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안녕? 페미니즘!]집밥의 미래설계는 페미니즘 과제
    2015년 07월 22일 08: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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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의 요리 방송이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그만큼 백종원과 집밥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논란의 발단은 ‘맛’이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백종원의 음식을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평했다. 말하자면 ‘격이 떨어지는 맛’이라는 것이다.

백종원 지지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해먹을 시간도, 사먹을 돈도 없는 우리에겐 그 정도 맛도 사치라고 항변했다. 이어 황교익이 생각하는 집밥의 맛이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게 밝혀지자 비난은 거세졌다. 사람들은 그에게 ‘어머니스트’란 딱지를 붙이며 엄마나 아내의 손으로 만든 집밥을 고수하는 ‘꼰대’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탈(脫)엄마’를 주장하며 ‘어머니즘’에 맞섰다. 엄마에게 집밥 노동의 짐을 모두 지웠던 우리 사회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이지 대단한 게 아니라며, 간단한 레시피를 알려주는 백종원을 ‘탈엄마’의 전도사로 추켜세웠다. 매주 그의 방송이 나간 후 SNS를 보면 남녀노소 제 밥을 지어 먹는 사회가 곧 도래할 것만 같다. 과연 이 집밥 혁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백종원의 ‘쉽고 간단하고 맛있는 레시피’가 우리의 집밥을 구원할 수 있을까?

백종원

백종원(방송화면)

드디어 집밥 혁명이 시작되었다?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건, 집밥의 핵심은 ‘맛’이 아닐뿐더러 단지 집에서 만든 밥도 아니라는 것이다. 집밥에서 ‘집’의 의미는 물리적인 장소라기보다 일상성과 지속성을 담고 있는 관계에 더 가깝다. 집밥은 오랜 시간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집밥이다.

오늘 집에서 먹은 밥이 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다시 없을 끼니라면 집밥으로서 의미는 없다. 이 지속성은 유대에 기초한 것이어서 집밥은 대부분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다. 늘 먹어온 음식이자 나를 위해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집밥이 향수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때문에 한번 먹을 음식을 만드는 요리 노동이 집밥 노동의 전부가 아니다. 집밥 노동은 집밥을 지속가능하게 조직하고 수행하는 노동이자 음식을 제때 공급함으로써 나와 타인의 생존을 이어가는 보살핌의 노동이며, 그만큼 누군가 업으로 하지 않고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집밥 혁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집안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 – 주부가 한 끼 밥상을 차려내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주부가 모두 여자는 아니다. 이미 우리는 <삼시세끼 어촌편>의 ‘차줌마’를 통해 남자 주부의 일상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한 끼의 밥상은 어떻게 차려지나

먼저, 메뉴가 정해지면 ‘차줌마’는 그에 필요한 재료를 씻고 다듬고 썰고 조리하여 상을 차린 후, 먹고 나서는 치우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다. 일과를 마친 후에도 내일의 요리를 준비하고 끼니 사이사이엔 다음 촬영 때 먹을 김치를 담근다. ‘바깥양반’이 생선을 잡아오지 못하면 즉시 메뉴를 바꿔 가진 재료로 빨리빨리 요리를 해내야 한다. 굶고 있는 식구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시세끼를 해 먹이는 차줌마는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쉴 새 없이 일한다.

차줌마가 보여준 것처럼 기본적으로 하나의 음식을 만드는 일은 메뉴 구상부터 설거지까지 여러 단계의 과제들을 포함한다. 이 일련의 노동에서 ‘간단한 레시피’로 단축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음식을 만드는 작업이 이 단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복잡성을 더한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음식을 만들 때도 설거지와 정리정돈, 조리·가열은 동시에 진행된다. 또 메뉴 구상이 재료 구입에 앞서기도 하지만 장을 보다가 메뉴를 바꾸기도 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의 상태가 메뉴를 결정짓기도 한다. 이 모두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년 뒤의 밥상까지 내다보는 작업이다. 주부는 내일 먹을 쌀을 오늘 밤에 불려 놓고 여름에 나는 재료로 가을까지 먹을 장아찌를 담그며 가을 김장은 1년에 걸쳐 준비한다.

이 누적된 노동이 모여 한 끼의 밥상이 차려진다. 그 시점은 식구들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 중에 내가 밥을 먹이지 않을 경우 생명을 잃는 존재가 있다면 이 긴박은 주부 한 사람의 24시간, 생활 전체를 온전히 필요로 한다. 아이나 환자의 밥 때에 맞춰 음식을 제공할 다른 방안이 없다면 곁을 오래 비울 수 없다. 이처럼 아주 길고 다차원적인 시간에 걸쳐 행해지면서도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적시 노동이란 게 집밥 노동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한마디로 ‘엄청나다.’

여전히 엄마는 집밥을 하고 있다

이렇듯 가공할 집밥 노동을 어머니의 모성과 사랑으로 신성시하는 것 외에, 사회가 달리 감당할 방법이 있었을까. 거꾸로 이 노동을 여성의 본능이나 운명으로 자연화하는 힘이 강력하게 작용해 온 결과, 오랜 시간 세심한 관리를 요하는, 달이고 우리고 절이고 담그는 전통 음식들이 지금껏 유지되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산업화 이후 밥을 만들어 먹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주부가 하던 노동의 상당 부분은 공장에서 이루어지고 주부가 만들던 음식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집밥의 보완물이던 외식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집밥의 대체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여전히 엄마와 아내 – 여자들이 집밥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4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10세 이상 인구가 하루 평균 ‘음식 준비’에 쓰는 시간은 남성이 10분, 여성이 1시간 18분이다. 맞벌이 엄마라고 밥을 안하는 게 아니다. 맞벌이 가구의 남편은 8분, 아내는 1시간 28분으로, 가정 관리와 가족 돌봄의 모든 하위 항목 중에서 남녀 간 시간 격차가 가장 큰 게 음식 준비다. 심지어 아내만 돈을 버는 외벌이 가구에서도 여성(1시간 25분)이 남성(29분)보다 세배 더 많은 시간 음식을 만든다니, 집밥 노동은 과연 ‘여자의 일’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여성들은 바깥일을 하든 안하든,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식구들 뱃속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늘 생각하며 만들거나 사먹이는 노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집간 딸, 장가간 아들, 그리고 백종원이 아니면 밥을 해먹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자취남녀의 냉장고에도 엄마는 여전히 김치와 반찬을 해 나르고 있다.

그런데 이 정도라도 ‘엄마’에 의지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80-90년대생 자녀를 낳은 그 엄마들, 지금의 50-60대 여성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사상 최대 규모로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남편의 퇴직은 빨라지고 자녀의 취업은 늦어지니 엄마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다.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일하고 밥하며 식구들을 챙겨야 하는 이중삼중의 부담을 엄마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다음 세대는 또 누구에게 밥을 맡길 것인가.

이대로라면 집밥은 머지않아 시장에 투항할 일만 남은 것 같다. 외식사업가 백종원이 ‘집밥 멘토’로 나선 이 상황이 어쩌면 그 서막이다. 할머니의 집된장은 이미 사라졌고 찌개를 끓여 줄 엄마도 곧 사라진다면, 우리는 대기업 제품 된장을 사서, 그걸로 맛을 내 온 외식업자의 레시피를 배워 “적당히 맛을 낸 음식”을 먹고 사는 수밖에 없다.

탈엄마가 아니라, 모두가 엄마 되어야

그럼에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맛이 아니다. 이미 너무나 많이 진행된 ‘탈엄마’의 빈 자리를 아무도 채우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상품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우리의 섭생은 가진 돈, 그걸로 사먹을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이 좌우하게 되었다. 더 건강하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더 많은 돈을 내야 하는 현실은 당연하게도 건강 불평등, 생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 모두가 ‘엄마’가 되는 수밖에. ‘어머니즘’이냐 ‘탈엄마’냐는 의미 없는 논쟁이다. 어떻게 남녀노소 모두가 자신과 타인을 돌보며 집밥 노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고 사회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집밥을 포기한다면, 이대로 엄마들이 지켜 온 집밥 노동과 그 가치가 소멸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건 재앙이지 혁명이 아니다.

먼저 각자가 집밥 노동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집밥 백선생> 덕에 생애 처음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본 사람이 있다면 이제 막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앞서 보았듯 ‘숙련 집밥 노동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수고롭지만 분명 이 노동만이 주는 재미와 풍요가 있다. 시행착오 끝에 내 입에 딱 맞는 음식이 탄생하는 희열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 후로는 내가 한 밥이 어떤 근사한 음식보다 더 맛있어진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매일은 아니더라도 집밥을 지속할 방법은 있다. 큰맘 먹고 사다 놓은 재료를 썩혀 버릴 때의 좌절,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지만, 계속 도전하다보면 요령이 생긴다.

‘어머니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며, 보다 사회적인 방식으로 집밥 노동을 조직하는 건 공동체의 몫이다. 돈 없고 시간 없는 사람들이 좋은 식재료를 구해서 같이 요리하고 나누어 먹는 방안은 이미 간간이 시도되어 왔다. 민중의 집의 ‘독립생활자 반찬 만들기 소모임’이나 성미산 마을의 동네부엌(관련 링크)이 그 예이다. 가구 형태도 음식도 다양해 진 시대에 걸맞게,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집밥을 유지해 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집밥의 미래를 설계하는 페미니즘

오래 전부터 그러한 시도를 해온 페미니즘의 실천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여성운동은 여성에게 단단히 붙어 있는 가사·돌봄의 책임을 떼어내어 사회가 분담하는 방안들을 제안해 왔으며, 그중에는 집밥 노동의 사회화도 포함되어 있다. 학교급식을 먹을 만한 밥, 안전한 식단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서 온 것도 여성운동이다. 아동과 노인 돌봄의 사회화는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집밥 노동을 ‘탈엄마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상적인 집밥 노동은 여전히 엄마와 아내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이 제시한 해결책은 부부의 가사노동 분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현실도 문제지만, 집밥 노동이란 게 그 특성상 ‘공평하게’ 분담하기 어려운 일이란 이유도 큰 것 같다.

요리는 다른 어떤 집안일보다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노동이라 진입장벽이 높다. 그러다보니 잘해야 셰프와 보조 정도의 분담이 가능하고 보조가 셰프를 역전하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집밥 노동을 가르치는 사회적 체계도 부재한 상황에서 요리를 배운 적 없는 초보 주부들은 스스로 노하우를 터득하고 식구들도 가르치고 일을 분담하기 위해 싸움도 해야 했다. 여성들이 각자의 집에서 개별적으로 다 해 온 것이다.

더 문제는 가사노동의 분담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분담으로 집밥 노동을 꾸려나갈 수 있는 가구는 과거에도 일부였고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다. 전체 가구의 25%가 넘는 1인 생활자들이 집밥 노동을 지속할 대책은 ‘정상가족’을 전제로 한 상상력의 범위 안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

먹방, 쿡방 열풍이나 백종원에 대한 열광이 어떤 ‘결핍’의 징후라면, 그것은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 각자의 밥상을 어떻게 차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의 부재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식당밥과 라면, 편의점 도시락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내 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된 건 이미 오래전이지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다. 시장도 ‘엄마’도 아닌, 어떤 해법을 찾는 것이 우리 시대 페미니즘의 숙제가 아닐까.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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