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년 만에 부활한
    스물네 권의 오래된 일기장
    [책소개] <일기를 쓰다 1, 2>(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베개)
        2015년 08월 01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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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에는 스물네 권의 오래된 일기장이 보관되어 있다. 약 200년 전 서울 남대문 근방에 살던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兪晩柱, 1755~1788)라는 이가 이 일기의 주인이다. 만 스무 살에 시작하여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쓴 일기이니 길지 않은 그의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일기는 개인의 사적 기록이면서 동시에 18세기 서울 사대부의 일상과 조선 사회의 여러 면모들을 매우 소상하게 담아내고 있어, 조선 후기 문학사와 사상사,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제 이 오래된 일기를 한글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재야 역사가와 자유로운 몽상가를 꿈꿨던 200년 전 젊은이의 일기를 들여다보자.

    18세기 조선, ‘개인’의 발견

    옛날 사람들에게 일기는 보편적인 글쓰기였을까? 현재 전하는 일기는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다. 그것도 조선 전기의 것은 3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가 바로 조선 전기의 것이다. 이 일기에는 유희춘의 개인사는 물론이고 선조 임금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본격적인 일기 쓰기는 18세기 이후 뚜렷이 나타는데, 이는 시헌력(時憲曆)이라는 동아시아의 역법 체계 및 책력(冊曆)의 대중적 보급과 맞물린 사회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 정원용(鄭元容, 1783~1873) 등 사대부 지식인 남성의 일기를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일기로 꼽을 수 있는데, 이 일기들은 개인의 일생과 결부된 장편의 저술로서 짧게는 13년, 길게는 91년에 이르는 하루하루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만주가 스물한 살이 되던 1775년의 첫날에 쓰기 시작하여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죽기 한 달 전까지 13년간 쓰고 스스로 책으로 엮어 이름붙인 일기 『흠영』(欽英)은 매우 특별하다.

    노상추와 정원용이 의젓한 가장이나 관인으로서 자신에 대해 별다른 회의를 표하지 않음에 비해, 유만주는 공사(公私) 영역을 떠돌며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에 의문을 갖고 심지어 자기 부정의 언술마저 시도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흠영』이 없으면 나란 존재도 없으며, 나는 역사책・지도・여행・주렴・다래를 좋아하며, 역사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어긋버긋하고 두루뭉술하고 물정을 몰라, 나긋나긋하고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율에 너무나 맞지 않다. 숲에서 나오지 않는 사나운 호랑이가 되어야 할 따름이다.’

    유만주의 일기에는 유만주 ‘개인’이 보인다. 근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개인의 일기에 ‘개인’이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유만주 당대의 일기들을 일별해 보면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상당 부분 유만주가 경험한 정체성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으로 이어지며, 『흠영』은 이 의문에 대한 여러 층위의 탐구 및 해명을 시도한다.

    일기를 쓰다

    우리말로 처음 번역되는 『흠영』 

    『흠영』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유만주가 직접 창작한 시문에서 독서한 책의 내용, 문장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화에 대한 논의, 조보(朝報)의 내용, 집안 대소사 등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생활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흠영』은 학계에서 18세기 사회·경제·문화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여태껏 『흠영』은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었고, 이 책 『일기를 쓰다 1, 2』가 『흠영』을 우리말로 번역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의 번역자 김하라 박사는 우리나라의 『흠영』 전문 연구자다. 박사학위 논문(『유만주의 ‘흠영’ 연구』)뿐 아니라 「『흠영』 일기에 재현된 경험적 시간의 의미」, 「한 주변부 사대부의 자의식과 자기규정」 등 유만주와 『흠영』에 대한 소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며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일기를 쓰다』는 『흠영』의 전체 글 중 현대의 우리에게 유의미한 글들을 선별하여 두 권으로 묶은 것인데, 1권은 일기를 통해 자기를 응시하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책과 지식에 대한 무한한 열의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유만주 개인의 면모와 관련된 내용을 주로 수록했다. 그야말로 ‘개인’ 유만주의 발견이며 탐구이다.

    2권은 18세기 조선의 아름답고도 비참한 면면을 가감 없이 기록한 글들을 모았다. 글 속에 묘사된 조선,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미시사, 풍속사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8세기 조선 강역도와 한양 도성도에 유만주의 발자취를 표시하고 이것을 본문에 함께 수록함으로써 독자가 좀 더 공간적으로도 생생하게 18세기 조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유만주의 생애와 『흠영』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담은 해설과 연보는 2권에 수록했다.

    역사가가 되고 싶었던 독서인 유만주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1787년 3월 11일 일기]

    일기를 쓰기 시작한 1775년, 유만주는 서울의 남대문 근방에 거주하는 21세의 사대부 남성으로 세 살 난 아들을 둔 기혼자였으며, 별다른 공적 직분이 없는 거자(擧子: 과거 시험 응시생)로서 수시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던 처지였다.

    유만주는 과거 급제 여부로 그 사람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사회의 통념이 부당하다고 지적했지만, 이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과거 시험 실패자를 바보 멍청이에 파락호로 여기는 그 통념적 시선은 이미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시간이 흘러도 일기를 쓰는 그의 외적 사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처지의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 것은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가정에서의 위치나 관료 예비군의 처지가 아니라, 자신이 독서인이자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유만주가 자기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책이었다. 유만주는 몹시 아플 때나 일이 있어 외출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순간도 책을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고, 그가 본 책은 경전과 역사책은 물론 제자백가의 기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 지리서, 패관잡설, 온 세상 구석구석의 숨어 있는 괴이한 일들에 대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5천 권이 넘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독서에 탐닉하며 풍요로운 내면세계를 일구어 가던 중 유만주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발견하여 거기에 집중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학(史學)이었다.

    유만주는 소년시절부터 역사에 흥미와 열의를 보였다. 특히 그는 일관된 시각으로 중국의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를 아우르는 대규모의 역사서를 편찬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이런 문제의식 아래 집필한 책을 『흠영삼강』(欽英三綱)이라 이름 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환인씨(桓因氏)의 시대로부터 자신의 당대인 조선까지를 포괄하는 자국의 역사 편찬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자국의 역대 인물을 38개의 인간형으로 분류한 인물전 형식의 역사서를 기획하며 이것이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넘어서는 시도가 되리라는 야심찬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미완의 저술 『흠영삼강』은 그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자국의 역사인물전은 기획에서 그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재야 역사가 유만주의 의도나 계획은 어쩌면 잠꼬대 같은 혼잣말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13년간 그의 일기에 지속된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지금의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가 지녔던 역사 서술자로서의 방향성과 가능성이다. 일례로 그는 생애 말년에 이르러, 교훈과 가치평가에 견인된 중세적 사관을 탈피해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서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직분 없는 사대부 지식인이라는 처지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원하는 직업, 취향과 욕망의 문제를 평생 탐구해 온 유만주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

    말년의 유만주가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은 그 자체로 모순상태에 가깝다. 그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일을 하고, 범부(凡夫)의 마음으로 학자의 일을 하며, 부유(腐儒: 케케묵은 선비)의 식견으로 영웅의 말을 하고, 무뢰(無賴)의 식견으로 품격의 말을 한다. 참으로 얼룩덜룩하기가 오추마나 표범 같다. 온 세상에 오직 이 한 사람만 그런 것 같다”며 자기 내면의 소인과 군자, 범부와 학자, 부유와 영웅, 무뢰배와 품격 있는 사람이 빚어내는 모순을 희고 검은 털이 섞인 오추마나 얼룩덜룩한 표범의 박잡(駁雜)으로 형상화했다.

    이와 같은 자기형상화는 우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괴리를 직시한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현상태를 범부와 부유라 한 것은 아마도 학문적인 성취를 거둔 비범한 역사가라는 이상과 겉보기로는 그저 홀로 역사서 읽기를 즐기는 일개 평범한 사인(士人)이라는 현실 사이의 격차를 염두에 둔 자기규정일 것이다.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은 확고했지만 이 점과 관련해 자신의 존재의의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기회를 평생 얻지 못한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대단히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의 현상태를 과소평가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몸”이라는 그의 말은 그와 같은 현실인식 및 자기규정방식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준다.

    팔팔 살아 숨쉬는 18세기 조선, 조선 사람들

    유만주의 『흠영』에서 빛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중세의 틀 속에서 유만주 ‘개인’을 찾았다는 점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조선과 조선 사람들에 대한 촘촘한 기록이다.

    조선의 다재다능한 사람들

    아홉 살짜리 철이와 일곱 살짜리 석이는 재주가 뛰어나고 해서와 초서를 큰 글씨로 잘 썼다 한다. 특히 아홉 살 난 철이는 과거 시험에 쓸 만한 시도 잘 짓는다며 기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포도를 잘 그리는 월성 김씨, 거문고 음률을 잘 알아듣는 청풍 김씨 집의 어린아이, 미인도를 잘 그린 화가 최북의 젊은 아내, 수를 잘 놓았다는 정철조의 기록도 있다.

    유만주가 기록한 인물 중에는 그와 동년배인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이라는 이가 있다. 정유역변(丁酉逆變: 1777년 정조 시해 미수사건)의 연루자로 제주도로 귀양 와서 양대(=갓양태)를 엮어 먹고 사는데, 재주가 매우 좋으며 당시 호남 곳곳에서 ‘정철 양대’라고 하면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기록했다.

    유만주가 지켜본 동시대인 중에는 이주애(李珠愛, 1761~?)라는 여성도 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막내딸인 이 여성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아름다운 글씨를 곧잘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출인 탓에 공식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만주의 기록에 따르면 이주애는 부친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떠나 상경했으며 이후 낮은 신분의 별 볼일 없는 남편을 얻은 끝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주애의 초라한 후일담에 적잖이 실망한 유만주는 그 천재 소녀의 재능이 좌절된 이유를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고자 했다. 즉 중국의 유여시(柳如是, 1618~1664)는 기녀(妓女)였지만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이라는 대문호를 배우자로 만나 남편의 창작활동에 영감을 주면서 자기 재능을 실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의 서녀(庶女) 이주애는 중인․서얼(庶孼) 계층의 무뢰배이자 잡류(雜類)인 자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모든 여지가 차단된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결국 신분과 성별이라는 두 가지 질곡이 서얼 여성 이주애의 날개를 꺾었다는 그의 통찰은 당시 조선 여성의 삶 깊숙한 곳에 닿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외에도 여종 미정, 여종 정월, 안과 의원 이 노인, 잔인한 인간 이명, 치질 의원 장 씨 등 다양한 조선 사람들을 기록에 담았다.

    걸어다니는 양반

    일제 치하의 경성을 산책하던 스물여섯 살의 무직자 구보씨처럼 유만주도 사대문 안팎을 특별한 목적 없이 걸었다. 양반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말이나 나귀를 타고 부리는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체면을 구기지 않는다는 통념이 있던 당시에, 유만주는 양반이지만 직분도 경제력도 없었으므로 탈것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그는 걸어 다니는 양반이 되었다. 걸어 다니되 글을 쓰는 양반으로서 그가 접사(接寫)한 서울 풍경은 특유의 구체성과 생동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초록빛 미나리가 이들이들한 안암동, 드문드문한 초가집 사이로 복사꽃이 환하게 만발한 성북동,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밝은 달이 비추는 서늘하고 깨끗한 청계천 등 그의 묘사는, 지금의 서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옛날 서울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커다란 횃불을 나란히 벌여 놓고 붉은 비단 등불을 양옆에 달고 환궁하는 정조의 행차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남대문 천막 아래로 모여들었고 이날 『일성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가 구경하는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 서로 밟히는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해 남대문과 소의문을 잠그지 말고 야간 통행금지도 해제하라 한 지시도 있다. 유만주의 일기와 『일성록』의 기록을 아울러 살펴보면 이날의 서울 모습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서울의 길거리에서 만난 한 노파는 “양반은 부처님이라면서, 어째서 사람들의 사정을 잘 헤아리지 못한대요?”하고 묻는다. 유만주는 ‘양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는 것이 참 부끄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만주는 ‘남들은 여행이 고달프다지만 나는 여행이 편하다’고 선언한 다소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였다. 홍대용의 『연기』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을 탐독하며 중국 여행의 원대한 꿈도 꾸지만, 현실에서는 5박 6일 여정에 돈 1천 푼이면 된다는 금강산 구경조차 가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던 그였기에, 다닌 곳이라곤 경상도 군위와 황해도 해주, 전라도 익산 등 아버지의 부임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서울까지 길게는 보름씩 걸리는 그 길 위에서 그는 맘에 드는 풍경들을 수없이 발견하고 행복해했다.

    군위까지 가는 길에 상주를 지나치면서는 그곳 특산물인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린 사소한 풍경에 신기해했고, 익산에서 돌아오다 수원의 어느 주막에 묵을 적에는 먼 들판까지 나가 봄나물을 캐는 그 주모를 보고, 손님의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는 조촐한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져 시(詩)를 쓰기도 했다.

    여행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번쩍 떠오른 장소도 해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어느 주막이었다. 아픈 아이와 산적한 집안일 걱정으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울적한 귀경길이 끝나갈 무렵 묵게 된 고양의 그 주막집에는 좋아하는 해당화가 무덕무덕 피어 있었다. 그는 이 꽃송이들을 흐뭇이 바라보다 뜬금없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의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고, 그걸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꿈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붙박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떠돌이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었음이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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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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