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를 위한 실천론
    [책소개]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조성주/ 후마니타스)
        2015년 07월 04일 01:1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은 미국의 1960년대, 격변의 시대에 노동운동, 빈민운동, 지역사회 운동에 헌신했던 사울 알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지혜를 빌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 실망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한국 사회를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제안하는, ‘변화를 위한 실천론’이다.

    저자가 텍스트로 삼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1960년대 미국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의 열기가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해 극단주의나 회의주의로 전환하는 모습을 목도한 알린스키가 ‘다음 세대’들에게,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 고민해야 할 점들을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정리한 책이다.

    그의 조언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의 ‘다음 세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의 저자 조성주는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알린스키가 작은 ‘구원’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늘 격정적으로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변했지만 정작 바꾸고 싶었던 사회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을 지속하기보다는 현실의 생계와 내일에 대한 고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 거대한 벽과도 같은 현실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 모든 몸부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고 세상이 나아지는 속도보다 나빠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것처럼 보이는데. 나에게 알린스키를 읽는 시간은 이런 고뇌에 대한 위로이자 깊은 반성의 시간이었다. 알린스키가 날을 세워 비판하고 질책했던 어리석고 조급한 운동가들의 모습은 바로 필자의 모습이었다. ……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고 분노하면 할수록 내 자신은 더 편협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했다. 분노는 대상을 찾지 못해 가까운 주변으로 향하고, 섣부른 성공에 대한 기대만큼 실망은 크게 마련이어서 내면이 황폐해져 갔다. 필자가 그 방황의 순간에 알린스키를 만난 것은 작은 ‘구원’과도 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알린스키

    ‘2세대 진보 정치’의 새로운 언어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이 점에서 필자는 기존 ‘진보 정치’(어쩌면 선배 세대일 수도, 과거의 자신일 수도 있다)의 그것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더 평등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일수록 [나의 말이] 더욱더 불편하고 반박할 점이 많을 것이다. ……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열정보다 냉정을, 장렬한 투쟁보다 타협을 고뇌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37세의 나이로 ‘2세대 진보 정치’를 자임하면서 출사표를 던진 그가 뜻밖의 반향과 큰 관심을 불러온 것은 그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언어는 학생운동, 청년유니온 활동, 국회 보좌관, 서울시 노동전문관 등 다양한 현장에서의 경험과 좌절이 알린스키를 만나 분명해졌다. 저자는 알린스키의 책을 자신의 동료와 후배들에게 권하고, 강독 모임을 하고, 강의를 하고, 그리고 이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을 썼다. 이 책은 2세대 진보 정치를 선언한 조성주의 ‘새로운 언어’를 담았다.

    열정보다 냉정을, 장렬한 투쟁보다 타협을……

    무엇이 새로운가. 열정보다 냉정을, 장렬한 투쟁보다 타협을, 체제 밖에서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분노와 적대적 언어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상상력과 정치적 상대성을, 진보보다 더 넓은 세계를 …….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의 총알’을 꿈꾼다. 하지만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체제 안에서 오랜 시간 작은 성과를 얻으면서 싸워야 한다는, 일견 약해 보이는 이야기는 사실 냉정하리만치 비관주의적인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약자들의 싸움은 패배해서는 안 된다. 만약 패배할 것 같다면 무조건 도망치고 이길 수 있는 싸움만 골라서 해야 한다.”(알린스키) “약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변화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냉정해져야 한다. 돈과 권력, 심지어 시간의 여유와 같은 것을 포함해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한 번의 패배가 좋은 경험이 되어 다른 미래에 대한 희망의 씨앗이 될지 모르지만, 거의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번의 패배는 곧 모든 것의 종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열정은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무한정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열정도 수십 년을 같은 열기로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안타깝지만 사랑마저도 그러하지 않은가. 알린스키는 한순간의 열정이 아닌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변화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환상과 과도한 열정에 빠져 있다가 그 환상이 지속될 수 없음에 좌절하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환상에 빠지지 말고 ‘체제 안에서 일해 가는 법’을 익힐 것을 제안하고 있다. 알린스키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체제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 가는 길이 진보의 길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진보와 보수와 같은 것보다 복잡하고 넓고, 아름다운 영역

    “세상을 바꿔 나가는 과정은 사실 비관론에 근거하여 작은 희망을 가지고 버티어 나가는 것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을 것이고, 성공이라는 것도 길게 보면 작은 성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그 비관의 순간에 지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대부분 생활의 작은 행복일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상태에서 끊임없는 생명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단한 현실의 삶에서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예리한 정치적 입장보다, 때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다른 부분들에서 타인과 더 깊이 교감하고 서로의 삶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평범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과 공감하려 하는 것은 사실상 오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억하자. 인간의 삶은 진보와 보수, 정치와 운동 같은 것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고 넓은 영역이다. 그리고 늘 더 아름다운 곳이다.“

    한국 사회의 변화, 내 삶의 변화를 기대하는 데 지친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책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질 만족도가 전 세계 145개국 가운데 117위라는 소식,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다시 늘고 있다는 소식,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로 이민을 준비하는 ‘이민계’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에서 한발 나아가 변화에 대한 기대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 준다. 어쩌면 변화를 열망하면 할수록 실망이 커지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딜레마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이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에서 지쳐 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말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변화할 수 있는 곳”이라고.

    [책 편집자] 이 책을 덮고서, 불확실한 유토피아를 찾아 떠돌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 그곳을 접수하는, 영화 <매드맥스>의 교훈을 떠올렸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라던가,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는 교훈 자체는 진부하지만, 현실에서 그것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늘 새롭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