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의 흐름과 변화,
    그것에 질문하고 답변해야
    [토론] 박규현씨 글에 대한 재반론
        2015년 05월 08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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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우 글 / 박규현 글 장원윤 글 링크

    박규현씨의 글은 첫째. 교육의 목표는 인격의 완성. 천부인권. 생태적 가치이고 둘째. 필자의 주장은 기능적 지식인을 양성하자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각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몇가지 내용을 첨언하도록 하겠다.

    1. 교육의 목표

    교육은 사회와 동떨어진 별종이 아니라 그와 밀접히 결합된 존재이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를 논하기 위해서는 현 시대, 현 사회가 어떠한가에 대해 논해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현 시대.현 사회의 결정적인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과학기술 발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대한 대안적 질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간단히 정리하면 빈부격차를 의미한다. 이를 박규현씨처럼 생태 문제로 파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위 두가지 점에서 필자는 전자가 보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 시대에 따라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구조의 건설적인 재편은 상호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현 시대의 특징은 전자의 발전이 상황을 압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유전자를 조작하여 진화의 메커니즘을 바꿔 버리는)를 뛰어 넘거나 인간의 창조물이 인간 자신보다 더 지성적일 수 있는(인공지능) 단계로 접어 들었다. 이런 정도라면 향후 시대는 상상하기 어려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축으로 빈부격차나 사회적 갈등, 국가간의 충돌 같은 정치적 문제가 상호 결합하는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시대에 맞는 올바른 세계관(시대관)의 견지에서 본다면 교육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창조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과 인공지능. 복제인간 사이의 관계이다.

    박규현씨가 그의 반론에서 거론한 인격의 완성 또한 해당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지 보편적인 질문이 아니다. 수렵채집 시대 자연계의 위협에 직면했던 인간이 직면했던 핵심 질문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였다. 이에 대해 인류는 애니니즘.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사유체계를 발전시켰다.

    농경과 철기의 도입으로 인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자연계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난 반면 인간 사이의 갈등이 중심 주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다양한 대답이 등장한다. 아마도 박규현씨가 말한 ‘인격의 완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인격의 완성이라는 질문이 초역사적인 산물이 아니고 자연계로부터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인류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박규현씨가 언급한 소크라테스가 되었든, 플라톤이 되었든 불교나 유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21세기에 철인이나 인의예지 따위를 논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가 흙.물.불.공기로 이뤄졌다는 것 만큼이나 허망한 주장이다. 옛날 사람들의 생각으로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에 의지해서 21세기의 주제를 탐구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대답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직면했던 시대상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얽매어 있던 고대인들에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던진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는 박규현씨가 단언한 것처럼 “동서고금의 교육의 목표는 사실 다르지 않다. 여러 번잡한 문명 성격에 따른 표현 차이를 넘어 그 속내를 보자면 한 가지다. 다름 아니라 인격의 완성이다”와 같이 이미 결정된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게 탐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교조는 대체로 의문을 던져야 할 시기에 이미 답은 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필자가 인문고전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갖는 심각한 의문은 위와 같은 태도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유전자를 조작하여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인간인가 아닌가? 인간이 만든 컴퓨터는 단순 연산을 뛰어 넘어 인간을 앞선 지식과 심지어 감정까지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궁금한 세계관, 내가 가르쳐야할 시대관은 이런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그런데 박규현씨는 교육이 담지해야할 시대관이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격의 완성, 천부인권의 회복, 생태…. 인격의 완성, 천부인권은 고대와 근대의 위대한 지성들이 자기 시대와 조응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던졌던 또는 전제했던 개념들이다. 그들의 개념은 그들에게 돌려 주자.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넘어 우리의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지적 취미생활로 해도 좋다는 마지막 단락에 화(?)가 난 듯 하다. 문투가 무례했다면 사과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대에 대한 고민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양보할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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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학생들은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를 본다.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산드라 블록은 땅 위를 딛고 서서 21세기에 중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미를 묻는다.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은 임종을 앞둔 딸과 중년의 아버지와의 조우이다. 이 황당한(?) 장면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있어 본 적이 없는 시간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문제를 화두로 삼고 그에 대해 토론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런 고민들을 고무하고 그런 주제에 착목하도록 자극하지 못한다면 그런 인문고전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인문고전 그 자체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화석화된 인문학이다.

    2. 최첨단 지식, 쓸모있는 지식.

    박규현씨는 필자가 수학과학을 강조하고 최첨단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기능 자산으로…. 자본가나 국가 권력이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과학기술(이과)에 능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개인으로서의 경쟁력, 한 마디로 취직 잘되는(?)”, “철 지난 기술만능주의와 근대 전형적 병폐인 도구적 인간관을 옹호”한다는 등으로 폄하했다. 이에 대해 반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세계관과 직결된 사유체계이다. 그리고 현재의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고도의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최근의 자연과학은 내가 대학 때 배웠던 질문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수학은 0과 무한에 대해 묻는다. 칸토오의 집합론을 읽다 보면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묻는다.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는 물리학의 성과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의 주체가 생물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것이 그냥 실용적인 지식인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70~80년대 학번들의 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 대해 잘 안다. 그들은 현재의 수학과학을 실용적이니 기능적이니 논할 입장(수준)이 아니다.

    반면 칸트의 절대시공간을 논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건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이 물.불.흙.공기로 이뤄졌다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주장이다. 박규현씨가 언급한 데몬, 철인, 존재의 대사슬, 인의예지, 사단칠정 모두 다 그런 수준의 이야기다.

    시대적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전제하거나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결론을 21세기에 다시 들먹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옛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정도로 역사책에 소개하면 끝날 일이다.

    둘째. 박규현씨를 포함해 다수의 주장들에서 쓸모있는 지식을 기능적인 따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또한 희한한 논리이다.

    지식은 쓸모있어야 한다. 수렵채집 시절이라면 수많은 약초 중에서 독초를 구분하는 것은 생존을 좌우하는 매우 결정적인 문제이다. 농경 시절이라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추수를 할 지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항생제를 통해 전염병을 퇴치한 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일이다.

    한편 쓸모있는 지식이란 시대의 과제, 세계관과 부합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와 박규현씨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여기서부터는 독자의 판단이다.

    박규현씨는 인격의 완성. 천부인권. 생태 등이 시대적 과제이고 이를 해결할 통합적인 안목이 중요한 지식이라면 수학과학 등은 기능적인 학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시대적 과제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이고 이를 위해서는 수학. 과학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그것과 상관없는 지점에서 부합하지 않는 인문고전을 공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기타 몇가지 문제

    1) 대안학교가 공부를 안한다는 문제에 대해

    박규현씨는 현실적으로는 맞는 지적인데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주장한다. 반면 필자의 주장은 대안학교의 설립 취지나 이념 자체가 그런 경향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 박규현씨와 같은 주장이 맞다면 이런 논쟁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 직접적으로는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경향과 풍토가 학생들의 미래를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체험하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댓글 등에 보면 공부할 필요 있는가 또는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는가 그냥 잘 놀고 좋아하는 것하며 인생을 보내면 되지 왜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글을 본다. 나는 최근 우연히 이런 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그들과의 이해하기 어려운 실랑이를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돈이 오가는 순간에 그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을 기억한다.(이에 대해서는 훗날 자세히 쓰겠다. 이른바 인문고전주의자들의 계급적, 경제적 기반에 대해서)

    공부는 자신과 사회에 쓸모있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아무데서나 배울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전문적이고 특별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이 당연한 상식을 부정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논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입장만 확인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두 가지만 확인하겠다. 첫째. 서로 입장이 다르다는 것, 둘째. 서로의 생각을 견지하되 말과 논쟁이 아니라 돈이 걸렸을 때도 그런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2) 지식에 대한 편향도 1)과 마찬가지이다. 인문고전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니라 그런 철학과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인성에 대한 부분은 적절하지 못했다. 학원 선생들과 함께 논의했던 것은 대안학교의 인적 규모가 너무 작아 다양한 인간관계를 갖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인데 대안학교를 비판하는 차원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내용이다.

    4) 자연친화적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박규현씨는 필자가 비판하는 류의 자연친화적 활동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필자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지난 3년간 도시 농업, 텃밭가꾸기 심지어는 문명과 교류하지 않고 야생 생활을 하는 것을 권장하는 풍토까지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필자는 본 지면에서 교육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대안학교에 대한 글도 연재의 일환이었다. 필자는 전반적인 교육현안에 대해 가감없이 말해 보고자 한다. 좋은 공부가 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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