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공산당 권력승계 시스템
    “가을을 보면 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2012년 07월 19일 11: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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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기사와 관련해 중국의 최고 지도부 선출 과정과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석의 시점은 떵샤오핑 이후, 즉 어떤 절대적 권력자 1인에 의한 지배가 아닌 집단적 지배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쟝쩌민(江泽民) 집권 이후부터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지역 당 위원회의 지도부 구성이 7월 초 수도인 베이징 시당 위원회의 새로운 구성을 끝으로 일단락되고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즉 7월말부터 8월초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진행되는 최고위 권력자들 간의 논의와 협상을 통해 10월 당 대회에서 선출될 차기 지도부를 최종 결정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베이다이허 회의의 결정이 최종 결정이고 당 대회는 형식적 절차인 셈입니다.(베이다이허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샨하이관(山海关)이 위치한 친황다오(秦皇岛)에 있는 해변으로 베이징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기후도 좋아 1954년이후 중국의 고위지도자들이 함께 피서를 즐기면서 주요 국정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곳)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구인 정치국상무위원들은 자신의 후임자(또는 상무위원 1인)에 대한 추천권을 갖고 있으며(예를 들면 쟝쩌민은 쩡칭홍(曾庆红)을, 총리였던 주롱지(朱镕基)는 원자바오(温家宝)를 추천), 특별한 ‘정치적’ 과오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전임자의 추천은 곧 권력의 최고 핵심인 정치국상무위원이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개혁개방 이후 약 20년 동안 소위 말하는 파벌에 대한 충성도가 당 또는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시되는(특히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경향이 강화된 점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전번 기사에서 제가 지역 당 책임자들의 선출에 보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또 중국정치의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기층에서부터 출발해 여러 단계의 경험과 검증을 거쳐 중국공산당의 핵심 권력기구인 정치국에 진입 가능한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기 때문이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마오쩌뚱(毛泽东)은 자신이 행사했던 권력에 비하면 후계자문제에서만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만 리우샤오치(刘少奇), 린뱌오(林彪), 왕홍원(王洪文)3명입니다.

    리우샤치는 혁명시기에는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업에 주력했으며, 이 기간 중 그가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延安)의 혁명 간부를 양성학교인 마르크스-레닌학원(马列学院)에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공산당원의 교양에 대해 논함’(论共产党员的修养)은 뛰어난 저서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국 후 주로 정부에서 일하면서 국가 발전전략에서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마오쩌뚱과 대립하다 결국 마오쩌둥에 의해 주자파(走资派)로 규정되어 문화혁명 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린뱌오는 건국 후 마오쩌뚱이 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운 홍군(紅軍-공산당 군대)의 장군 10명에게 원수(元帅) 호칭을 수여할 때 세 번째 자리에 위치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중국 현대사에 관심 있는 분이면 한 번을 들어봤을 ‘한 줌의 불꽃이 광야를 태울 수 있다’(星星之火 可以燎原)는 문구는 바로 마오쩌뚱이 린뱌오에게 보낸 편지의 제목입니다.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국방부장관에 임명되고 문혁과정에서 군부를 동원해 적극 호응해 공식 후계자 자리에 올랐지만 권력에 대한 조급증 때문에 반란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비행기로 수하들과 탈출하다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폭발사고로 권력과 이별해야 했습니다.

    왕홍원은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문화혁명 기간 샹하이에서 활동하다 마오쩌뚱에 의해 발탁되어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중국공산당 부주석에 오르고 또 후계자 자리에 올라 마오의 부인 쟝칭(江青)등과 사인방(四人幫)을 구성해 마오쩌뚱 사후 권력찬탈을 노리다 4인방의 몰락과 함께 수감생활을 하던 중 사망하고 맙니다.

    마오쩌뚱의 고향인 후난(湖南)지역에서 지역 책임자로 성장한 화궈펑(华国锋)은 마오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했으며, 유명한 마오의 유언(你办事,我放心-자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맘을 놓겠네)에 기대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후 중국의 새로운 변화보다는 마오 노선만을 고집하다(凡是毛主席作出的决策,我们都坚决维护;凡是毛主席的指示,我们都始终不渝地遵循-마오쩌뚱의 결정은 모두 옳고, 마오쩌뚱의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결국 떵샤오핑 등에 의해 물러나게 됩니다.

    중국공산당에서 자신의 후임자를 가장 성공적으로 임명한 사람은 떵샤오핑입니다. 그는 쟝쩌민과 그의 후임인 후진타오(胡锦涛) 현 총서기까지 지명해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쟝쩌민과 후진타오는 어찌 보면 자신의 지명권을 확실하게 사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을 사람들입니다.

    쟝쩌민은 자신의 직계이자 태자당 출신인 쩡칭홍을 당 총서기 또는 국가 주석에 임명하려고 시도했지만 당 내외의 반발에 부딪혀 정치국상무위원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习近平)을 다음 총서기 후보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후진타오 역시 자신의 후임으로 공청단 출신의 리커챵(李克强)을 밀었지만 결국 총리 후보로 내정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몇 개월 후 개최될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의 목표는 결국 시진핑 이후, 즉 10년 후의 당 총서기 후보군에 자신의 직계들을 최대한 많이 진출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석들은 현재의 상황을 토대로 한 것이라 변화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한직에 속했던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한국의 국회)는 중국의 국제무대 진출과 법치화의 필요성으로 인해 전인대와 그 위원장의 역할이 점차 확장되고 있으며, 또 상징성 빼고는 거의 실권이 없었던 국가주석직도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역할이 제고되면서 당 내에서는 총서기 역할의 부담을 이유로 총서기의 국가주석 겸임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당 대회와 국가의 입법기관인 전인대가 5년 마다 개최되고 또 매년 일주일 정도의 대회를 개최하는데 일반적으로 당 대회는 가을(9~10월 중)에, 전인대는 3월 5일 경에 개최됩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광경

    얼핏 보면 전인대가 먼저 열리는 것 같지만 실은 당 대회가 개최된 해의 다음 해 봄에 개최됩니다. 예를 들면, 올 가을 당 대회에서 차기 당과 국가의 주요 책임자를 결정하고 또 중요한 국가 정책을 결정하면, 5~6개월 후에 개최되는 전인대에서 당에서 결정한 주요 국가기구의 책임자를 임명하고 또 당에서 결정했던 정책들을 다듬고 구체화해서 국가정책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의 직책과 국가기관의 책임자의 임기 만료기간이 반년 정도의 차이를 낳게 됩니다. 후진타오의 당 총서기 직은 올해 10월에 임기가 끝나지만 국가주석 직은 내년 봄에 열리는 전인대에서 물려주게 됩니다. 총리를 비롯한 다른 국가기관의 직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인민정협(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 또는 정협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조직은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만 존재하는데, 혁명시기에는 다른 정파 또는 무소속 인사들을 규합에 일본 및 국민당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혁명 후에는 공산당 이외의 다른 정파들에게 공산당의 정책을 설명하고 또 이들이 공산당의 지도에 잘 따르도록 지도하는 조직인데, 공산당 권력 서열 4위가 주로 이 조직의 책임자가 됩니다.

    매년 전인대와 함께 개최되기 때문에 이 두 대회를 양회(两会)라고 부릅니다. 외부에서는 이 두 기구를 양로원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공산당에서 직급제한 연령에 걸려 더 높은 직위로 승진하지 못하고 퇴직하는 간부들이 주로 이 두 기구에 다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 또는 파벌 등에 관심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좀 더 시급하게는 한국과는 다른 정치체제와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만만디-慢慢地’라는 우리 귀에 익숙한 중국인들의 습성처럼, 중국의 정치체제도 천천히 시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느 파벌이 권력을 장악하느냐 보다는 이런 변화가 중국 국내외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필자소개
    중국 현대정치 전공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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