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 야바위꾼들의
    국민 지갑 털기 작전 전모
    [책소개]<검은 머리 외국인>(이시백/ 레디앙)
        2015년 05월 16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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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친과 노조는 곧바로 공항과 항구로 노조원들을 보내, 검은 머리 외국인들로 지목되는 인사들이 해외로 달아나는 걸 감시했다. 바샤 전 총리를 필두로 유니온 페어의 먹튀와 관련된 모피아들이 줄줄이 경찰에 체포되는 날, 천 년 묵은 야자나무 아래에 노조원과 시민들이 까맣게 모여 비로소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까멜리아은행을 축하했다.” – 본문 중에서

    론스타는 2003년 외환은행을 샀다. 2012년에 그걸 되팔았다. 10년도 채 안 돼서 배당금과 매각 대금 등 모두 4조7천억 원을 남겼다. 이 거대한 매매 차익 실현에도 불구하고 론스타는 한국 정부 때문에 충분히 돈을 못 벌었다며, 투자자-국가 소송(ISD)을 제기했다. 론스타가 주장하는 손해 규모는 5조 원을 웃도는 천문학적 숫자다. 2015년 5월 15일부터 워싱턴에서 본격적인 소송이 시작된다.

    IMF 이후 국내 은행이 외국계 자본(사모펀드)에 팔려 가는 과정에서 ‘외화 유치’만이 살길이라는 주장 속에 적잖은 무리수들이 동원됐다. 특히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는 산업자본 논란 속에 론스타가 은행을 인수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며, ‘먹튀’ 논란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비밀 10인 대책회의까지 열어 인수를 강행하는 등 한국 경제부처 고위 관료들이 무리수와 부정의 당사자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외환은행이 해외 기업에 넘겨야 할 정도로 부실 상태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 얻고 있다.

    “재무성과 재계에 포진하고 있던 전현직 모피아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프로젝트 트로이>라는 기획안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까멜리아은행 인수 작업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유니온 페어가 눈독을 들인 까멜리아은행이 매각을 할 만큼 부실하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았지요.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이며 까메리카의 변호사로 유니온 페어의 법률 자문을 하던 스티븐 호크와 골프를 치는 자리였어요.” – 본문 중에서

    그런데 만약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입할 때 동원된 자금의 주인 상당수가 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을 가장한 한국 사람이라면? 그것도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고위 관료들과 거대 로펌이 그 돈줄과 연결이 됐다면? 국민들은 나라가 어렵다며 장롱의 금을 꺼내 모아 경제 위기를 넘기고자 모두 한마음으로 힘썼는데, 그들은 부실 여부 자체가 쟁점이었던 국내 은행을 무리하게 외국 자본에 넘기고, 되파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엄청난 시세 차익을 챙겼다면? 이건 나라가 뒤집어질 엄청난 ‘반국가적’ 사건이다.

    “환치기 증거는 찾지 못했으니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 루반 씨에게 뒤지라고 한 계좌가 검은 머리 외국인과 관련된 건 확실한 거 같아요.”

    줄메 변호사가 자신을 지목하였지만 루반은 무어라 덧붙일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바샤가 정말 유니온 페어에 투자를 했다는 겁니까? 자기 나라 은행을 사모펀드에 팔아먹는 일에 부총리까지 한 사람이?”

    “유니온 페어가 까멜리아리드은행, 모닝캄뱅크를 인수하려 할 때만 해도 금산분리법을 내세워 사모펀드라 안 된다고 버티던 금관원이 어째서 까멜리아은행 때는 그렇게 친절해졌느냐를 봐야 합니다.” – 본문 중에서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국처럼 IMF 구제금융 시대를 거친, 저 멀리 카리브 해에 있는 ‘까멜리아’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피아들이 유니온 페어에서 리베이트로 받은 돈으로 유니온 페어에 다시 투자를 했다는 말에 모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니온 페어가 아이엠에프 때 부실채권을 사들여 돈을 벌었는데, 그때 유니온 페어에 돈을 맡긴 투자자 가운데 상당수가 까멜리아 사람들이라는 건 국세청 자료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더 기막힌 건 그 투자금을 대부분 국내은행에서 빌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본문 중에서

    이시백은 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검은 머리 외국인』이 ‘작가의 상상에 의해 쓰였으며, 대한민국의 어떠한 특정 사실이나 인물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진행형’인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와 함께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론스타-외환은행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은 사실이다.

    “민중이 지닌 모순과 사소한 악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니고 있는 건강성과 낙천성을 해학 넘치는 필체로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이 같은 미덕을 모자람 없이 발휘하고 있다.

    검은머리 외국인

    이 소설은 까멜리아은행을 미국 사모펀드인 유니온 페어가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다 은행에서 해고당한 후 사채업을 하던 주인공 루반이 까멜리아은행 인수를 둘러싼 거대한 흑막을 벗겨 나가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줄거리의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모피아로 불리는 경제 관료 인맥 내부의 탐욕과 타락상, 매각 저지 투쟁을 둘러싼 노조 내부의 갈등, 초국적 자본의 행태 등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국가라는 공적 가치보다는 자신들의 인맥과 그것을 통한 사적 이익을 더 추구하는 국가 고위 관료들의 행태,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는 초국적 자본 운영자들, 이들과 엮여 있는 고위 공직자와 대형 로펌 간의 물고 물리는 이해관계의 적나라한 실체가 거리낌 없이 폭로되고 있다. 처한 위치와 계급은 다르지만, 자신을 태워 죽이는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처럼, 탐욕의 불꽃을 향해 목숨을 걸고 돌진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선명한 캐릭터와 함께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아줌마, 워디 편찮으신가 본데, 이러다 다치셔. 돈을 썼으믄 갚어야 허는 거 모르셔? 금전적인 문제는 협조적으루 헙시다.”

    족제비가 한껏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건네도 여자는 지갑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요지부동이다.

    “네미, 저승사자두 돈만 주믄 고속 열차루 올 걸 완행열차루 온다드니, 증말.”

    보다 못한 족제비가 여자를 밀치고 지갑을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울 엄마 신장 판 돈이라구요!”

    뒤편에 나동그라져 있던 청년이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다. – 본문 중에서

     

    “시방 전화건 디가 워디여?”

    “워디라믄 알겄어? 여서 전화 한 방 날리믄 일분 안에 수천 군데루 날아가. 뉴욕부텀 아프리카 나이로비까정!”

    “돈두 솔찮이 벌겄네?”

    “워쩌? 전업허려구?”

    “암만 혀두 심각허게 생각 줌 해 봐야 쓰겄어. 가랑이 찢어지게 뛰댕겨 봐야 배 째라는 것덜 투성이구. 이 일두 쓰리디 중 하나래니께.”

    “배를 직접 째는 겨?”

    “내는 좀 더 부드러운 디를 째지.” – 본문 중에서

    하지만 저자는 자본가와 모피아로 대표되는 관료들은 악의 세력이고, 여기에 대항하거나 당하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선한 민중이라는 도식을 벗어나고 있다. ‘난생 처음 접하는 금융의 오만 가지 복잡한 용어와 수법을 공부하느라 머리털이 하얗게’ 센 저자는 가상의 나라 까멜리아의 비극이 모피아들만의 것이 아니라, 자본이 부추기는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주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은행노조의 내부 갈등과 ‘원칙적 주장과 강경 투쟁’을 내세우는 조합원을 내치는 또 다른 조합원들, ‘엄마의 신장을 팔아서 만든 돈’을 노름판에 날리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본이 ‘생산’해 내는 욕망의 덫에 예외가 되기는 너무 어렵다는 작가의 관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시백이 주도면밀하게 취하고 있는 서사 전략은 민중의 ‘괴물’과 같은 모습에 대한 비판적 자기 풍자를 적극화하는 것”이라는 고명철(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초국적 자본과 이에 결탁한 경제 관료들의 탐욕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러한 탐욕의 거미줄에 걸려서 파닥거리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도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민중에 덧입혀진 반민중성을 민중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를 갖도록”(고명철) 하는 저자의 의도는 이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성찰적 민중론이 갖는 의미가 국경을 넘나들고, 국가를 사유화하는 자본과 권력의 탐욕과 부정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관과 그 세계관이 쏟아 내는 욕망에서 벗어나서 살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성경 구절까지 동원하면서 합리화하는 수준까지 와 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주인이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이는 그걸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열심히 불려서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걸 땅을 파묻어 그대로 한 달란트만 남겼다는 대목 말입니다. 거기 보면 주인이 나중에 돌아와 금을 많이 불린 종들은 칭찬하고, 땅에 묻어 한 달란트만 그대로 가져온 종에겐 몹시 화를 내며 그 종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했잖습니까. 거기 말씀이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셨더란 말입니다.”

    “그렇죠. 종을 쫓아냈지요.”

    “그 대목을 읽으며 하나님이야말로 일찌감치 자본의 요체를 꿰고 계신 분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수천 년 전에 벌써 자본가의 아름다운 덕성을 정확히 제시한 대목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그 성경에 나오는 종이 바로 공무원 아닙니까. 시킨 일만 하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복지부동하는 요즘 풍조야말로 쫓아내야 할 악습이 아니겠습니까?” – 본문 중에서

    마침 최근 <뉴스타파>는 외환은행을 사들인 론스타 펀드에 자금을 투자한 사람 가운데 당시 경제부처의 핵심 고위 당국자, 모피아의 친인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사람은 3억9천만 원을 투자해서 109억 원을 벌어들였다. 수익률 2800%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들이다. 이제 5월 15일부터 5조 원이 넘는 돈이 걸린 투자자-국가 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코앞 미래에 벌어질 일이다. 론스타 사건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소설은, 문학은 이런 현실을 기록하는 저널리즘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리얼한’ 민중의 삶의 이야기를 질펀하고, 걸쭉하게 그리고 힘 있게 끌고 가는 역량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가 이번에는 자본과 권력의 속살을 펼쳐 보이면서 이에 맞선 보통 사람들의 싸움의 속사정도 리얼하게 그렸다. ‘확장된 이시백’의 새로운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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