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가해자,
피해자와 '비'피해자 ?
한 탐사 프로그램 보며 든 불편함
    2015년 06월 22일 05: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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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1일) 우연히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이영돈’이라는 스타 PD가 광고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켜 폐지된 프로그램의 후속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도 있고, 소재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고 해서 관심을 갖고 시청했다.

이규연이라는 탐사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주년을 맞아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헤아려본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듯 했다.

그런데 글쎄, 결론부터 말하자면 빙빙 돌아서 좋게 봐주면 함량미달이고 나쁘게 보면 의도적인 논점 흐리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글쎄 애당초 종편에서 수준 높은 탐사프로그램을 기대한 것이 무리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지난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한국전쟁 이후 단일 사고로는 가장 큰 인명 피해의 대참사가 발생했는데,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런 의미에서 당시 사고의 (관련) 피해자들이 2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적했다. 그리고 그들의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이 겪었고 겪고 있는 “수치심과 죄책감” 등에 대해서도 다뤘다.

삼풍

20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당시의 자료사진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결국 20년의 시간 동안 고통을 겪은 사고 피해자들이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가해자로 여기며 살아왔는지, 그 속에 숨은 사회적 매커니즘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려는 듯 했다. 그리고 어떤 사회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를 통해 이른바 ‘순결한 피해자 증후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이 증후군은 대형 참사 피해자를 그냥 순수(?)한 피해자로 있기 바라는 증상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초반의 문제제기와는 달리 중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어째 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대형 참사의 피해자들을 대하는 내용과 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는 불행을 당한 불쌍한 이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인식은 퇴색하고 오히려 ‘재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 꺼려하는 방식으로 대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렇다. 형태적으로는 맞는 지적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수 없게 사고를 당한) 소수의 피해자와 (해당 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그들을 (그냥) 바라보는 다수의 非피해자라는 구도가 설정된다. (마치 장애인 문제를 대하는 지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도처럼) 이런 구도에서는 ‘피해자’는 그냥 다수의 건강한(?) 공동체에 기생(?)하는 불필요한 소수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을 비피해자로부터 격리, 구축하는 다양한 기제가 작동한다. 보상금 노리고 시체 장사하는 얼굴 두꺼운 부모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끼니 때우는 것을 자식이 부모가 죽었는데 밥이 넘어 가냐고 비난하기도 한다. 웃지도 못하고 옷도 밝은 색으로 입지 못한다. 마치 사회적으로 비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왜 이런 구도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다. 필자는 본질적으로 이런 구도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숨은 힘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왜 피해자와 비피해자의 구도로 만들려는 것일까?

다른 구도를 생각해보자. 보통의 사람을 피해자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즉 해당 사고의 가해자가 분명 존재하는데 어느 순간에인가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와 비피해자만이 남아있다. 물론 여기서 가해자라는 존재가 삼풍사건의 경우처럼 ‘이준 회장’이나 ‘뇌물 받은 공무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로 대표되는 검은 세력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말미에 두루뭉술하게 “압축 고도성장이라는 근대화 기제”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다. 그렇게 볼 때 결국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죄인인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모두를 단죄해야 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아무도 단죄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끄트머리 몇 명만 처벌하고 (그나마 징역형 몇 년 살지 않았다.) 마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기억을 되살리면 결국 누군가를 처벌해야 하는데 그들은 이미 처벌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망각을 강요하는 것이고 그 망각의 기제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절대적 강자와 저항할 수 없는 약자 사이) ‘폭력의 전이’ 문제인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자칭 전문가(그것도 유명한 사회학자와 대중적으로 종편에서 잘 팔리는 정신과 의사)라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빙빙 돌려서 어렵게 “순결한 피해자 증후군” 이라는 개념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글쎄 이렇게 명약관화한 기제를 그들이 몰랐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다.

연쇄살인범에 대해 연구하는 프로파일러로서 필자는 이런 예를 들고 싶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매 맞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아이가 성장하여 성매매 여성을 공격하는 연쇄살인범이 되었는데, 이때의 기제가 바로 ‘폭력의 전이’이다. 저항하고 극복할 수 없는 대상(절대자)과 그의 피해자를 지켜보는 제3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같이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절대자의 주구가 될 것인가?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게 폭력을 가하면서 스스로도 무너져 간다.

대형 참사의 피해자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기제에는 바로 이런 것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순결한 피해자 증후군”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도입하려고 하는데, 글쎄 이것은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 아닌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참사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구조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과 집단을 단죄하고 구조적으로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정의’ 아닌가?

‘정의’ 가 실현되었다면 피해자 그들이 비난 받았을까? (주류이든 아니든) 언론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는가? 오히려 생존자와 피해자들을 희화화하지는 않았는가?

내 기억으로는 언론들이 한 것은, 초기에는 구조적인 병폐를 조명하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에 와서는 본질을 흐리고 희화화하고 결국 망각을 선도적으로 주도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런 매커니즘은 삼풍에서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결국에는 세월호 참사를 거쳐 지금 메르스까지 왔다고 보는데, 반론이 있으면 해보시라?

본질적으로 처절한 반성에서부터 본 프로그램이 시작했다면 그래도 봐줄만 했는데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대다수의 지식인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의를 실현하고 구조적인 단죄에 대한 방향이 아니라 본질을 흐리는 말과 글들로 혹세무민을 한 자들이 우리 사회의 소위 지식인들이 아닌가?

역사에서 피해자를 비난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인조 이후의 ‘환향녀’이다. 자기 나라도 지키지 못한 일부 꼴통 지배층들이 나라가 무너져 노예로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가여운 여성들을 더럽다고 죽으라고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사건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부역한 것이 이른바 유학자들 아닌가? 자신들의 소수 기득권을 위해 나라도 망치고 백성들도 버린 자들 아닌가? 지금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그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폭력의 피해자를 감싸 안지는 못할망정 부화뇌동하여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니!

우리 사회 깊숙이 박혀있는 대형 참사의 책임자(검은 세력)들을 단죄하지 않는 한, 대형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지금과 같은 무차별한 폭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형 참사의 피해자는 바로 당신들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배상훈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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