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기술의 정치 감수성
    [교육담론] 두 개의 세계관 ①
        2015년 07월 14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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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이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한 코스모스 13부작을 보고 있다. 현란한 그래픽에 잘 짜여진 구성은 마치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영미권의 예술이나 다큐는 과학기술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최근의 본 영화만 봐도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등 첨단 과학기술을 소재로 나름의 주제 의식을 담은 영화들이 기억난다.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산드라 블록이 두 다리를 딛고 지면에 서는 장면은 중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듯해 인상적이었다.

    지오그래픽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방송 화면

    반면 한국의 문화는 대체로 사회역사적인 갈등을 소재로 한다. 그냥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면 각종 사극이 그렇고 광해, 변호인 등이 그랬다. 그리고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소수의견도 유사한 것 같다.

    이는 곡절 많았던 한국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0년 광주-6월항쟁으로 이어졌던 민주화운동사,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 집권과 역전 과정 그리고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사회적 갈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낙후한 저개발 국가인 것은 아니다. 한국은 명실공히 최고의 IT 강국이고 제조업에 관한 한 첨단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토양이 대중적이고 역동적인 문화적인 감수성으로 성장하여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조직화된 사회역량과 철학, 정책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다.

    시작은 박정희 정부였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정책은 70년대 중후반 많은 기능공과 엔지니어를 필요로 했다. 70년대 후반 학번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반유신 투쟁으로 고달픈 삶을 보내긴 했지만 취직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80년대 초반이 되면 286 컴퓨터와 청계천이 첨단 문물의 요람이었다. 한국의 문과형 엘리트들이 한국 사회를 가망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혁명을 논하고 있을 때 청계천에서는 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맹아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 당시 8비트 키드의 대표적인 인물이 안철수나 이찬진 같은 사람이다.

    02년 월드컵과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현대화된 감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월드컵 거리공연에서 붉은 악마는 젊고 역동적인 한국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여중생 사망에 대한 추모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노무현-이회창이 붙은 대선은 PC통신으로 무장한 젊은 한국과 오프라인 신문에 익숙한 낡은 한국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무산되던 순간 지휘부도 없는 PC통신 공간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희한한 역모(?)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의를 끝낸 젊은이들이 대선 투표날 늦은 점심을 먹고 투표장에 나와 세상을 흔들어 버렸다.

    이 장면을 송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정몽준이 지지 철회를 선언하던 12월 18일 밤 10시, 뉴스 속보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정몽준의 청운동 자택 문을 두드리다가 허망하게 돌아서는 노무현의 당황한 표정이 다음날 저녁에도 재현될 것임을 누구 하나 의심치 않았다. 권력의 드라마라니, 그 씁씁한 뒷맛을 마치 자신의 체험처럼 다시며 자리에 들었다. 한나라당은 이 기쁜 소식을 전국 지부에 타전했다. 후보단일화 이후 미발표 여론조사에서 줄곧 5~10% 차이로 열세를 보였던 한나라당에게 그것은 신이 내린 선물인 듯 여겨졌다. 한나라당 지부는 승리의 예감에 샴페인을 미리 터뜨렸고 이회창 지지자들은 처음으로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 시각부터 2030세대의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눈치 챈 사람은 드물었다. 봉화는 밤새도록 전국 세대원들의 잠을 깨웠다. 휴대폰은 일시에 수십 개의 긴급 메시지를 세대 네트워크에 실어 보냈다. 날이 새자, 인터넷 신문을 열어 본 세대원들은 긴급 사태가 발생했음을 알아 차렸고 여기저기서 올라온 제안문, 전략안, 선언문들의 내용을 검토하느라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표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은 접속자가 폭증해 한 때 전산망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날 하루 동안 인터넷신문 접속건수가 300만을 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30은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사태를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했으며 그에 맞춰 신속한 대응 전략이 채택되었다. 작전 사령부는 없었지만 수십 만 개의 제안과 의견이 하나의 전략으로 수렴되는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정몽준 배반, 노무현으로 집결하라’라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느긋하게 투표를 마친 오전을 보내고 작전명령을 손에 쥔 세대원들은 오후 느지막이 투표장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마지막 결제를 하듯 기호 2번을 꼭 눌러 찍었다”(송호근,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췌)

    그렇게 태동한 젊은 한국은 05년 시작부터 시작된 교육, 부동산 파동(?)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07년 MB 정권의 출현은 이해할 만했다. 새로운 한국의 저력은 08년 촛불-09년 노무현 대통령 사망-10년 지방선거-11년 안철수와 박원순으로 이어지며 회복되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08~11년의 대중적 동력과 12년 4월 총-대선의 정치지형이 달랐다는 점이다. 08~11년 대중적인 동력은 안철수와 박원순으로 모아졌다. 안철수와 박원순은 각각 80년대 IT 문화, 90년대 시민운동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12년 총선은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연합전선이었고 12년 주자는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 출신이었던 문재인이었다.

    70~80년대 이후 두 개의 세계관이 각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사회를 불구화되고 기형화된 사회로 보고 혁명을 해야 한다며 절규했던 문과형(?) 엘리트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스티브 잡스와 인터넷에 열광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했던 이과형(?) 엘리트가 있었다.

    80년 이후 전자가 주도권을 잡았지만 시대의 흐름은 후자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분기점은 02년 대선이었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전자의 흐름에 서 있었고 문재인과 이정희는 그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현대화된 한국과 어울리지 않았다. 문제는 충분히 성장한 후자의 흐름과 세력, 집단과 감수성이 한국사회를 정치적으로 대변할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교육 문제에서도 이런 잔재가 짙게 남아 있다. 한국 진보교육 담론의 핵심인 평준화, 평균주의, 수학과학의 경시와 인문학 중심주의, 자연친화적 성향, 선행학습 금지법 등의 담론은 70~80년대 초반의 패러다임과 맞닿아 있다. 아마도 이를 해체하지 않는 한 진정한 교육적 비젼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에 계속)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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