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공항,
    자본주의의 축소판
        2015년 07월 21일 04: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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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내일 아침에 집을 떠나 여행에 나섭니다. 제 고향 레닌그라드를 거쳐 학술행사차 한국과 일본에 갈 예정입니다. 여행이 곧 시작되니 절로 생각은 내일 갈 오슬로 공항으로 옮겨갑니다.

    ‘공항’…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질서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은 국제공항과 국제선 비행기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세히 보면 이 사회의 주요 계층들은 다 철저히 명시적으로 구분되어집니다.

    자본가들은 늘 1급, 비즈니스 클래스 등을 타고 다닙니다. 근검절약의 유럽 북구라 해도요. 보니까 저들의 계급 안에서는 이건 거의 “사나이 명예”의 문제인 모양입니다.

    대체로 오슬로발 국제선 비행기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중간규모 기업의 주주와 기간 임원, 소수의 고소득 전문가(변호사), 가끔가다가 최고급 정치인(각료급) 정도입니다.

    자본가들의 특권인지라, 대학 같으면 총장마저도 보통 관비로 출장갈 때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갈 수 없습니다. 교원들도 마찬가지인데, 마일리지가 누적돼 자동적으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거의 모든 제 동료들의 숨겨진 희망입니다. 정규직 교원들에게는 그들의 바로 위에 있는 자본가/고급임원계급의 특권은 꿈인 모양이죠.

    오슬로1

    오슬로 공항 국내선 청사의 모습(위키피디아)

    남유럽 등의 휴양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특히 여름에는 주로 정규직인 노동자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규직에게는 1년간 2-3번 휴양 외유는 기본입니다.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노르웨이 정규직 노동자층 그 자체는 남유럽의 중산층 등에 해당되는 셈이죠.

    그런데 휴양지행 비행기 아니면 대개는 승객의 상당수는 출장가는 샐래리아이트, 즉 유식층/중산층(기업 관리자, 화이트칼라 근로자, 전문가 등)입니다. 이들은 기내에서 대개는 컴퓨터로 발표 준비 등을 하거나 <파이낸셔날 타임즈>지 등 전문층의 “고급” 영자신문들을 열독합니다. 반대로 휴양지로 떠나는 노동자들은 대개 노르웨이어로 대중지(<VG> 등)를 읽죠, 고급 영자신문을 잘 보지 않습니다.

    노르웨이 비정규직(전체 근로인구의 9%)이나 실업자(전체 근로인구의 약 3%)는 외국에 자주 나가지 않습니다. 실업자 같으면, 실업수당 수령의 조건은 외유 포기이며, 외유하려면 복지사무소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한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흔히 공항 건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의 근로자들의 8할 이상이 비정규직이지만, 오슬로는 그 정도는 아니죠. 한데 비정규직 수는 오슬로에서도 늘어납니다. 공항 노동자들은 고용형태와 종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관리직(국경 수비대 등)은 예외 없이 백인/노르웨이 토박이지만, 서비스 노동자(판매원 등) 중에서는 노르웨이에서 정착한 비서구 이민자의 비율이 약 3-40%에 달합니다.

    하급 서비스 노동자(청소 업무 등)들은 예외 없이 비백인 이민자들이고, 다수는 여성입니다. 대부분은 간접 비정규 고용이죠. 공항 건설 노동자들은 거의 다 비정규 간접 고용식으로 들어온 동구 단기계약 노동자들이고 저임금과 악조건에 시달립니다. 공항이라는 소우주에서 이 사회의 현실은 다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기업 관리직이나 휴양지로 떠나는 정규직 노동자 아니면 비행기에서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얼굴들은 노르웨이로 오는 각종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러시아행 비행기라면, 승객의 절반은 대개 러시아계 여성 이민가사/재생산 노동자, 즉 노르웨이로 결혼이민 온 러시아 여성들입니다. 주변부 국가 러시아와 제1세계 국가 노르웨이 사이의 관계인지라, 러시아 남성이 결혼해서 오는 것은 물론 거의 없죠. 가끔 이 이민 여성들이 자녀를 동반하여 고향인 러시아로 휴가 가는 모습을 보는데, 그들이 자녀들에게 러시아어를 해도, 자녀들이 러시아어로 대답하는 경우는 거의 전무합니다.

    불란서인/노르웨이인 혼합 가정이라면 불어/노르웨이어를 다 하겠지만, 잠재적 적성국가이자 제3세계 국가인 러시아의 언어를 선진국에서 왜 하겠습니까?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러시아어로 몇 단어 발화했다가는 왕따가 되기 십상입니다. 혼합 가정 아이들이 그걸 빨리 눈치채서 대개 밖에서는 오로지 국어, 즉 노르웨이어를 씁니다. 나토 회원국의 훌륭한 국민이 되게끔요.

    또 가끔 화란국 암스테르담을 거쳐서 노르웨이로 돌아올 때에 필리핀에서 오는 하녀(au pair)들과 같이 옵니다. 비행기 안에서 거의 말하지 않고 자기 작업이나 독서에 몰두하는 노르웨이인들과 달리, 필리핀 노동자들은 많이 웃고 말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타자들과 이렇게 사귀고 연대하지 않고서는 2년 동안 가정 친지를 떠나 춥고 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노조 가입 권리도 없이 최처임금 이하의 봉금(한화 약 30~40만원+숙식 제공)으로 살아갈 수 없겠죠?

    공항과 국제선 비행기는 이 미친 차별과 착취의 세계의 축약판입니다. 아주 노골적인 축약판이죠. 이 세계에서는 기동성이란 중산계급의 특권 중의 하나이자, 노동자들에 대한 국제적 착취를 가능케 하는 잉여가치 수취의 중요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공항과 항공로선들은 이 체제의 동맥 같은 것입니다. 이 동맥 속에서의 혈액순환의 모습을 보면, 이 체제를 그대로 해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공항은 교실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에서는 국제선 안 타본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러시아에서는 국외여행 유경험자들은 전체 인구의 3할도 안됩니다. 물론 러시아의 영토가 넓어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인생의 재미를 다 볼 수 있지만…그래도 총인구의 이런 기동성 능력의 차이는 이 세계체제 속의 여러 사회들의 위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잔혹하고 불공평한 체제죠.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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