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 북한 편들기가 아니다
        2015년 05월 28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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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전 저는 우연히 저에 대한 비판을 <노동자연대> 신문(관련 글 링크)에서 접했습니다 : “현실 사회주의”권에 대한 고 토니 클리프 선생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신봉하시는 일단의 트로츠키주의자 분들의 이 비판의 골자는 두 개인데, 하나는 제가 “국가자본주의론”의 신조에 맞지 않은 발언을 했다는 점에 대한 불만인 듯하고, 또 하나는 중(북)-미 갈등에서 “중국편”을 든 듯한 이미지를 풍긴 데에 대한 문제제기인 듯합니다.

    전자 같으면 훨씬 많은 시간과 지면을 요할 대목인지라 다음 기회에 미루고, 후자 문제에 대한 간단한 답변을 지금이라도 모자라는 대로 드려볼까 합니다.

    사실 이런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는 조금 씁쓸합니다. 연대해서 같이 투쟁해야 할 분들과 논쟁을 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아마도 이념적 스펙트럼 전체로 봐서는, 위의 기사를 쓰신 동지 분과 저는 99% 정도가 일치돼도 예컨대 1%가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저도 위의 기사를 쓰신 분 못지않게 “사회주의”라는 말을 되도록이면 남용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어떤 현 상황을 묘사하는 언어라기보다는, 궁극적 내지 당위적 이상을 지칭할 때에 쓰는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너나 나나 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금일 서방세계에서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요? 주류와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바로 고문실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자유주의의 기본이 지켜진단 말은 할 수 있어도, “민”이 “주”가 된 적은 제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는 그다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대체로 복지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적당한 결합을 지향하는 정치관료군(정당)들이 순조로이 권력교체를 하고 뉘앙스 차이가 나도 대체로 서로 비슷비슷한 정책을 펼쳐온 것은 제가 본 노르웨이 정치인데, “민”이 이것과 질적으로 다른 뭔가를 원할 만한 이념적 훈련을 받을 기회도 박탈되지만, 지배계층의 주류가 원하는 것과 아무리 다른 걸 원해도 별로 유의미한 결과라고 없죠.

    노르웨이가 지난 13년간 아프간에 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다수의 노르웨이인들이 이걸 반대했지만 과연 그 민의가 정책에 반영됐나요? 4년 전의 리비아 폭격에 대한 결정을, 그 당시 국무총리 (노동당의 옌스 스톨텐베르그씨, 지금 나토 사무총장)와 국방장관이 휴대폰 문자로 교신하면서 둘이서 내린 것이고 사후적으로 국회 동의를 득한 것이지, 그 결정의 과정에서는 민의 반영이 가능한 틈새라도 있었나요?

    서방의 소위 “민주” 국가에서의 실질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보면 가끔 민중적 대표성이 있는 이익단체(노조 등)와의 협의절차 정도는 있어도 참여민주주의 등 “진짜” 민주주의를 방불케 할 만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완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는 당위적 이념이지, 그 현실과는 그다지 유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서방과 한때 대치해온 동구권 내지 중국 등의 “사회주의”도 이와 어디까지 달랐을까요? 당위적 이념, 즉 고전적 자본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개발을 시도해보겠다는 의미의 “간판”이었지만, 그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실이 거두어졌다고 보는 사람은 지금으로서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이 사회를 저는 개인적으로 “적색 개발주의”라고 명명하는데, “적색 개발주의”와 고전적 자본주의의 차이에 대한 상론을 차기에 미루겠습니다. 일단 지금으로서 육안으로 볼 수 잇는 것은, 과거 “적색 개발주의” 국가들은, 진도 나간 차이는 호상간 있어도 전부 이미 서방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개중에 북조선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가장 진도는 덜 나갔지만, 그런 편입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은 부정 못하죠.

    그러나 아무리 편입돼 간다고 해도, 구 “적색 개발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고전적 자본주의 국가들과 상당한 질적 차이를 보입니다. 중국만 해도 아직도 토지 공공소유 (국유)부터 신자유주의적 환경임에도 복지를 계속 늘리려는 경향(무상의료를 목표로 해서 의료복지를 계획적으로 늘리는 등의 움직임), 주요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여전한 국유 등까지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게 이상적이라는 말을 제가 한 적은 없지만,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형태는 분명히 극단적 신자유주의에 비해 차악으로는 보일 수 있겠죠.

    저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형 자본주의의 야수성 (저임금 노동력 착취, 농민 토지 몰수 등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적 성격 등)이나 지역패권세력으로서의 현재 중국의 준제국주의적 (sub-imperialist) 성격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중국을 이상시할 생각도 “편들” 생각도 제게 추호도 없죠.

    한미일

    문제는 미화도, 편들기도 아니고 세계 정세에 대한 객관적 판단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의 패권국가인 미국의 군비는 세계 총 군비의 42%나 달하며, 그 동맹국들의 군비까지 가산하면 거의 70% 이상이 될 것입니다(관련 기사 링크) 거기에 비해서는 중국의 군비는 세계 총 군비의 8% 정도 될까 말까 합니다.

    미국이 아프간, 키르기즈스탄, 이제는 베트남(!)까지 기지를 두거나 “군사협력”을 시작하여 중국 포위 전략을 가동시키는 것이지, 중국이 예컨대 캐나다나 멕시코에서 군사기지를 지어 미국을 포위한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요?

    중국이 일본이나 남한 등 미국의 지역적 하수인들을 먼저 공격하여 대미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재무장중인 일본을 이용하여 미국이 중국에 대한 어떤 도발을 도모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정해볼 수 있다는 것이죠.

    중국이 그 지역에서의 위치를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지역강국이라면, 미국은 이와 같은 지역적인 독립성 내지 블럭화마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세계적 패권 세력이죠. 그 두 세력 중에서는 어느 쪽이 세계평화를 더 위협하는지, 아마도 <노동자연대>에서의 기사를 쓰신 분도 아주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중국이나 북조선의 “편”을 들 일은 없습니다. 제가 갈망하는 것은 그 누구의 “편들기”도 아니고 동북아 평화이자 세계평화입니다. 지금 이 평화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미-일-한의 침략동맹이라는 것은 저의 판단이며, 저는 이에 따라서 이 동맹의 동북아에서의 도발적 움직임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 뿐입니다.

    위의 기사를 쓰신 분도, 저도 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사회주의자라면 일차적으로 본인이 문서상 속하는 부르주아국가의 지배자부터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투쟁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적은 내부에 있다”는 백 년 전의 반전 사회주의 운동가의 격언대로 중국이나 북조선 등 한국의 “공식적 적”보다는 한국 자국의 문제부터 짚어서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게 제 임무라고 사료합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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