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한 인생이란?
        2015년 07월 09일 03: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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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치시대(일본 메이지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성공’(일본어 발음은 “세이코”)라는 말은, 근현대 동아세아에서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코드”가 되어서 한-중-일에서 개개인에게 거의 인생의 핵심어가 된 듯합니다.

    누구나 다 “성공”을 말하고 “성공”을 바라고 남에게 “성공”을 기원하고 또는 남의 “성공”을 시기하거나 “벤치마킹”하지만… 거의 상당수는 이 말을 아주 잘못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명치시대 이후 일상의 언어에서는 “성공”은 대체로 지배적 체제 속에서의 신분상승, 시쳇말로는 “출세”를 의미해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관적 삶의 질/행복감 등을 잣대로 삼는다면, 지배적 체제 속에서의 상위 배치 등은 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 미치지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선사해주지 않습니다.

    권력은 일면으로는 오만심을 낳기도 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역으로 자아자존감에 상처를 입혀주는 요인으로 작동되기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권력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가면 빠져갈수록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그리고 그 만큼 자기 자신을 무시하거나 명령을 들어주어야 할 대상만으로 아는 상대들을 더 많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평교원인 나는 굳이 학장이나 총장을 상대할 일이라고는 2-3년에 한번씩 될까 말까인데, 학장은 총장을 매주 (대개는 몇 회에 걸쳐서) 봐야 하며, 총장은 교육부 권력자들을 매월 봐야 하거든요.

    그리고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상대적인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국내에서는 근혜 영양은 “지존”이지만, 미국 대통령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미 국무성 차관보에게도 “마담 파크”는 “권고”라는 미명하에 명령을 하달해도 될 상대입니다. 아아, 정치권력의 세계에서야말로 남 위에 서려는 아집이 결국 무한번뇌를 낳는다는 불가의 진리를 가장 뼈저리게 이해할 것입니다…

    “주의자”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잣대가 될텐데, 여기에서는 역사 진보의 속도가 한 개인 인생의 길이를 보통 초과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역사는 장기적으로는 진보하지만 아주 느리게 진보하고, 사람은 거기에 비해 좀 빨리 죽는 경향입니다.

    “사회주의 혁명” 같이 커다란 이야기를 제쳐두고도 쉬운 일상적 진보 속에서의 사례를 들자면, 체벌근절론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미 1920년대 초반에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인격 존중”이 시대적 화두가 되는 상황에서는 박승빈 등 일각의 조선 리버럴들이 이미 들고 나왔고, 조선공산당의 여러 요구 중의 하나는 “노예교육 혁파”이었는데, 체벌 근절도 그 속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체벌이 남한의 땅에서는 언제쯤 근절됐는가요? 이런 요구들이 처음 나온 지 약 90년 후, 학생인권조례 반포 등으로 그 근절의 과정은 시작됐습니다. 일체 학생들에 대한 무상급식의 요구를, 조선 공산당은 이미 1920-30년대 계속 해왔습니다 (김단야와 최성우가 낸 조선공산당 강령을 보면 거기에서 나옵니다: РГАСПИ Ф495. Оп. 20. Д.331, Л. 82-102, 1934년). 그걸 실행하는 데에 70여년이 소요된 셈이죠…

    그러니까 사회와 개인의 해방을 위해 이미 식민지기에 싸우신 분들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상대적 자유에 크게 기여하신 만큼 성공하셨지만, 대체로는 본인은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이런 게 인생입니다.

    참, 조선의 탁월한 공산투사인 김단야도 최성우도 동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무고로, 혁명의 수도라고 본인들이 생각했던 모스크바에서 쓸쓸한 감옥의 총살방에서 인생을 마감한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존재가 비극적이라는 느낌을 더더욱 강하게 받습니다…

    체제 순응의 길은 결국 퇴락의 길이자 불행의 길이며, 체제에 대한 저항의 길은 그 속성상 비극적 요소들이 아주 많이 내재돼 있습니다. 혁명이란 늘 순탄하게 진보하는 것도 아니고 진일보 퇴일보하며 굴곡지고 수많은 후퇴와 왜곡과 변질들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그러면, 외부적 차원에서 “나”의 일이 잘되고 못됨을 떠나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잣대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봅니다. 불가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저는 개개인 성공의 여부를 개개인이 그 죽음에 이르러서, 죽어가는 과정 내지 죽는 순간에 알게 된다고 사유합니다.

    삶도 고통이며 죽음도 고통이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 처하게 되는 인간은 양쪽의 상대성을 체득하게 되고 일시적으로나마 사생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생의 고해를 떠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해탈의 맛을 시식하는 과정이 될 수 있는 소질을 지니죠.

    그러니까 만약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지니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해낼 만큼 해냈다, 부끄러울 게 없다, 되고 안되는 걸 떠나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인지하게 되면… 이 인생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마다 그 내면 속에서 자타를 평가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기준을 다 지니고 있는데, 죽는 순간에야말로 그 기준을 바로 직시하고, 그 렌즈를 통해 자기 인생에 마지막의 점수를 내리는 셈입니다…

    저는 제 임종이 어떨는지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합니다. 아마도 꽤나 고통스럽고, 성공이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의 예감이지만 말씀이죠. 제 내면 속의 보편적 기준으로는 부자나라에 빈대 붙어 교육관료로서 현실적으로 무탈하게 산다는 게 그다지 선한 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왕 이런 업을 탔으면 순응의 악업을 또 다른 선업으로 상쇄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요…

    그런데 아무리 상쇄한다 해도, 체제에 현실적으로 편입되어지는 순간 인간 속의 어떤 영적인 부분은 그냥 죽고 마는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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