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지식과 삶을 분리하려 하나
    [토론] 김원호 씨 글에 대한 반론
        2015년 05월 11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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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김원호씨의 글(‘우리는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반론이다. 김원호씨는 공부하는 이유를 전면에 제기하면서 필자와 “교육을 대하는 근본적 태도의 차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가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과 삶의 결합

    김원호씨를 비롯하여 필자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이고 일관된 견해는 지식과 인격 또는 삶은 다르다는 것이다. 김원호 씨는 필자의 교육관이 지식학습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대안으로 “삶과의 연결”, “자기 자신 되기”, “삶을 사랑하는 기술”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한 인간의 삶에서 그리고 한 인간이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지식은 불필요한가? 그냥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엽적인 요소일 뿐인가? 궁극적으로 지식과 삶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안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에서 매우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수렵채집 시대라면 주변 동식물의 생태나 습성을 잘 아는 것은 한 인간의 운명 나아가 한 부족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저기 있는 사자는 어떤 상태인가? 배부른 상태인가? 그래서 상대적으로 안심해도 좋은가? 아니면 굶주려 당장 몸을 피해야 하는가? 저 버섯은 먹어도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쓰러진 들소를 지금 공격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모든 문제들은 어떤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면서 삶 그 자체이다.

    농경시대의 농민이나 장인도 마찬가지이다. 농민은 씨앗을 언제 뿌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날씨와 기후를 살피고 어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야 하는 시기가 되면 그 시작을 알리는 제사를 지내고 농사를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놀이(?)를 한다.

    모내기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고단한 작업을 함께 이겨내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삶과 생활이 어우러진다. 그런데 거기서 언제 모내기를 해야 하고 어떻게 모내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식을 분리할 수 있는가? 농기구를 만드는 장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장인은 불의 상태와 온도에 대한 수천년간 쌓인 지식을 자신의 생활과 인생에 녹여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해당 시기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통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생산하며 교환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 인간다움을 발전시켜온 과정이다.

    삶과 지식이 일치된 삶… 그것이 무지렁이 민중들이 살았던 생활 그 자체이다. 반면 삶과 지식을 분리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다. 박규현 씨가 말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김원호 씨가 말하는 “삶과의 연결”, “진정한 자신 되기”를 기원했던 수행자(?)들이 그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위대한 선각자라 부른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지식이 통일되어 있었던 무지렁이 민중들의 활동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위대한 선각자들을 찬양하면서도 그 이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플라톤과 수행자들을 먹여 살렸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 또한 온전히 복원하려는 것 아닌가?

    김원호 씨를 포함하여 이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지면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이해되지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이 대목이다. 그리고 내가 대안학교를 비롯하여 혁신학교, 전교조 등에 비판적인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왜 삶에서 지식을 집요하게(?) 배제하려 하는가?

    수학공부

    출처 교육부 블로그(경북의 한 중학교 수학수업 모습)

    몇 가지 문제

    1) 중년층과 아이들의 부조화

    김원호 씨의 글 중에서 필자가 공감하는 내용이 있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사회 구성의 변화는 교육의 주제이기 이전에 교육의 환경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아이들은 이미 이러한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시대 조건 속에서 교육받은 어른(교사, 부모)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화두에 둔감하지 않은가?”이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도 위의 내용이다. 학부형과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마치 다른 세계, 다른 시대 사람을 보는 듯하다. 특히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의 세례를 온전히 받고 있는 학생들과 인문고전을 중시하는 중년 세대와의 괴리는 꽤나 심각하다.

    그런데 김원호 씨의 답은 모호하다. 김원호 씨의 주장을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양 세대가 그렇게 과학기술에 대한 체감도가 다르지만 “의미 있는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할 것인가? 네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와 같은 어른 특유의 삶의 자세가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의미 있는 즐거움, 사랑스럽다는 느낌은 첨단 과학기술을 공부하면서는 할 수 없는 일인가? 그리고 세대 간의 교감은 당연히 시대에 대한 공감 속에서 더 발전하는 것이다.

    2) 김원호씨는 “경험적으로 연극. 음악. 영화 만들기와 여행. 텃밭활동. 목공. 요리. 옷 만들기 같은 수업에서 아이들이 생의 기쁨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도 공부를 빼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부는 필요한 일이긴 하나 인생의 희열을 느낄 수는 없는 특별한 영역이란 말인가?

    적어도 내 경험은 많이 다르다. 지성의숲은 공부와 재미가 병존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했고, 3년여의 활동 속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중1~2 꼬맹이들이 미적분을 푸는 과정을 보며 황홀해 한다. 2~3시간 숨 막히는 공부를 마치고 치킨을 나눠 먹으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본 적 있는가? 필자는 이런 광경을 많이 지켜 보았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나는 지난 3년간 주로 기초가 안 되어 있는 학생들을 많이 상대했다. 고등학생인 데 1차방정식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학생들…. 나는 녀석들에게 1차방정식, 분수셈부터 가르친다.

    시험이 끝나고 녀석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도 20점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냥 찍어서 10점이라면 이번에는 몇 문제 풀었는데 아쉽게 틀려서 20점이란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자신과 시험 전 휴일을 보내 준 선생에 대한 애정과 자신도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존감이 들어 있었다.

    자 다시 한번 묻자. 인간다움은 공부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인가? 역으로 다시 한번 묻자. 도대체 학생들의 자존감이 그네들이 하루 7~8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공부를 통하지 않고 가능한 일일까?

    남은 과제

    공부와 지식을 분리하는 현상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동서고금에 존재했던 보편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70~90년대 진보의 시대를 살았던 특별한 어떤 세대의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대안학교. 혁신학교. 전교조의 교육 기조는 물론 2015년 진보의 뿌리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 세계관에 대한 타당성을 묻기 전에는 새로운 교육운동, 새로운 진보의 출현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다. 다음에는 이런 문제들로 논의를 이어가 보겠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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