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의 한글 공부
    [청춘일기] 작은 세계, 큰 세계?
        2015년 06월 08일 1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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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든을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할머니와의 동거는 꽤 오래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니까, 횟수로 15년째다.

    아빠에게 “이제부터 할머니를 모시고 살 거야” 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이 누군가를 책임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할머니를 가족의 차원 보다는 부양의 의무로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엄마처럼 나와 동생을 돌봐주시진 못하셨다. 그것은 급격한 상황 변화 때문이기도 했다. 한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지역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손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할머니에게도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한 평생을 같이 했던 남편의 부재는 신체의 한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익숙해지지 못할 일이었다. 무뚝뚝한 할머니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밤마다 기도하는 일로 먼저 떠난 할아버지와 자신을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하셨다. ‘까막눈’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 때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나와 동생은 마치 선생님이 된 것처럼, 할머니가 글을 깨우칠 수 있도록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세가 있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일이란 새로 말을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자주 머리를 치며 “머리가 바보 같아서 못해”라고 말하셨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언젠가는 할머니가 글을 읽게 될 것이라고, 글 읽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글을 깨우치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열정적이었다. 마치 새로운 가족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 우리가 편하기 위해 할머니를 가르치는 것 같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할머니가 글을 읽지 못해 생기는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해 나가야만 했다.

    할머니의 한글

    방송화면 캡처

    할머니는 가끔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집밖으로 30보만 걸어 나가도 한글이 적혀있는 간판들이 수십 개, 수백 개는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가 외출을 하실 때마다 안심할 수 없었다. 만약 할머니가 길이라도 잃게 된다면 전화번호도, 주소도 모르고 가족들의 이름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집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도시 생활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자주 써야 하는 음식 조미료 통을 나름의 순서를 정해 정렬해놓고 이름을 외우거나, 집의 비밀번호는 패턴을 기억하는 형식으로 숫자를 외우기도 했다. 어쩌면 어떻게든 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할머니 나름대로 도시생활에 적응해나가는 방식을 보며 삶을 살아가는 데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욱 필수적임을 배웠던 것 같다.

    할머니는 아직도 한글을 깨우치고 계시는 중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과 가족들의 이름, 전화번호쯤은 가뿐히 읽고 쓰신다. 사실 통째로 외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데는 아직도 어려움이 크다. 복지관을 함께 다니던 동료 할머니들 중에는 벌써 한글을 깨우쳐 졸업하신 분들도 있고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 분들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한글이란 흘러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한 자, 한 자 내려쓸 때마다 조심스럽게도 끝이 보이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할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할머니는 글을 깨우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말이다. 할머니는 성당에서 자신 있게 성가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책을 보고 기도문을 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거창한 답변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주 쉽고,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에게는 무척이나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할머니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의기소침해 계셨다. 그땐 할머니의 소심함은 타고난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금 공부하고 있는, 영어라는 언어를 접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할머니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외국인을 만나면 얼음장처럼 굳어버리는 나의 모습, 그리고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영어 구문을 마주하고선 생각했다. 할머니가 바라보는 세상도 해석이 필요한 세상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보는 할머니의 세상은 아주 작다. 가족, 성당, 자주 걷는 수원천, 집 앞의 스티로폼으로 꾸린 작은 화단, 복지관을 갈 때마다 타는 720번 버스, 그리고 버스비가 아까울 때마다 집으로 걸어오는 시장 길, TV 드라마, 컴컴한 방의 환하게 빛나는 스탠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까이 있어, 흔하고 하찮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할머니의 일상, 즉 할머니의 세상을 존경하지 않았다. 작고 좁은 세상보다는 넓은 세상을 동경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물 밖을 나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쉽고 어렵지 않은 것, 혹은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내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할머니의 삶은 곧 나의 아버지의 삶이고 나의 아버지의 삶은 곧 나의 삶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 그러나 작은 세계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더 큰 세계만 꿈꾸고 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면서 타임지를 들여다보는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할머니는 아직도 한글을 공부하고 계신다. 할머니는 이제는 완벽하게 한글을 깨우쳐야겠다는 생각은 접으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글공부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공부한다는 것 자체에 행복을 느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자신이 무언가를 공부해본 적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계속 공부할 것이고 언젠가 그 공부는 원치 않게 끝이 날지도 모른다.

    공부 없는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떤 분야이든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라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완벽하고 끝이 있는 공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나도 계속해서 공부해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테니까. 할머니는 오늘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글자를 써내려 간다. 할머니를 보며 안도할 수 있는 밤이다.

    필자소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 문화재단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생애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교복전문점에서 한 달 꼬박 쉬지도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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