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24년만에 막 내린 “거짓말 잔치”
    [책소개] 『거짓말 잔치』(안재성 기록/ 주목)
        2015년 06월 13일 0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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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거짓말 잔치’에 초대된 김기설과 강기훈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 서강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사르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향해 몸을 던진 한 청년이 있었다. “민자당을 해체하라!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는 말을 외치고 분신한 김기설 열사. 그가 남긴 두 장의 유서가 단초가 되어, 2015년까지 24년간이나 지속되었던 ‘거짓말 잔치’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이번 변사사건은 우연한 자살행위가 아니라 사전에 일사불란한 계획을 수립하여 여러 사람이 합동하여 저지른 엄청난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선택과 국민연합대책본부 상황실장이란 자가 위 변사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다시는 이런 엄청난 행위가 없었으면 합니다.”

    당시 서강대학교 총무처장 윤여덕의 이러한 주장은 ‘거짓말 잔치’에 유력한 근거가 되어주었고, 서강대 총장인 박홍 역시“운동권이 조직적으로 분신을 사주하고 있다.”고 직설함으로써, 음모론의 기초가 다져지게 된다. 이에 검찰은 김기설이 남긴 ‘유서의 필체’를 문제 삼아 “최근의 분신자살사건에 조직적인 배후세력이 개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철저히 조사할 것. 분신의 경위에 의혹이 있을 뿐 아니라 타살 가능성마저 있음.”이라는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사법부 기록을 중심으로 작성한 ‘사실‘의 기록

    김기설의 분신에 대한 ‘조직적인 배후세력의 개입 여부’에 초점을 맞춘 검찰의 수사와 그 진행과정을 그린《거짓말 잔치》는 A4용지 1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공식기록을 비교, 분석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보다 객관적으로 사실을 분석함으로써 희대의 진실공방을 남긴 유서대필사건의 진실을 일반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 최대한 엄정한 공정성을 위해, 이 사건으로 피해를 보게 된 강기훈과 주변인들이 겪었을 심정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중간중간 나오는 놀랐다거나 침통했다거나 하는 심리묘사조차도 진술서에 기록된 그대로 옮긴 데 불과하다. 피해자의 고통을 내세워 동정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 안재성은 강기훈이라는 한 청년을 파렴치한 유서대필자로 만든 사건의 이면을 시간의 흐름과 진행에 따라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꼼꼼하게 기록했다. 특히 작가의 상상이 가미될 경우 명백한 진실조차 소설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체의 상상을 배제하고 경찰 조서, 재판 기록, 진실화해위원회 조서 등 온전히 공식적인 자료들에 기초해 기록을 작성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24년 전인 1991년 5월의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분신 사망한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검찰의 발표로 시작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추측이나 예단도 허락하지 않기 위한 안재성의 작가적 결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 잔치》에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흥미진진함과 화려한 수사로 이뤄진 문학적 감동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진실’을 따라가는 담담하고 묵직한 서술의 힘이 진하게 느껴진다.

    안재성

    거짓말의 잔치판

    이처럼《거짓말 잔치》가 주로 사법부 기록을 중심으로 작가의 판단이 버무려지지 않은 사실로써 쓰여졌기 때문에, 독자 스스로 사건의 전말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전체를 파악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이 사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3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이 보여주는 거짓말의 잔치판 속에서 24년이라는 지난한 기간 동안 이뤄진 조작과 날조의 과정, 그에 따른 재판과 항소, 재심권고와 수용의 과정을 낱낱이 함께하며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체계에 대해서, 진실과 오명에 대해서, 사회 체제를 공고히 유지해 나가는 힘에 대해서 통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잔치, 드디어 막을 내리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속에 감옥에서 보낸 3년과 그 후 지금까지 제가 일관되게 말해왔던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판결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불신이 너무나 깊습니다. 원심법정에서‘이 거짓된 판결, 저는 도저히 인정 못 합니다!’고 왜 외치지 못했을까를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2012년 재심재판정에서 외친 강기훈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사건 23년 만인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유서대필에 대해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15개월 후인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항고를 기각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정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24년간 동료의 죽음을 부추기고 자살을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살아온 한 사람의 양심이 돌고 돌아 간신히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이름을 빌린 잘못된 감정에 의해 오명을 쓴 피고인이 바로 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지금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자신의,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감정 결과에 의하여 누명을 벗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사실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우리의 최후의 의지처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사회의, 우리들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임을 웅변해줍니다. (……) 이 순간, 적어도 우리는 그간의 오랜 고통 속에서 초인적으로 인내하며 진실을 지켜온 피고인에 대한 뜨거운 경의와 공감, 그리고 참된 연대와 지지의 표시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훈장을 피고인에게 수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 같이 피고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우리도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 만세!”

    -변호인들의 변론 요지서 중에서

    강기훈과 함께 애써온 변호인들의 절절한 외침은 국가권력의 추악한 음모와 폭력에 짓밟힌 강기훈과 그에 분노하던 독자들의 가슴까지 후련하고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더구나 우리 최후의 의지처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이라는 진술에서 독자는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끼고, ‘희망’의 단서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주목’에서 펴내는 《거짓말 잔치》가 “법을 다루는 사람이 편견을 가지면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생각하게 하는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기록이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대법원 무죄판결에 대한 기자회견 성명서

    대한민국 정부는 거짓말 잔치를 끝내야 한다!

    – 유서대필 날조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우리의 입장 –

    1991년 이후 2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현대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순간과 마주하고 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감격보다는 비통할 뿐이다.

    무죄! 너무나도 당연한 판결을 얻어내기까지 우리는 길고 긴 치욕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당한 국가권력이 모의하여 폭력으로 날조하고 조작했을 뿐인데, 우리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대표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은 죽음을 부추기는 검은 세력으로 매도되면서 민주화운동 전체가 시련을 겪었다. 고 김기설 열사는 분신을 배후조종 당하고, 유서도 대필 받는 꼭두각시라는 오명으로 두 번 죽임을 당했다. 유서대필자로 지목된 강기훈의 인생은 난도질당했으며, 그 주변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선후배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에 가슴만 졸이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급기야 강기훈은 간암이라는 중병에 걸려 사투를 벌이는 신세가 되었다.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과 비견되는 이런 조작과 날조가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정치검찰이 주역이 되고, 권력지향 법관들이 마름이 되어 법이라는 미명하에 독재정권을 위한 거짓말잔치를 벌였다. 여기에 언론이 들러리 섰고, 몰지각한 지식인과 시인이 말석을 차지하며 국민을 눈멀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무죄일 뿐이다. 희생의 고통은 너무나 크고 길었지만, 거짓말잔치의 주역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지금까지도 그 단맛을 즐기고 있다.

    이것은 정녕 우리가 바라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 사필귀정의 판단은 강기훈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우리 모두가 함께 얻어낸 것이다. 이 판결이 현재도 진행 중인 세월호를 비롯한 여러 진실규명 노력과 국가권력의 부당한 처사에 맞선 투쟁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 우리는 대법원의 역사적 판단을 마주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날조와 조작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정중히 사과하고, 이에 가담했던 사법부와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은 반역사적인 거짓말 잔치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그 대안을 국민 앞에 제시해라!

    – 당시 날조와 조작을 주도했던 이들은 일체의 공적활동에서 물러나고, 국민을 속이고 기만한 죄값을 치뤄야 한다!

    – 해당 언론사나 사이비 지식인들은 부당한 국가권력의 만행에 들러리 섰던 것에 대해 통절한 자기 반성문을 공식매체에 게재하라!

    2015년 5월 14일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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