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가 위태로울 때
    마녀사냥은 시작된다
    [책소개] 『비이성의 세계사』(정찬일/ 양철북)
        2015년 05월 30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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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의 시대는 후세에 어떻게 기록될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다. 정치를 비판하는 자는 종북으로 몰리기 일쑤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장막에서 사이버 폭력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어느 때보다 정보를 접하기 쉬운 시대에, 불확실한 근거로 불특정 다수가 누군가를 공격하는 현상은 지독히 역설적이다. 또한 최소한의 소통과 공감 능력마저 상실한 듯한 ‘일베’ 현상은 집단적 비이성의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되새겨야 한다. 과거를 되짚어보는 일은 단순히 교양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과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해야 할지 통찰할 수 있다.

    이렇게 역사를 통해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 양철북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바로 《비이성의 세계사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녀사냥들》이다.

    비이성의 세계사

    권력이 부추기고 다수가 동의한 폭력의 세계사

    우리는 인간이 이성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다수의 판단이 곧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여긴다. 민주주의나 다수결 원칙은 이런 전제를 기초로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계사를 돌아보면, 단지 한 개인만이 아니라 한 사회의 대다수가 합심하여 잘못된 판단과 비이성적 행동을 했던 사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수가 근거 없이 한 개인이나 집단을 공격하는 비이성적 현상, 즉 ‘마녀사냥’은 세계사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졌다. 《비이성의 세계사》는 그 대표적인 10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 시민들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닫기 바라면서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

    – 다른 생활방식이 낳은 편견 때문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린 기독교인들

    – 오랑캐에게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로 두 번 버림받은 조선의 환향녀

    – 누구든 잡아가고 고문하고 죽일 수 있었던 시대, 중세 마녀사냥

    – 집단 최면을 이긴 진실과 정의의 대명사, 드레퓌스

    – 국가의 유언비어가 낳은 집단 광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가장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서 벌어진 빨갱이 사냥, 매카시즘

    – 국가의 보호 아래 기존 문화와 질서를 파괴한 십대 중국 홍위병

    – 완전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국민의 4분의 1을 ‘청소’한 캄보디아 해방군

    – 수많은 보통 사람이 하루아침에 살인마가 된 곳, 르완다

    세계사적으로 워낙 알려진 사건들이어서 역사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건을 다룰 때 광기 어린 독재자뿐만 아니라 다수 대중과 그들의 집단적 비이성에 초점을 맞추는 시도는 드물었다. 평범한 소시민들은 어떻게 집단 광기에 빠졌을까?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 이들이 살인마가 된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책에서 다루는 마녀사냥들은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공통된 배경이 있다. 우선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사회적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해소시킬 어떤 것을 찾았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집착은 더욱 커진다. 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전복하려 할 때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희생양으로 끌어들였다.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마녀’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놀라운 것은 이 잔인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일시적이나마 이성이 마비된 보통 사람들에게 악은 삼시 세끼처럼 평범해졌고,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간명한 문장과 흡인력 있는 전개로 실감나는 역사책

    책의 문장은 간명하다. 저자는 기자 출신답게 장황한 수식 없이 적재적소에 필요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짧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듯 상황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직접 사건을 평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사건의 배경과 과정을 객관적으로 펼쳐놓음으로써, 그 행간과 맥락 속에서 배워야 할 점을 독자 스스로 깨닫게 한다. 또한 본문 중간중간에 각 사건과 연관된 기사나 평론 등을 발문으로 삽입하여, 한 박자 쉬어가면서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각 장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통찰력 있는 총평과 생각할 거리를 짧고 굵게 제시한다.

    로마 대화재 당시 기독교인들은 네로 황제의 권력 유지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이 기독교인 박해 사건은 화재가 권력자들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나 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외톨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 등, 약 2000년 후에 일어난 일본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6장)과 놀랄 만큼 그 이유와 배경이 비슷하다.

    그러나 네로의 계획은 실패했다. 궁극적으로 로마 시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시민들은 기독교인에게 반감을 가졌지만, 잔인한 처형 방식과 죽음을 맞는 기독교인들의 순교자적 태도에 생각을 바꿨다. 네로가 좀 더 치밀했다면 그의 의도는 적중했을지도 모른다. 마녀사냥에 성공하려면 아무리 전제 국가라도 권력자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의하는 다수의 존재가 마녀사냥의 성패를 결정짓는 열쇠다. – 2장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인 박해> 결론부, 73쪽

    역사를 읽는 눈이 많아질 때, 비이성을 바로잡는 힘이 길러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것은 마치 지금 우리의 상황을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 때문이다. ‘매카시즘’(7장)을 보면서는 종북 몰이를 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소크라테스 재판’(1장)과 ‘드레퓌스 사건’(5장)을 보면서는 인터넷 신상 털기와 마녀사냥이 떠오른다. 십대 중국 홍위병들이 오래된 것은 뭐든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무차별하게 기존 문화와 질서를 파괴한 ‘문화대혁명’(8장)은 일부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십대들의 비이성적 행태가 겹쳐진다.

    《비이성의 세계사》는 곧 되풀이될 수도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대의 역사는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10대 청소년과 20대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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