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세계관인가
    [교육담론] 누구를 위한 공부?
        2015년 06월 16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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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과 상대하면서 가장 이상한 점은 마치 부모를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왜 그럴까?

    70~80년대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입신양명이었다. 판검사가 되어 집안을 빛내거나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돌보겠다는 따위가 그러하다. 이들의 목표는 어떤 직업으로 집약되었다.

    저학력.저소득 부모는 어려운 살림에 이들의 목표를 도왔다.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는 개입하지 못했다. 덕분에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는 고학력 자녀와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부모 세대와의 갈등에서 부모 세대들은 완패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2000년대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학생들의 가치관은 어떤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삶으로 목표가 이동한다. 우리 아들의 한 때 꿈은 적당히 벌어 ‘밤새도록 미드 보며 게임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들보다 재력과 교양에서 우수한 부모 세대가 위로부터 이들의 생사여탈권은 물론 세계관까지를 완전히 지배했다. 덕분에 아들 세대는 부모 세대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한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대학원-취직을 못하면 그 때까지….

    무기력하게 부모의 세계관을 수용한 자녀 세대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부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인 만큼 공부에 들어가는 물적 기반에 대한 고민은 아들이 생각해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상담을 할 때마다 이런 광경을 많이 본다. 학원비에 들어가는 돈에 대해 학생들은 둔감하다. 수십만원에 이르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대학 등록금 4~5천만원 그에 따른 기회비용 상실분 1억원 정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이며 이 선택이 자칫하면 자신과 부모 세대의 숨통을 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체감하지 못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저소득.저학력 부모들이 자신의 노후를 담보로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거액의 돈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지 모르고 대학을 정점으로 서열화된 학벌구조에 몸을 던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 무모한 행렬의 끝에 누구의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는가이다.

    잠정적인 결론은 첫째. 고도성장과 대졸자 우위의 고용시장이라는 그들의 오랜 경험이고 둘째는 첫째 구조가 이미 10년 전에 붕괴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공교육 시스템이다.

    한국에서 학벌은 일종의 신분제이다. 대졸자와 고졸자 사이의 근로조건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정서적. 심리적 차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잔재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한국에서 대학은 여전히 여러 조건을 따져 자신의 이익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는 선택재라기보다는 대졸자라는 신분을 취득하기 위한 필수재로 남아 있다.

    공교육은 이미 다 자라버린 청소년들을 수용하는 일종의 피난처(?)이다. 생각해 보라. 피가 끓는 고등학생들이 아무런 대책 없는 사회로 나왔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학교와 PC방의 위해에 대해 지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나마 이들 장소가 고등학생들을 임시 수용하여 사회안전(?)을 지키고 있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가지이다.

    첫째는 6-3-3 시스템이라는 전통 학교 시스템을 넘어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이다. 최첨단 정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고등학교까지 필요한 지식은 중학생 정도면 다 마칠 수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사회로 내보내는 것이 옳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공부할만한 학생들은 전문 연구직으로 그렇지 않으면 사회 일선으로… 그리고 이런 구조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시대에 맞게 전 연령층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3년 일하고 1년 공부하고,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는 더 중요한 것은 첫째와 같이 나이에 걸맞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부당하게(?) 전 사회를 억누르고 있는 기성세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청소년들이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은 청소년 본인들을 위해서나 새로운 사회세력의 출현을 희망하는 시대적 요구로 보나 매우 절박한 과제이다.

    학생들은 꿈을 꾼다.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고 어떤 편익이 발생하는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꿈은 허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만큼 그들의 미래 또한 유예되거나 지연되는 것이다.

    부모의 세계관을 통해 자신의 꿈을 구상하는 이율배반적인 구조가 근 20년간 지속되었다. 덕분에 한국사회의 어떤 세대가 불구화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 만큼 한국사회의 현실 또한 기형화되었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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