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떠나보낸 뒤
투사가 된 아버지의 이야기
[책소개] 『유월의 아버지』(송기역/ 후마니타스)
    2015년 07월 18일 0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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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박종철의 아버지’로 기억되는 올해 여든여덟 노인. 1987년 1월 14일, 부산시 수도국 공무원 정년 퇴임을 한 해 앞두고, 동네 목욕탕을 관리하며 살아갈 노후를 준비하던 그에게 둘째 아들 종철의 부고가 전해졌다. 세상은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아들의 못다 한 삶에 이어 자신의 길을 내딛겠다는 다짐이었고, 그는 30여 년에 걸친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으로 이를 증명했다.

1988년 1월 12일, 떠난 자가 남긴 길

인간의 생애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때로 새로운 굽이를 만들거나 전혀 다른 줄기를 뻗는 순간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운명은 느닷없이 닥친다. 박정기에게 1987년 1월 14일이 그랬다. 이날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현재 경찰청 인권센터) 509호실에서 박종철이 고문 끝에 사망했다.

박정기는 10년 뒤 일기장에 그날 겪은 고립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처절한 심정으로 이 넓고 큰 지구에서 나 혼자 변을 당하는 외로움, 사지가 마비되는 고독감, 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마음이 바로 이날이었다.” 이틀 뒤, 아들이 왜 떠났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채로, 임진강 어느 샛강가에 유해를 뿌렸다. 아들이 죄 없이 죽은 게 힘없고 못난 아비 때문이라고 생각한 박정기는 가까스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1년이 지났다. 그사이 아들에 관한 기사를 모았다. 거리에 나갔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고문 문제를 알게 되었고,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썼다. 이 기간 그가 겪은 변화는 지난 육십 평생에 걸친 삶의 변화보다 컸다. 6월 항쟁과 이한열 장례식, 노동자 대투쟁, 제13대 대통령 선거……. 혼란스러운 시간을 버틸 수 있던 것은 아들이 걸었던 길을 헤아려야 한다는 다짐 덕분이었다. 1988년 1월 12일 아들의 1주기를 이틀 앞두고 샛강가를 찾았다. 얼마 뒤 그의 유가협 활동이 시작되었다.

유월의 아버지

28년, 세상에 남은 자들의 싸움

“이부자리에 누우면 철이가 고문을 버티고 버티다 최후에 가슴속에 간직한 게 무엇일까 생각했지. ‘아들을 생각하며 한 치 부끄러움 없이 싸워 나가자.’ 다짐하면서 잠들곤 했어.”

최루탄에 아들을 잃은 배은심(이한열의 어머니)은 이 땅에서 다시는 최루탄이 쓰이지 않게 하겠다며 힘을 다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전태일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이끌었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대공분실에서 자식을 잃은 박정기는 ‘고문 없는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의문사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혼신을 다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새로운 세상에 눈뜬 사람들이 모여 유가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사연을 품고 찾아온 회원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결국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명예를 되찾고 의문사 진상을 규명하는 활동은 떠난 이들을 위무하는 동시에, 더는 세상에 억울한 이가 없게 하려는 시도였다. 내 아픔으로 세상의 고통을 마주하는 행동이었다. 1988년 10월 17일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135일간 진행된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은 국회 청문회로 이어졌다. 그래도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박정기와 유가협 사람들의 싸움은 10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다. 1998년 11월 4일부터 422일에 걸친 농성을 진행했다. 이듬해 12월 28일 마침내 두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농성 420일째였고, 의문사 진상 규명 투쟁을 시작한 지 12년 만이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고 이틀이 지난 12월 30일에야 농성을 풀었다. 세상은 조금 더 나아졌다.

2015년 6월, 여전히 혹독한 세상

그러나 과거의 유산은 남아 있으며 새로운 질곡이 만들어진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은 대법관이 되었다. 그 시절에 일어난 의문사 가운데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죽음도 있다. 허영춘(허원근의 아버지)은 1984년 군 복무 중이던 아들의 죽음과 관련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박종철 추도식의 표어는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였다. 음험한 수사실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줄었겠지만,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옥죄어진다. 스타케미칼 해고 노동자 차광호는 407일간 굴뚝에 머물렀고, 콜트콜텍 조합원들의 싸움은 10년째로 접어들었다. 최루탄은 쓰이지 않지만 그보다 강력한 최루액이 평택 공장을 뒤덮었고, 이후로 거리의 시민들에게 발포되고 있다.

더디게 지나가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세월은 무심히 흐른다. 2009년 용산 참사 유가족을 받아들인 이후 유가협 회원은 더 늘지 않고 있다. 명단에 변화가 없지는 않다. 기존 회원이 세상을 떠나면 그의 형제가, 남편이, 아내가 회원이 된다. 고 이소선(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병섭(이한열의 아버지), 고 이오순(송광영의 어머니)…….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 자식 곁으로 떠남에 따라 회원 명부가 바뀌어 간다. 유가협의 회원은 늘고 있지 않지만, 단지 그뿐 세상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88세, 박정기의 생이 말하는 것

박정기는 자식을 따라 한 맺힌 삶을 마감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먼저 떠난 유가족이 남긴 유언은 최우선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라고도 했다. 유가협에 몸을 둘 때 이미 예순이었던 그는 이제 여든여덟, 미수의 나이가 되었다. 등은 굽었고, 가는 곳도 집 주변, 병원, 경로당 정도로 줄었다. 유가협 활동도 끊기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든 중반까지 각처에서 싸우는 이들과 함께했다. 그늘진 자리에서 외롭게 싸우는 모든 이들이 박정기, 바로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민주주의란 완성되지 않는 ‘끝없는 싸움’임을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일깨운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박정기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나?”였다. 그럼에도 그가 어렵게 지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절의 저항과 연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는 게 인생의 남은 몫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떠난 이가 남긴 길을 찾아내 거기서 자신의 걸음을 내딛은 것이 박정기의 인생이었다. 자신의 고통에 갇혀 지내는 대신, 다른 이의 아픔과 연대하며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인생이었다. 떠난 자의 빈자리에서 남은 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시대에 박정기의 생이 주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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