위는 흥행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창작극을 올리는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겨울은 황금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수익을 낼 만 한 수준의 작품을 찾는 건 힘든 일이었다. 물론,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도 좋은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수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가 이내 사라진다. 하지만 실패하는 작품의 대부분은 결국 부실한 콘텐츠 때문이다. 스토리가 허술하거나, 노래가 좋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지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무대나 음향이나 조명 자체가 열악해 빛을 못 보는, 환경만 뒷받침 된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콘텐츠가 있을 거라고 확신 했다.

    그날은 소극장 뮤지컬을 보고 낙담한 채 나오는 길이었다. 무대 규모를 떠나서 대한민국의 창작 뮤지컬로 장기적 수익을 창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판단은 관람한 작품의 수가 늘어갈수록 확고해져갔다. 숨어있는 천재가 있을 거란 생각이 철없는 꿈이었나 싶어 낙담하며 나오는데 기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같이 술을 한잔 할 수 있냐고 물으면서 기우는 바쁘면 다음에 봐도 된다는 얘기를 깔았다. 바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기우가 있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기우는 마침 대학로에 있었다.

    그곳에서 수지를 만났다. 수지는 기우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핑크색으로 칠한 손톱이 술집의 주황색 조명을 받아 반들거렸다. 수지는 내가 들어서자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수지의 의자 등받이에는 베이지색 코트와 황갈색 목도리가 걸쳐져 있었다. 기우는 웬일인지 검정색 슈트 차림이었다. 아이보리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맵시 있는 몸매가 드러나는 수지와 기우는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수지는 꽤 짧은 스커트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갈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꽤나 신경 쓴 차림인 것 같아 난 둘이 데이트 중이란 인상을 받았다. 테이블 위엔 빈병이 꽤 쌓여 있었다. 밀러가 여섯 병, 호가든이 두 병이었다. 난 둘이 데이트 중에 사소한 일로 다퉜을 거라고 짐작했다.

    “여기는 수지, 그리고 이쪽은 내가 말 한 사리.”

    소개를 마친 기우는 자리에 앉아 밀러를 들이켰다. 기우의 입술이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나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마 화가 난 쪽은 기우일 것 같았다.

    수지와 나, 기우는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일상에 관한 얘기였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빈병이 계속 늘어갔다. 기우는 언제나 그렇듯 침묵을 유지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다. 대부분의 대화가 수지와 나 사이에서 오갔다. 수지와 내가 공교롭게도 같은 맥주를 좋아해 대화는 맥주 이야기로 시작됐다. 수지는 대학로 근처 대학교의 역사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수지는 2학년이었지만 꽤나 해박한 전공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으로 대화를 흥미롭게 이끌 줄 알았다. 대화는 재미있었지만 기우가 소외되는 것 같아 난 그게 신경이 쓰였다. 기우와 수지의 서먹한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기우를 대화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학교가 같아.”

    기우는 그냥 짧게 대답했다.

    “자과대는 수원이고 인문대는 본교에 있는데?”

    기우가 다니는 공대는 수원에, 수지가 다니는 역사학과는 서울 본교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해놓고 보니 심문하는 느낌이어서 바로 후회했다.

    “그래도 연합동아리 모임 때문에 가끔 봐.”

    수지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기우는 입을 열려하다가 다시 술을 마셨다. 침묵이 수다보다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우의 그런 태도가 왠지 거북했다. 나는 둘이 사귀는 사이인데 괜히 내가 껴들어 기우가 언짢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아리 모임 말고도 따로 자주 보는 사이?”

    기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밀러를 들이켰다. 투명한 병속에서 황갈색 맥주가 출렁이며 사라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기우가 휴학계 내러 왔다고 해서 간만에 본 거야.”

    수지가 말도 안 되는 오해라는 듯 웃으며 부정했다.

    “휴학계는 왜?”

    내가 기우에게 물었다.

    “영장 나왔으니 가야지.”

    기우가 병을 든 채 대답했다. 기우의 대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우처럼 침묵하긴 싫었다.

    “너야 뭐 총 잘 쏘니까 휴가는 진짜 자주 나오겠다. 포상 휴가 준다며 사격 잘 하면.”

    민망해서 했던 농담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고 대화가 한참동안 끊어졌다. 셋 중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다 된 거 같아.”

    수지가 일어서서 코트를 입어 몸매를 가렸다. 그리고 가늘고 긴 목을 목도리로 감췄다. 술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왠지 자리를 망친 것 같은 미안함 때문에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가 술값을 계산했다. 기우가 입대하기 전에 술을 한잔 사는 게 친구로서의 도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밤의 대학로는 추웠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우리는 말없이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역 지하로 내려 온 뒤 기우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고 나와 수지는 개찰구 앞에 서서 기우를 기다렸다.

    그때 수지가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난 수지의 휴대폰을 받아 내 전화번호를 찍은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지에게 휴대폰을 다시 건넬 때 우리의 손이 살짝 스쳤다.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손이었다. 잠시 뒤 기우가 돌아왔고 우린 인사를 한 다음 헤어졌다. 나와 기우는 수지를 배웅한 뒤 수지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우와 나는 같은 단지에 살고 있었다. 기우가 어릴 적부터 살았던 주공아파트 단지로 내가 이사를 한 건 그 때가 약 3개월째였다.

    아버지의 뜻에 반대해 휴학을 하고 귀국하면서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다. 아버지는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집에 들어 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난 뉴욕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마침 주공아파트에 비어있던 집의 열쇠를 내게 줬다. 대부분의 14층 단지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 집도 주공아파트 단지에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세를 주고 융자를 얻어 집을 사는 식으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 몇 채는 어머니의 명의로 등록 되어 있었다. 두 분은 당시 별거 상태였다.

    기우는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단지 앞에서 헤어질 때 목도리를 고쳐 매면서 목을 한 번 끄덕거린 게 전부였다. 그 목도리가 수지의 것과 같다는 걸 난 그제야 알아챘다.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기우는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수지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수지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갔냐는 안부였다. 휴대폰 자판을 눌렀을 그 따뜻했던 손가락들과 핑크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눈앞에서 번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필자소개
    문학청년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