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국민투표,
    긴축 강요에 'NO' 투표를
    잘못된 처방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2015년 07월 03일 03: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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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들

    한 사람이 병상에 누워있다. 심각한 상황이다. 처음 입원할 때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담당의사는 알고 있다. 제약회사와 병원의 담합에 의해 부작용이 우려스러운 약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병원과 제약회사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어차피 사람 목숨보다는 병원과 제약회사의 이윤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환자 가족들 때문에 문제가 더 꼬였다.

    이렇게 된 이상 환자를 힘들게 하는 악물치료보다는 한방병원으로 옮겨 편안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약물치료를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병원 측은 막무가내다. 무식한 소리란다. 병원을 나가 이동할 때 아무런 조치도 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치료비용을 부풀려 정산하지 않으면 옮길 수 없다는 협박을 앞세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병원의 처방과 지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윽박지른다. 언론에도 알려졌다. 한국의 병실문화를 다루는 특집에 나온 것이다. 핵심은 의사 말 잘 안 듣는 환자였다.

    있을 법한 이야기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한 일도 생긴다. 약물이 임상적으로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계속 강요하기도 한다. 잘못된 처방에 책임을 지기보다는 그동안 그 약품을 사용하는 데 든 비용을 청구하면서 치료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약품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챙긴 엄청난 이익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이 그리스에게 강요하고 있는 ‘긴축’이 바로 그렇다. 그리스와 같이 외채 위기에 빠진 나라에서 긴축은 유럽 금융자본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몸의 병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병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손해만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라는 이름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있다. 긴축이라는 처방은 이미 곳곳에서 사회적 파탄을 초래했으며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계속 강요되고 있다. 다른 처방을 원하지만 ‘대안은 없다’고 일축하고 일단 치료비용부터 갚으란다.

    치료방법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보호자들에게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져 놓고 딴 소리 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협박한다. 양심적인 의사 몇 명이 병원과 의료산업계에 반발해서 지금의 치료 방법은 오히려 병세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반기를 들자 일부러 의료사고를 일으켜 그 의사들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사람 몇몇 죽더라도 그들을 병원에서 쫓아내고 싶은 것이다.

    그리스 은행들의 지불을 중지시킴으로써 공포를 조장하고 이것을 온전히 시리자 정권 탓으로 돌리는 여론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7월 5일 있을 긴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인 것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여론에 의해 매도된 시리자 정권의 변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의 여론은 그리스 정부가 돈 빌려 쓰고 갚을 때 되니 생떼 쓰고 있다는 비난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변명이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증상과 처방, 그리고 당장의 치료비용이 아니라 병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병원의 부주의한 치료와 의도된 오진과 잘못된 치료에 의해 병이 생기고 악화되었다면 병원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6월 29일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 수만 명이 참가해 구제금융안을 반대하자고 주장했다. ⓒ출처 Greek Solidarity Committee 페이스북(노동자연대 재인용)

    그리스 구제금융과 긴축정책, 신자유주의의 배경

    그리스는 2차 대전 직후 냉전의 무대였다. 소련과 서방은 동유럽과 그리스를 맞바꾸었다. 내전을 통해 좌파는 제거되었고 반공의 보루가 되었다. 냉전시대의 많은 지역이 그랬듯이 군부독재가 들어선다.

    그리스 자본은 국내의 생산적인 제조업 투자에 인색했다. 국제적인 조선업에 몰두했다. 전후 황금기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적 타협과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거대자본의 과두제와 독재를 견제할 만한 정치세력은 이미 내전에서 궤멸된 상태였다.

    1974년 군부독재가 몰락한 후 보수정당인 신민주주의당(New Democracy party)과 중도좌파인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이 번갈아 집권하게 된다. 그 동안 눌려 있던 사회적 욕구를 반영하는 타협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타협은 1980년대 PASOK에 의한 복지국가 확장으로 드러난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였다. 하지만 이 때의 공공의료와 서비스 확대, 임금인상 등에 소요된 비용은 거대자본과 부유층에 대한 과세에서 조달되지 않았다. 그들의 특권은 건드리지 못했다. 비용은 유럽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공공부채의 증가는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부채에 의존하는 공공부문 확장은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공존하게 된다. 1996-2004년에 수상이었던 코스타스 시미티스(Costas Simitis)가 중앙은행 총재인 파파데모스(Papademos)의 지원하에 경제자유화를 시도한다.

    이제 경제의 초점은 인플레이션 잡기에 맞추어졌으며 민영화와 탈규제가 추진된다. 노동비용을 낮추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다. 더불어 금융자율화가 도입된다. 투기가 만연하고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의 거품이 팽창한다. 2000년 유로존 가입은 국제수지에 따라 환율을 조정할 수 있는 경제적 주권을 상실한 대가로 그리스 자본이 팽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아테네 올림픽은 그 정점이었다.

    당연히 조선업과 은행업은 이러한 조건을 틈타 세계화의 붐에 올라탄다. 프랑스와 독일계 은행으로부터 차입이 팽창하고 소비붐이 조장된다. 프랑스로부터 유입된 자금은 프랑스 군수산업을 통한 군부 확장으로 연결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탈세와 부패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2008년의 대붕괴가 찾아온다. 2009년 GDP의 2.7%가 축소되고 실업률은 거의 9%까지 치솟게 된다. 거품은 사라졌지만 신자유주의적 팽창에 의해 잇속을 챙길 만한 큰 손들은 이미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탈세와 부패의 고리를 통해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그리스 자본가들이 이 책임을 질리는 없었다. 그리스의 은행의 지분은 이미 상당부분 독일과 오스트리아계 금융자본의 소유였기에 채권단인 그들은 피해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PASOK과 신민주주주의당의 정치인들은 어떨까?

    우리는 이미 반복되는 역사적 학습을 통해 기득권 집단 중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책임은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금융자본에 있었지만 위기 수습 비용은 납세자인 평범한 사람들 주머니에서 나갔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비난이 아니다. 이미 구축된 거대한 경제 구조의 메커니즘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부정하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결코 합리적이지, 공평하지도, 민주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리스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하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대안이 없을 때’ 이야기다. 그리고 넘어서서는 안 되는 선을 지켰을 때 유지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리스의 경우는 이러한 선을 넘어섰다. 2008년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고통을 강제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낮았던 자살률은 1년만에 40퍼센트 높아졌다. 학교에는 교과서가 없었고 병원 환자들은 약국에서 개별적으로 약을 구입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실질적인 실업율은 25퍼센트에 달했다. 청년 실업은 60퍼센트에 달했다. 그리고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래서 고통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그리스인의 나태함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이었다. 복지병에 걸려 나라를 거덜 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일 뿐이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산하의 유로스타트의 통계에 따르면 그리스의 빈곤 수준은 유럽연합 국가들 중 하위권에 속하며 가장 긴 시간동안 노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통계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 것이 빈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직업을 갖고 있는 가장이 있다고 해서 빈곤선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금융위기에 따른 실업의 증가는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또 다시 긴축정책에 의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미 처음부터 그리스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공범이었던 그리스 정부는 채권단의 요구에 저항할 힘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협상이라고 했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트로이카로 불린다)의 구조개혁안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극심한 경제침체와 공적 안전망의 붕괴와 실업은 그리스 사회가 ‘유기적 위기’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착취의 한계를 경험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다음 수순은 무능한 정부와 그 위에 군림하면서 그리스의 주권을 무너뜨리고 있는 트로이카에 대한 저항일 수밖에 없었다. 2011년 5월 시작된 시위와 파업의 물결은 이러한 저항의 물리적 표현이었다.

    급진좌파 시리자의 집권과 5개월 그리고 7월 5일 국민투표

    이러한 저항의 정점이 2015년 1월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의 승리로 드러났다. 하지만 시리자의 집권은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좌파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제자본의 압박과 태업, 자본유출에 직면해야 하고 이데올로기 공세를 견뎌내야 한다. 시리자 정부는 유로존에 남아 있으면서도 구조개혁안을 재협상한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좌파에게 시리자의 5개월은 실망스러웠다. 시리자 정치인들이 노련한 유럽연합 정치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아마추어에 가까웠고 국제적 압박에 양보만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집권 직후인 2월 20일의 협정이 그랬다. 한편에서는 시리자 정부가 숨쉴 공간을 확보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좌파는 냉소적이었다.

    시리자는 채권단에게 2년 동안 80억 유로의 세금인상 등 긴축안을 제시했다. 엄청난 양보였다. 공공지출을 삭감하고 임금수준을 낮추며 연급지급액을 축소하는 것도 포함했다. 하지만 동시에 최고부유층에게 과세를 요구했다. 기업세를 26퍼센트에서 29퍼센트로 올리는 것, 50만 유로 이상의 수입에 12퍼센트 과세하는 것을 포함시켰다. 그리스 경제를 살리기 위한 투자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온라인 도박에 과세하는 조치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2008년에서 2012년 사이 소득의 86퍼센트를 상실한 최하위 10분위 연금생활자들을 돕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많은 양보였지만 채권단에게는 합리적인 협상안이었다. 하지만 트로이카, 특히 IMF는 시리자 정부의 협상안을 거부한다. 부유층 과세와 연금생활자와 빈곤층 보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주장을 앞세웠다. 협상이 아니었다. 일방적 통보였을 뿐이다. 많은 논평자들의 표현처럼 그리스의 주권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협박’이었다. 주권과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자본의 독재는 아니었을까?

    채권단의 요구는 시리자 정부가 제시한 것보다 더 강도 높은 노동시장의 탈규제와 연금 축소, 공공부문 임금 삭감이었다. 부유층에 대한 과세는 성장을 저해한다고 거부했지만 식품, 외식, 관광에 대한 부가가치세율을 올리라고 주장했다. 폴 크루그먼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유럽연합의 도그마였다. 그래서 그는 (조셉 스티글리츠와 함께) 그리스 유로존 탈퇴를 긴축안 거부를 주장하고 있다.

    크루그먼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트로이카의 강경한 태도는 ‘그들’이 앞세우는 경제적 논리에서도 비합리적이다. 남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결정이다. 시리자 정부를 축출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논리는 국가경제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금융자본의 단기적 이익을 얼마나 충실하게 보장하는 가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시리자는 채권단의 압박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채권단이 강요하고 있고, 시리자로서는 금지선을 넘는 것이며 자신의 지지기반과 그리스의 상황에서 수용할 수 없는 긴축정책안에 대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국민투표 선언을 전후하여 마지막 긴급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국민투표의 경로를 거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채권단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 주요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민투표에서 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정책안에 대한 부결은 곧 유로존과 유럽연합에서의 탈퇴를 의미할 것이라는 공포와 협박을 일삼고 있다. 독일의 보수 기민당 메르켈 총리는 물론이고 프랑스 사회당의 올랜드 대통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의 렌지 총리도 그런 입장에 서 있다. 유럽 금융자본과 권력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 여기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경제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는 급진좌파적 흐름에 대한 경고와 징벌이라는 정치적 목적 또한 담겨 있다는 게 많은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리스 시리자 정부와 그들을 지지한 그리스 국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서 긴축정책과 신자유주의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7월 5일의 국민투표는 이 정치경제적 전쟁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다. 또다른 재협상의 험난한 과정일 수도 있고 유로존 탈퇴를 통한 전혀 새롭고 다른 길을 걸어가는 험난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6월 30일 IMF 부채 상환의 불이행 시점에 이어 올 하반기에는 더 큰 액수의 채무 상환 일정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반면 국민투표가 가결될 경우 시리자 정부는 사퇴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총선을 거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이미 시리자와 보수 신민주주의당에 이어 제3당의 지위를 갖고 있는 황금새벽당 등 극우파 정치세력들이 급진좌파의 자리와 공백을 차지하는 경우가 아마 최악의 그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7월 5일 국민투표의 ‘반대’ 표결과 부결은 투표권이 없는 그리스 외의 모든 세계 민중들 바로 우리 모두의 의견이고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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