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 '장애인 시외이동권'
    정부 책임 외면, 민간에만 책임 부여
        2015년 07월 10일 05: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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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단체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업체를 대상으로 시외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이 막중한 시외이동권 보장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은 제외된 것이라 판결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6부(부장판사 지영난)는 10일 장애인 3명이 금호고속 주식회사와 명성운수 주식회사, 국토교통부, 서울시, 경기도를 상대로 “장애인 등의 시외이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라며 제기한 차별구제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다만 재판부는 “이동편의증진법 규정이 모든 유형의 버스에 동일한 시기에 같은 비율로 저상버스에 관한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규정으로 보기는 어렵고 기술적, 재정적 조건을 전제로 점진적인 의무를 부과한 것으로 보인다”며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국토교통부에 대한 청구 부분에 대해선 “장애인 시외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했고, 서울시의 경우에도 “저상버스 보급과 운행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경기도는 “저상버스 도입의무가 없다”고 보고 책임을 묻지 않았다.

    반면 금호고속과 명성운수 민간운송업체 2곳에 대해서 재판부는 “버스회사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이동편의 증진법 규정상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휠체어 승강설비를 도입하거나 휠체어 승강설비를 도입할 때까지 보조자를 통한 승하차 등 다른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어 “두 버스회사가 운행하는 광역급행형, 직행좌석형, 좌석형 버스에 휠체어 승강설비가 설치돼 있지 않고 승하차 편의도 제공되지 않고 있다”며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동등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승하차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판결 이후 입장을 밝히는 장애인단체(사진=박경석님 페이스북)

    장애인 손을 들어줬지만 정부 책임은 외면한 판결 

    이날 재판부의 판결은 장애인계가 처음으로 일부 승소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장애인 차별 금지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민간업체만 돌린 것이라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우선 장애계는 ▲저상버스 등 장애인 편의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약 1억 7~8천만 원)을 민간업체가 모두 부담할 여력이 되느냐는 점과 ▲민간업체들이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벌금을 내는 쪽을 선택할 경우 등을 이유로 판결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애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직국장은 이날 <레디앙>과 통화에서 “이동증진법에 한해서 국가의 책임을 담보로 하려고 한 것인데, 과연 이 판결이 국가의 책임이 빠진 상태에서 얼마나 효력이 가질지 영향이 미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문 국장은 “일부 승소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국토부와 지자체의 책임은 온전히 빠져 있고 민간업체의 책임으로만 돌려진 것이다. 2개의 민간업체가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지 의문”이라며 “설사 받아들여져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지, 이에 드는 비용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민간업체에서 저상버스 도입 대신 비용의 부담 때문에 벌금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인한 여론의 왜곡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민간업체에서 실제로 판결을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이번 승소 판결만으로 장애인계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 여론의 비난이 빗발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이 ‘반쪽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문 국장은 “일반 시민들과 장애인 대중에게 상당히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예를 들어 장애인들도 ‘이런 판결이 났으니 그럼, 버스를 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뚜껑을 열어보면 (판결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차별 구제 신청으로 일부 우리의 내용을 들어주기는 했으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국가가 나서서 해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장애인계는 처음으로 승소했다는 점에 있어서 이번 판결이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에 동력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문 국장은 “처음으로 정말 아주 작게나마 승소를 했기 때문에 이 건을 가지고 우리가 활동들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며 “판결을 이행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하고, 이번 판결이 왜곡되지 않도록 잘 풀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도 이날 판결 직후 서울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판결은 국가와 지자체의 교통약자에 대한 이동권 보장 책임은 빠지고 모든 것을 민간사업자에게 떠넘긴 반쪽짜리 판결”이라면서 “국가와 지자체가 교통약자 이동권 보장에 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3월 장애계는 국토교통부, 서울시 및 버스운송사업체를 대상으로 장애인의 시외이동권의 보장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올해 3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5차례의 변론 기일을 걸쳐 양측에 화해권고를 내렸으나 양측 모두 항소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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