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7월 31일
    대나무산 무너지다
    [산하의 오역] 이승만과 조봉암, 그 대비되는 삶
        2015년 07월 31일 10:0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국전쟁이 터지고 서울이 3일만에 떨어진 뒤, 인민군은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수수께끼같은 며칠을 보낸다. 한강을 즉시 건너 지리멸렬한 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며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남한 농민들의 자발적 봉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후일 김일성이 “당신이 얘기한 남로당 당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박헌영을 힐난하기도 했지만 박헌영도 미치고 팔딱 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한에 머물 때만 해도 불만 당기면 폭발할 것 같았던 포한 가득했던 소작농들은 참말로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기묘한 조화를 부리는 데 공이 큰 이가 죽산 조봉암이었다. 원래 공산주의자였다가 박헌영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 뒤 전향하여 대한민국 건설에 참여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그는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균등한 토지 소유를 실현함으로써” 농민의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주층을 소멸시켜 성공적인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거니와 조봉암의 농림부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주의 나라’를 ‘소규모이지만 자작농의 나라’로 바꾸려 시도했다.

    땅에 대한 농민의 애착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소작농들에게 대한민국은 ‘뒤엎어야 할’ 나라에서 ‘미우나 고우나 두고 볼 나라’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조봉암은 국회 부의장이었다. 일찌감치 안전한 곳으로 튄 다음 그곳에서 “서울 사수” 방송을 녹음한 행정부의 수반(이승만)에게 속아 넘어갔던 것은 국민뿐이 아니었다. 국회도 이승만의 피난을 새까맣게 모르고 그 새빨간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일찍이 남북합작을 주장했던 조소앙은 “서울 사수”를 피를 토하며 외쳤고 “이 박사도 그러마고 했다.”면서 국회에서 수도 사수 결의안을 관철시킨다. 무기를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하여 옥쇄라도 불사하자던 그는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고 결국 납북되는 운명을 맞는다.

    이 혼란 와중에 국회의 중요 서류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느라 동분서주한 사람이 국회부의장 조봉암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아내와 딸을 챙기지 못했고, 남편만큼이나 쟁쟁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그 아내 김조이는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게 된다.

    동상을 세우니 마니하고 요즘 유달리 그 ‘재평가’하자는 목소리가 드높은 ‘건국의 아버지’께서 역사상 순위권에 드는 오만함과 무책임의 극한을 노닐던 대한민국 초기, 조봉암의 행적은 그렇게 두드러졌지만 이후로도 그의 발자취는 뚜렷하고도 깊숙하다.

    전쟁이 끝난 뒤 몇 해도 흐르지 않은 엄혹한 시점에서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한 이후 야권의 단일후보로서 200만 표가 넘는 표를 얻어 기염을 토한다. 이승만이라는 위인은 이런 위험 인사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둘 깜냥이 못 됐다, ‘평화통일’ 자체가 이적성이 있다는 논리로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든 것은 그 시작이었다.

    조

    재판 받고 있는 조봉암(맨 왼쪽. 방송화면)

    이때 1심 판사였던 유병진이 조봉암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자칭 반공청년 수백 명이 법정에 난입하고 그 집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빨갱이 판사 물러가라.” 며칠 전 왜 정부 욕을 하냐며 세월호 유족 뺨을 때린 광기는 그 뿌리가 깊다. 이승만은 어떻게든 조봉암을 죽이려 들었고 결국 조봉암은 유력한 증거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를 통한 독립 운동을 펼쳤고 감옥에서 걸린 동상으로 손가락의 태반을 잘라냈던, 전향한 이후 대한민국의 각료로서, 선량으로서 소임을 다했던 정치인이었으며 평화통일의 기치를 처음으로 치켜들었던 죽산 조봉암은 결국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으로 파란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환갑 언저리의 한창 나이.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그리고 술 한 잔을 청했지만 그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했다. 그렇게 대나무산(죽산)은 슬프게 무너졌다.

    지난 2011년 52년만에 대법원 판사 전원 합의로 조봉암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조봉암의 딸은 이제야 아버지의 비에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겠다고 감복해 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길고도 잔인했다. 조봉암의 사위는 영화감독이었는데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다니는 처지였고, 조봉암의 아들은 조봉암의 아들이라는 딱지 때문에 스무 번이나 넘게 직장을 옮겨 다니며 인생을 꾸려가야 했다. 참 잔인한 나라. 그만큼이나 무정했던 국민들.

    앞서 말했듯 갑자기 ‘국부’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뜨겁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 주려 눈에 콩깍지를 들이발라도 이승만을 재평가하자는 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짓밟은 이를 국부로 추켜올린다면 대한민국은 스스로 망나니의 후레자식임을 인증하는 격이 될 것이며, 국회도 속이고 국민도 팽개치고 도망간 자를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웅”이라고 칭송한다면 아이들부터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제 손으로 제 국민 수십만을 집단학살한 자에게 어찌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면류관을 씌울 것이며 이런 식으로 정적을 목매달아 버린 개자식을 어찌 나라의 아버지라고 부르겠는가.

    조봉암의 기일인 오늘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개이고 싶은가. 갑자기 견공들의 항의에 귀가 따갑다. 개들에게 미안하다. 표현을 바꾸겠다. 그렇게 들쥐새끼들이고 싶은가.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