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토론] 아이들의 삶과 교육에 대해
        2015년 05월 09일 11: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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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우의 글로 시작된 대안학교를 둘러싼 토론에 대하여 경기도 의왕에 위치한 도시형 대안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 길 길잡이 교사인 김원호 선생이 글을 보내주었다. 교육에 대한 다소 다른 시각들의 대화이지만 생산적인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해왔다. 이하 존칭 생략.<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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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우가 제기한 주장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나누고자 한다. 이미 반론이 올라왔지만 대안학교 교사의 입장에서 고민되는 몇 가지 질문을 나눠보고 싶다. 우연하게 열린 토론의 장을 통해 풍부한 담론이 생성되길 바란다. 아울러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담론이 형성되기 바란다.

    민경우의 글에서도 지적되고 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안학교를 가리켜 “공부 안 하는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안학교가 공부를 안 하거나 적게 한다면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1. 당신이 생각하는 공부는 무엇인가?

    2.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민경우의 글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부는 지식 학습을 말한다. 그것이 인문∙사회를 말하든 자연과학을 말하든 “공부”라는 말 이면에는 지식을 학습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안학교가 “공부”를 덜 하는 것은 분명히 맞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할까?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첫 번째 질문과 연결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공부가 최첨단 자연과학을 학습하는 것이라면,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고도지식 사회의 쓸모 있는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다. 민경우는 대안학교가 인문∙사회를 자연과학보다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안학교에서 생각하는 공부란 인문∙사회를 학습하는 것이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인문∙사회를 학습한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을까?

    물론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에 교육을 대하는 근본적 태도의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사회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과정으로 본다. 민경우의 글도 이런 입장을 보여준다. 학교의 확대(공교육의 확대)가 근대 사회의 새로운 체계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음은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된 사실이다.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인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는 교육을 대하는 낡은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하는 많은 청(소)년들이 이 사회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라”는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을 자원화 하는 교육이 낳은 폐해다. 그리고 그 폐해로부터 교육을 대하는 다른 태도가 나타났다고 본다.

    10대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어려운 부분은,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해서가 아니다. 낮은 자존감과 무기력을 마주할 때이다. 인문∙사회냐 자연과학이냐의 고민보다 대안학교 현장에서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의 낮은 자존감과 무기력,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의 문제들이다.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수업 시간에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성장”의 시간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대안학교는 각 현장마다 각자의 교육 과정을 실천하고 있다. 서로 다 다른 교육과정이기에 일반화하기는 어려우나 몇 개의 키워드를 뽑는다면 자치, 돌봄, 자립, 살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안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중 수업과 함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 배우기를 바라는 것,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삶과의 연결”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있다. 자기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자존감의 상승과 무기력의 소거를 가져온다. 그렇게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성장이 아닐까. 각 대안학교의 모두 다른 교육 과정 속에서 느슨하게 동의되는 고리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쓸모 있는 인간 되기”가 아닌 “자기 자신 되기”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을 자원화 하는 교육에 대한 다른 태도의 접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민경우가 제기하는, “세월호와 광주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나 역편향으로 자연과학의 문제는 경시한다”는 지적은 잘못된 해석이다. 광주와 세월호에 적극적인 태도는 삶과 맞대어 피부로 느껴지는 “고통”의 감수성이다.

    만약 세월호와 광주를 사회 또는 역사라는 교과 지식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대개의 아이들은 어떤 관심도 가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안학교에서 강조하는 인권과 사회 문제는 자치와 살림과 더불어 인문∙사회 차원의 지식적 접근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고 그에 대해 자기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시간,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시간이다.

    길

    출처는 민들레 http://www.mindle.org/xe/525542

    대안학교 각 현장마다 추구하는 교육의 기조는 모두 다르다. 왜 모두 다를까. 민경우의 주장처럼 교육의 목표는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교육의 목표라는 것이 하나의 어떤 것으로 수렴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아이는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없거나 끈질긴 불화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의 수만큼 다양해져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수만큼 다양한 교육의 목표와 실천을 통해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읽어내야 한다. 대안학교가 시대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잘못된 교육 기조를 추구한다는 민경우의 주장과 달리 대안학교 현장에서 추구하는 교육 목표는 아래로부터의 수렴 과정 속에서 변화와 진통을 겪으며 형성된 것이다.

    물론 느슨하게 각 대안학교가 추구하는 공통된 인간상이 있다. 대체적으로 종합한다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이를 넘어서 타인의 자립을 돕고 돌봐줄 수 있는, 현대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개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공통점은 인문∙사회냐 자연과학이냐를 넘어서, 아이들로부터 수렴된, 대안학교 현장이 읽어낸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민경우는 현재 가장 중요한 교육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창조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과 인공지능. 복제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사회 구성의 변화는 교육의 주제이기 이전에 교육의 환경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아이들은 이미 이러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체감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시대조건 속에서 교육받은 “어른”(교사, 부모)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화두에 대해서 둔감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자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도 끈질기고 소중하게 추구되었던 어떤 “삶의 기술”을 키워냈기 때문이 아닐까.

    빅데이터와 양자역학을 몰라서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존재의 의미(생의 기쁨)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 아닌가. 대안교육 현장에서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다. 인문∙사회, 자연과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보다, 의미 있는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할 것인가? 네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경험적으로 아이들이 생의 기쁨을 표현한 순간은 연극∙음악∙영화 만들기와 여행, 텃밭 활동, 목공, 요리, 옷 만들기 같은 수업에서였다. 인문∙사회 대 자연과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이전에, 이 수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수업시간에 또는 자연친화적 활동 시간에 살아나는 아이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민경우는 “공부는 자신과 사회에 쓸모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아무데서나 배울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전문적이고 특별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거꾸로 말하고 싶다. 대안학교와 공교육을 비롯하여 많은 현장의 교사와 부모, 교육 활동가들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추구한 교육은, 아무데서나 배울 수 있지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치, 바로 삶을 사랑하는 기술이라고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에 대한 토론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을 지식 전수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강의만으로는 교육이 되지 않는다. 수업 속에서, 수업과 수업 사이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역동을 파악하고 함께하는 보육의 차원을 간과하는 순간 아이들은 지식 전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때문에 교사들과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겉으로 드러나는 대안교육의 모습은 “공부”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자,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공부란 무엇인가?

    이 토론이 교육과 아이들의 삶을 연결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또한 레디앙에 기고된 이 글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교육 담론” 논쟁의 장에 많은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도시형 대안학교 더불어가는 배움터 '길' 길잡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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