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의 단상들
    [기고] 축배는 짧게, 새로운 투쟁 준비해야
        2015년 07월 06일 03: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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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상 1 ‘반대’ 투표의 양뿐만 아니라 그 구성에 주목하자

    7월 5일 실시된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채권단안에 대한 ‘반대’가 61%를 얻어 승리했다. 놀라운 결과다. 사전 여론조사들에서는 채권단안 ‘반대’와 ‘찬성’의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했고 그 차이도 오차범위 안이었다.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도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찬성’ 쪽이 유리하지 않겠냐고 보았다. 은행들이 영업 정지하는 것을 목격한 그리스 국민들이다. 게다가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독일 정부가 ‘찬성’에 투표하지 않으면 협상도 없다는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런 ‘공포’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찬성’ 쪽이 간발의 차로라도 승리하지 않겠냐는 전망이었다. 필자도 일리 있다 보았다.

    그러나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결과는 딴판이었다. 채권단안 ‘반대’가 ‘찬성’을 20% 차로 따돌리며 61%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런 예측을 내놓았다면 아마 “열에 들 뜬 좌파”라는 핀잔이나 들었을 것이다. 해외 주요 언론의 보도와 그리스 민심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괴리가 있었는지 확인된 셈이다.

    ‘반대’가 승리한 힘은 주로 젊은 세대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 사전 여론조사들에서도 30대 및 그 이하 연령층에서는 ‘반대’와 ‘찬성’이 거의 7 대 3의 분포를 보였다. 장년층에서는 ‘반대’ 쪽으로 기운 백중세였고, 50대 이상에서는 청년층과 정반대의 분포(‘반대’ 3 대 ‘찬성’ 7)가 나타났다. 채권단이 삭감하려고 안달을 한 게 연금인데도 불구하고 세대 간 의견 차이가 이러했다. 정확한 것은 투표자에 대한 사후 조사 결과를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압도적인 ‘반대’ 여론을 보인 젊은 세대가 투표에 가장 적극 임하면서 ‘반대’가 60%를 넘게 된 것 아닌가 추측해본다.

    즉, ‘반대’ 61%의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 구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급진좌파연합(이하 ‘시리자’)이 만년 소수 정당을 벗어나 집권에까지 이르게 만든 핵심 지지층이 다름 아닌 젊은 세대였다. 그런 이들이 이제는 그리스 사회에 2/3 가까운 긴축정책 반대 블록을 구성하는 핵심 세력으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재정 위기와 긴축정책의 최대 피해자다. 그래서 가장 적극적으로 시리자를 지지하고 채권단안에 반대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채권단안 반대의 ‘장기적’ 여파를 가장 우려할 세대인데도 과감히 ‘반대’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미래를 직접 살아갈 이들이 누구보다 분명하게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선택하고 나섰다. 긴축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면서 감내해야 할 고통보다는 이에 과감히 반대함으로써 치러야 할 고통 쪽을 택했다. 그리스 안팎의 눈길이 이번 국민투표의 결의를 더욱 준엄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 국민투표

    국민투표 후 긴축정책 반대 진영의 집회 모습(BBC 방송화면)

    단상 2 여전히 열쇠는 독일 정부가 쥐고 있다

    그럼 다음에 벌어질 일들은 무엇인가? 이를 내다보려면, 우선 이번 국민투표가 철저히 협상 과정의 일환이었음을 되짚어봐야 한다.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를 선포하고 나서도 채권단에 새 협상안을 제출했다. 그리스 협상단의 일원인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필자는 방금 그의 사임 소식을 들었다)은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승리하고 나면 “24시간 안에라도 협상을 타결 지을 수 있다”고 특유의 호기 어린 전망을 내놓았다. 국민투표가 협상을 깨는 것이라던 채권단 쪽 비난에 따른다면, 모두 말도 안 되는 짓들이다. 그래서 주류 언론의 지면은 국민투표 실시가 중요한 결정을 국민들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정치 행위라느니 ‘포퓰리즘’이라느니 하는 비난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에게 이는 더없이 논리적으로 일관된 행보였다.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처음 발표할 때부터 이게 협상 과정의 한 절차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 국민들을 안심시키거나 채권단 쪽을 교란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국민투표는 시리자 정부가 구제금융 협상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수순이었다.

    전쟁의 논리와 협상의 논리는 다르지 않다. 전쟁이든 협상이든 우리의 강점을 최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화하고 강점을 최소화해야 한다. 국민투표 실시 결정 전까지 협상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채권단의 강점과 그리스의 약점이었다. 그리스 정부의 약점은 특히 ‘유로존 잔류’와 ‘긴축정책 폐지’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데 있었다. 채권단은 “유로존 잔류” 여부를 지렛대 삼아 그리스 정부의 “긴축정책 폐지” 요구를 끊임없이 후퇴시킬 수 있었다. 협상장 안에서는 이게 먹혔다.

    시리자 정부로서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무대를 옮겨야만 했다. 그들의 강점은 물론 대중 정치에 있었다. 그래서 치프라스 총리는 전장을 브뤼셀의 협상장이 아니라 그리스 국내의 거리와 투표소로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시리자 정부는 자신의 강점을 전 유럽에 시위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그리스의 다음 목표는 이렇게 과시된 힘을 바탕으로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다.

    현재 그리스의 구체적인 목표는 부채 조정(즉, 일부 탕감)의 합의다. 긴축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시리자 정부 스스로 상당한 양보를 했다. 다만 이들은 이 양보의 대가로 부채 일부 탕감을 의제에 올렸다. 국민투표로 국내의 탄탄한 지지를 등에 업은 그리스 측은 일정한 긴축 기조를 전제한 구제 금융 패키지를 받아들이더라도 반드시 이와 함께 부채 조정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그리스의 연간 예산 액수를 조정하거나 한, 두 가지 사안에서 긴축 정책을 물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그리스에게 더 긴요한 성과가 될 것이다. 부채 총액 조정은 미래 세대의 삶이 기나긴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직결된다. 반면 긴축 기조는 어느 때라도 재협상을 통해 다시 바꿔낼 여지가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정국 와중에 채권단에 보낸 제안에서 IMF의 협상 배제를 요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IMF를 제외하고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만 상대한다면, 미래 어느 시점에든 유럽 내 세력 관계의 변화에 따라 긴축 기조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리자 정부는 부채 조정이야말로 장기 항전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열쇠는 여전히 독일이 쥐고 있다. 독일 정부가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에 어느 정도 당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 측의 강점이 다져진 만큼 채권단 쪽 약점이 불거진 것 역시 분명하다. 당장 부채 조정 문제를 놓고 온건파인 프랑스 정부와 틈이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 정부의 중요한 노림수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리스가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균열까지 나타났다. 국민투표 실시하기 직전에 IMF가 그리스의 구제금융 패키지 안에 부채 탕감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리스 경제 회생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 벼랑끝 전술 때문에 그리스가 결국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와 러시아와 동맹할까봐 염려한 미국이 IMF를 뒤에서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그리스 협상단의 또 다른 일원인 유클리드 차카탈로스 경제담당 외무차관의 말처럼, 이제 그리스는 국민투표 결과를 한 손에 쥔 데 더해 다른 한 손에는 이 IMF 성명까지 쥐게 됐다. 부채 조정을 쟁취하기 위해 완전 무장을 마친 격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력 균형의 미묘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아직 완강하다. 독일은 유로존 안에서 긴축 기조 선회를 허용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부채 탕감의 선례를 만드는 데도 절대 반대다.

    아마 앞으로 며칠 사이에 독일의 입장이 선명히 정리될 텐데, 필자는 여전히 비관적이다. 부채 조정에 대한 독일의 완고한 반대 때문에 협상이 다시 공전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는 당장 은행 위기에 내몰리거나 제2, 제3의 디폴트를 반복하게 된다. 이때에 금융 시장이 겪을 충격이 어떠할지는 독일 정부로서도 예상하기 힘들다. 오직 이 변수만이 독일의 입장이 일부나마 변화하도록 만들 것이다.

    독일 정부의 그간 기조를 감안한다면, 이들은 부채 조정 요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협상된’ 그렉시트(Grexit.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과 그리스 정부의 상호 합의에 따라 그리스의 질서정연한 유로존 이탈, 드라크마화 복귀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런 ‘협상된’ 그렉시트 아래에서라면 오히려 부채의 일부 조정도 합의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독일로서는 ‘유로존 안에서’ 부채 탕감의 선례를 남기지 않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유로존 안에서는 오로지 ‘규칙’만 있을 뿐 어떠한 ‘예외’도 없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 엘리트들의 신앙이다.

    즉,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에 대한 독일의 전략이 아니다. 유로존에 대한 독일의 전략이다. 다시 문제는, 그리스가 아니라, 유럽이다.

    스페인

    올 1월 포데모스가 주도한 긴축정책 반대 집회에 모인 10만여의 모습(채널4 방송화면)

    단상 3 진짜 무대는 실은 그리스가 아니라 스페인이다

    국민투표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쓴 그리스 민중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진짜 무대는 실은 그리스가 아니다. 11월 총선을 앞둔 스페인이다.

    스페인도 재정 위기 국가다. 그리고 작년부터 포데모스라는 신생 좌파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그리스가 아니다. 이 나라는 인구가 5천만에 달하고, 농업과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역사-문화적으로는 거대한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연결돼 있다. 그리스에 비해 긴축 정책 강요에 맞서 장기 항전을 벌일 잠재력이 풍부하다. 그렉시트는 유로존의 운명과 직결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페인의 저항과 이탈은 충분히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유로존 엘리트들로서는 11월 스페인 총선 결과를 ‘관리’하는 게 급선무다. 이제까지는 좀 방심했다. 스페인 시민사회는 그리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따라서 안전판도 더 강하리라 내다봤던 것이다. 가령 포데모스가 약진하자 별 볼 일 없던 우파 지역정당 시우다다노스를 ‘반부패정당’으로 띄워서 대항마로 키울 수 있었던 게 그런 차이의 결과다.

    그러나 최근에 그 안전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뚫렸다. 지난 5월에 실시된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포데모스가 참여한 좌파 선거연합이 이 나라 제1, 제2의 도시인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의 시장을 배출했다. 일단 포데모스가 다른 좌파 정파들과 ‘시리자형’ 정당연합의 초보적 형태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하지만 더 불길한 것은 마드리드에서 좌파 선거연합이 사회주의노동자당(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연립정부를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급진 좌파만 시리자 사례를 학습한 게 아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도 파속(PASOK, 시리자에 지지층을 빼앗긴 그리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례를 학습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파속의 운명을 반복하기보다는 차라리 포데모스 등과의 공동 집권 가능성을 열어놓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스페인에서 포데모스나 여타 급진 좌파가 ‘참여하는’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유로존 엘리트들이 이런 상황에 개입할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그리스처럼 시리자 정부가 등장한 뒤에 애를 먹는 게 아니라 그런 정부의 등장 자체를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이를 실현할 길은 현재의 그리스 정부에 어떠한 역사적 성과도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곤궁한 현실이 11월 스페인 총선에서 더없이 효과적인 ‘반좌파’ 선전 수단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이 싸움이 유로존 엘리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 그리스와의 협상은 결코 원만한 타협점을 찾기 힘들다. 아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협상된’ 그렉시트를 통해 스페인 민중에게 저항의 결과는 추방뿐이라며 위협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리스 국민투표는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증거한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축배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이것은 끝의 시작도 아니고 시작의 끝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필자소개
    노동당 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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