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총회와 기후 동맹
    [에정칼럼] 기후정의운동의 현재
        2015년 05월 27일 03: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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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프랑스에서 아닉 지라르댕(Annick Girardin. 51)이 방한했다. 그녀는 외무부 산하 개발 및 프랑스어권 국가 담당 장관(Junior Minister)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데, 현재 좌익급진당(Radical Party of the Left; PRG)이라는 중도 성향의 소수 정당에 몸담고 있다.

    지난 5월 22일에는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12월 파리에서 열리는 기후변화총회(COP21)의 의제와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하는 신기후체제(Post-2020) 협약을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하면서 한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을 당부했다. 총회 개최국의 입장에서 각국을 돌며 ‘기후 외교’를 펼치는 것인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녀의 발언에서 특이한 점은 “기후 동맹”이라는 말이다. 국가, 지방정부, 기업, 연구 집단, 시민사회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동참해서 파리에서 건설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기후 동맹이나 이와 유사한 용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고 하니 어쩌면 자연스런 수사적 표현으로 여길 수도 있고, 총회를 잘 치루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넘길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후행동, 더 엄밀히 말해서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등의 개념과 운동에서 비슷한 이름의 동맹을 꽤 일찍부터 주장해왔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누구냐, 꼭 집어 말하긴 곤란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소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책임과 우리 모두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라는 호명이 공동의 의식과 공동의 역할을 주입하는 데 효과적일지라도 말이다.

    핵심은 같은 편을 먹은 동맹이 상대해야 할 다른 편에 선 동맹을 누구로 보는지, 어떻게 상대하는지, 즉 정치적-사회적 프레이밍이다.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피아 식별이 불필요한 비적대적 모순으로 인식하거나 그런 적대를 드러내는 게 통합적 운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하나다’라고 주장하면 된다.

    이와 반대로 기후변화를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적대와 모순과 갈등을 밝히고 거기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 실천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면, “운동을 가로지르는 기후운동”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 그럴까?

    기후총회

    2013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기후변화총회 자료사진

    한국 정부와 기후총회, 각자가 너무도 명백한 대의기구고 그 대의기구의 비대칭적 권력 행사장이라면, 시끄럽게 떠들고 즐겁게 춤추고 노래 부르며 난장을 치는 것 말고 다른 걸 하는 게 의미 있을까.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국제적 공공재 창출의 실패를 예방하고 대단히 느슨한 수준과 형태의 논의 테이블을 유지하는 데 사실상 동의된 국제 무대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꼭 해야 할까.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차원에서 환경, 종교, 시민, 노동, 기업 분야의 모든 세력들이 모여서 뭔가를 도모하는 ‘큰 판’은 중요하다. 간혹 판이 서로 충돌하는 전환의 시대를 기대할 수도 있다. 판의 충돌이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수습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인상에, 태양광과 풍력 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개선에, 그리고 핵발전 노동자들의 정의로운 전환에, 따뜻한 관심을 두지 않거나 어떤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면, 그게 바로 기후변화 환원주의거나 기후정의의 아전인수인 것이다.

    2년마다 수립하는 전력수급기본계획과 5년마다 수립하는 에너지기본계획은 ‘에너지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소재이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이 중앙집권적 에너지 시스템을 해체하는 데 쓸모 있다고 하는, 에너지 협동조합이나 지역에너지공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큰 환경단체도 있고 작은 연구소들도 있다. 소수지만 국회에 의원들과 보좌관들도 들어가 있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시스템을 욕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도 문제지만 파리가 마지막 탱고를 추는 연회장이라 부추기는 것도 문제다.

    기후운동, 그리고 기후정의 운동의 실패는, 기후 정치와 에너지 정치를 주장했지만 정작 정치적 기후와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만 되면 모여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현실은 너무 팍팍하고 극복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다.

    사회가 우선한다는 주장이나 자연이 우선한다는 주장, 모두가 틀렸지만, 우리에겐 그런 논쟁도 없었다. 마치 매드 맥스(Mad Max)에서 누가 미친 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리바이어던이 꿈틀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와 그들, 너와 나가 구분되지 않는 시절이 왔다. 처음부터 그런 구분이 없었는지 모른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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