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죄수 사이에서
[기고] 재판정에 서는 게 일상이 된 삶
    2015년 05월 08일 10: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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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꼬박 새버렸으니… 오늘은 다시 재판정에 서야 한다. 일상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작년 세월호 추모행동 관련으로 1심 선고가 있는 날이라 약간은 긴장이 된다. 이럴 때마다 주변 정리하고 집 정리하는 것도 이젠 귀찮고 심드렁하다.

2011년 희망버스 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는 몇 년 동안 내내 반복된 일이다. 약간의 마찰이라도 예상되는 날이면 매번 간단하게라도 신변 정리를 해두고 집을 나서야 했다. 보석으로 막 나와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 투쟁을 하던 때는 다시 집을 나와 생활하기도 했었다. 유성기업 희망버스를 하던 때도 그랬고, 어느 침탈 현장으로 달려가야 할 때마다 잠깐이라도 마음 정리를 먼저 해야 하기도 했다. 특히 작년 세월호 추모 관련으로 청와대 항의 행동에 참여할 때는 매주 반복했던 일이다. 책상을 치우고, 폴더들을 정리해두고, 몇 가지 전달과 당부의 말을 아내에게 남기고 현금 3-4만원만 달랑 호주머니에 챙겨 나가는 일이었다.

작년 연말과 연초 기륭, 쌍차, LGU+, SK브로드밴드,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들과 ‘비정규 법제도 전면폐기를 위한 오체투지’를 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평화로운 시위 방식이었지만, 정부와 경찰은 ‘민란’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고 행진 신고조차 받아주질 않는 방식으로 불법 집회를 조장했다. 민복을 입는 것 하나, 횡단보도 하나를 지나는 것 하나까지 기를 쓰고 막아섰다. 을지로와 광화문 네거리, 세종문화 회관 앞, 그리고 대법원 앞과 국회 앞, 청와대 앞 횡단보도 하나를 오체투지로 넘는데 짧게는 1시간에서 7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다. 한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 영하 7도의 날씨에 광화문 광장 바닥에 누워 여섯 시간을 버텨야 하기도 했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엎드린 채로 꼬박 날을 새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행되어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현행범 체포 운운하는 살벌한 경찰 방송 앞에서 몇 시간이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던 숱한 시간들이 있었다.

3차 오체투지까지 마친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여섯 통의 소환장이 한꺼번에 도착해 있는 진풍경을 맞기도 했다. 내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쓸쓸하기도 했다. 점점 더 옥문이 가까워지는 느낌. 한참 동안 다시 혼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날은 마침 오랜만에 아이에게 점수를 따보기 위해 무리를 해서 장조림용 소고기와 메추리알을 사왔던 날이었기에 더더욱 쓸쓸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이 쓸쓸하고 험난한 청춘을 위해 기념시라도 하나 남겨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오랜만에 시를 한 편 지어보기도 했다.

송

늦은 밤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우편물 한 묶음을 내놓는다
종로경찰서 영등포경찰서 서초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서울중앙지법
골고루 다양한 곳에서 여섯 통의 소환장이
한날한시에 와 있다. 기네스북에라도 보낼까

한 장은 기륭전자비정규직과 함께 을지로입구 사거리에서 붙었던 날
한 장은 쌍용차 해고자들과 대법원 앞 횡단보도에서 붙었던 날
한 장은 LGU+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벗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한판 하던 날
한 장은 명동 중앙우체국 앞 광고탑 고공농성 첫날 선동 혐의
한 장은 그 모든 이들과 함께 갔던 청와대 앞
마지막 한 장 중앙지법 것은 작년 세월호 추모집회 관련 재판 소환

내 기준으로는,
신고가 필요치 않는 기자회견에 추모제거나
문화제거나 측은지심이거나
차마 돌아서지 못했던 양심이거나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연대였겠지만

저들 기준으로는,
미신고 집회 주최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해산 불응 구호 제창 피켓팅 기준 소음 초과 건조물 침입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일반도로교통방해

빨리 간이 쫄아들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아이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쇠고기 장조림을 조리려고
메추리알을 잔뜩 사온 날이었다

이제 나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이들은
대한민국 경찰과 검사들 뿐
근래엔 애창곡을 이선희의 <인연>으로 바꿨다
얼마 전 2011년 희망버스 주동으로
1심에서 실형 2년을 선고받고
간신히 보석으로 살아나온 날이었다
가사가 참 맘에 들었다
“인연(2년)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그 다음 구절이 더 좋았다
“내 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그 다음 구절은 또 어떠한가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그런다고
요 근래 내게서 멀어진
아이 마음이 돌아설까마는
짭짤하니 좋다
무엇이
장조림이?
내 인생이?

– 졸시 「여섯 통의 소환장을 받고」 전문

내일이 재판인데, 오늘은 다시 공안검사실에서 출두 전화가 오기도 했다. 총 다섯 건의 작년 세월호 추모행동 중 두 건만을 기소해 재판을 붙일 때부터 이상타, 이상타 했더니 1년이 지나 재판이 끝날 때 쯤 되니 추가 기소를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건은 남겨두고, 한 건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어제는 남대문 경찰서에서 처음으로 자상하게 한참 전에 보낸 ‘내용 증명’에 답을 보내오기도 했다. 남대문서에서 조사할 건은 모두 ‘가, 나, 다, 라’ 해서 네 건이라는 친절한 답변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출두 요청 날짜가 지나 도착한 소환장이 수두룩해서 몇 번이나 내용 증명을 보내 봤지만 처음으로 받아보는 친절한 답변이라 고맙기까지 하다. 2011년 희망버스 건으로 검찰 구형을 받고 올라오던 날, 문자로 출석 요구를 하던 송파서에서 이첩했다는 올해 세월호 추모 건도 포함이 되어 있다. 종로서에서도, 영등포서에서도, 서초서에서도 빨리 보자고 안달이다. 내 업이니 내가 다 거두어야겠지만 이젠 전화를 받는 것만으로도 지치기도 한다.

송2

가끔은 정말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다. 2011년 희망버스 건만 해도, 전국에 생중계되던 국회청문회에 두 번이나 끌려가 조남호 회장이 사과하며 부당 해고가 밝혀졌던 일이다.

함께 병합되어 있는 2010년 기륭전자 포크레인 농성 건 역시 국회 귀빈식당에서 수많은 카메라들 앞에서 사회적 조인식을 갖고 끝났던 일이다. 당시 나는 포크레인에서 실수로 떨어져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고 초강력 진통제를 먹고도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며 밤잠을 못 이룰 때였다. 혼자 수술 받은 다리를 질질 끌고 검은 말뚝처럼 딱딱하게 굳은 변 사이로 미사일처럼 생긴 좌약을 밀어 넣으며 농성 과정에 준 단식을 하느라 스무 날째 못 싸본 똥 한번을 싸보기 위해 눈물 콧물을 흘릴 때였다.

역시 부산 건에 병합되어 있는 2010년 동희오토 비정규직 건도 서초동 현대사옥 앞 기자회견 참석이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횡단보도를 지나가는데 뒤따라오던 용역깡패 한 명이 기자회견 참석자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화가 난 참석자도 화가 나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한 대 갈겼는가 본데, 잘 됐다 싶은 용역깡패들이 현장에 있던 경찰들에게 신고하자마자 잘 됐다 싶은 경찰들이 현행범을 체포하겠다고 갑자기 기자회견 참석자들을 토끼몰이하며 나섰다. 당시 갑작스런 상황에 영문을 모른 채 왜 이러냐고, 사유를 대라고 항의했던 게 현행범 체포를 막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다.

서초서에서 이미 조사받은 한 건은 더하다.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자결한 염호석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노사가 합의해 비로소 장례가 열리던 날이었다. 그것도 주체 측으로부터 바로 전날 오후에 추모시 낭송을 의뢰받고 참석했던 자리였다. 물론 추모시 전에 나도 모르게 경찰 바리케이트들을 다 걷어차 버리는 작살굿을 벌리긴 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른다.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아 영결식이 끝나고 난 뒤부터 얼마나 폭음을 했던지 깨어나 보니 아무도 없는 새벽, 전해투 사무실이었다. 영안실까지 쳐들어 와 시신을 탈취하고 가족도 친구, 동료들도 모르게 강제 화장까지 시켜버린 공권력이었다. 이렇게 시신마저 탈취당한 악상에 말하자면 넋이 씌워져 추모굿과 추모시낭송을 했다는 까닭으로 시인을 소환하는 나라가 도대체 최소한의 예의는 남아 있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제일 형이 무겁다는 ‘특수공무집행방해죄’다.

이제부터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일곱 건 중 대법원 앞, 국회 앞, 청와대 앞 세 건이 이렇게 모두 기자회견 건이었다. 보도자료까지 내고 실제 기자들까지 와서 정말이지 정상적인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거나, 했던 자리들이다. 청와대 앞 기자회견 때는 경찰들과 협의 하에, 그리고 경찰들의 보호 아래 LGU+와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노동자 두 명이 생전 처음으로 청와대 안 민원실까지 들어가 항의 및 촉구 서한을 접수하고 나오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자리들이 참석자보다 경찰들이 수십 배는 많고, 무슨 충성 경쟁이라도 하듯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려고 혈안들이어서 어떤 위법 행위도 물리적으로 하기 힘든 자리들이었다. 나머지 두 건은 세월호 추모제 참석이었으니,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기자회견도, 최소한의 인륜을 위한 추모의 자리마저도 하지 말인데,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0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들의 미래를 빼앗아 80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두고 있는 100대 재벌의 편에 서지 않고, 그러고도 더 많은 해고의 자유를 달라는, 더 많은 권리와 혜택을 달라는 소수 자본가들의 편에 서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는 죄일까. 자본의 무한한 이윤을 위해 대다수 노동자서민들의 안전과 평화가 위협받지 않고, 모두가 조금은 더 안전한 세상을 꿈꾼 죄일까. 그가 만약 천대받는 걸인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갖는 생의 권리와 대통령이 갖는 권리 사이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의 권력 사이에 어떤 차이도 차별도 없어야 한다고 헌법에 보장된 천부인권을 주장한 죄인가.

동료들은 날 보고 그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좀 빠져 있어라 하지만, 도무지 그 서푼도 안 되는 ‘양심’이라는 것이 날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조금의 탄압에 물러서거나 주눅 들면 안 된다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십 년씩 이름 하나 없이 갇혀 지내야 했던 양심수 어른들도 있었다고, 5.18 광주에서처럼 총 맞아 죽을 일 없는 세상에 사는 것만도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고 술자리마다 언성을 높였던 일들이 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가중되는 탄압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수많은 현장에 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는 자신을 보며 배우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데도 악의는 전혀 없었지만 농담이더라도 어제처럼 누군가에게 ‘연예인이니 바쁘지’와 같은 말을 듣게 되면 참 기운 빠진다. 어쩌다보니 근 20여년을 쉬지 않고 이런 거리의 일들 속에서 살아왔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단 한 번도 바닥을 떠나 무슨 명예를 쫓아 살아보지 않았다고 강변해보고 싶지만, 빛나는 건 짧은 찰나의 우연이거나 순간일 뿐 그 긴 모멸과 갈등과 실무와 고뇌와 고통의 시간들을 아느냐고 항의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구차해질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또 다른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숙여야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의 끊이지 않는 투쟁과 연대의 일상에는 관심 없고,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그래봤자 하잘 것 없는 내 명성에나 관심이 있다. 관심을 넘어 자주 유명인 취급을 하며 무슨 문제라도 있는 사람인 양,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인 양 만들어 버릴 때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딱 1년 전 건을 같은 날 선고받게 된 날이기도 하다.

작년 5월 8일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밤을 함께 샜던 일이 오늘 선고되는 두 건 중 한 건의 ‘죄목’이다. 또 한 건은 작년 5월 24일, 종각 사거리에서 봉고차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있다 현장에서 연행되었던 건이다. 필시 구속일 거라 사람들이 걱정했는데 연행 당시 경찰 폭력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간신히 살아 나왔었다.

각설하고, 작년 5월 8일은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처음으로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에 나섰던 날이었다. 일명 ‘청와대 만민공동회’. 자식과 가족들을 잃고 ‘어버이날’을 맞은 유가족들을 위로하자는 날이기도 했다.

예상치도 않게 그날 추모대회가 거의 끝나가는 저녁 9시 쯤 150여명의 유가족 분들이 안산 분향소에서 영정을 내려 안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방송을 내보낸 KBS 항의 방문을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SNS 등을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KBS 사장이 사과하지 않으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말씀들이었다.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던 사회단체 사람들과 시민들 중 일부는 유가족 분들을 맞기 위해 KBS로 황급히 떠났고, 일부는 청와대 앞에서 유가족 분들을 기다리겠다고 나뉘어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다시 만난 시간은 새벽 2시 반경 청와대 앞이었다. 차량 하나 다니지 않는 음산한 새벽 도로 위로 영정 하나씩을 가슴에 품은 유가족 150여분이 걸어 올 때 그 거대한 침묵의 무게를, 육중한 슬픔의 크기를 뭐라 말해야 할까. 발자국 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를 삼가야 했던 그 길고 무겁던 1박 2일. 1박 2일을 함께 있는 동안에도 나는 영정 속 어떤 얼굴 하나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족 분들과 희생자분들의 영정 앞에 끌려나와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존엄과 분노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고 믿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최소 윤리를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종복에 불과한 그가 무릎 꿇고 유가족과 전 국민 앞에 용서를 빌고,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토록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열쇠는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할 청와대와 정부가 아니라 유가족들과 국민들이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전박대를 하던 KBS 사장이 혼비백산 달려 와 대단히 무례한 형식적인 사과와 약속을 하는 것으로 첫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은 끝나고 말았다.

이제 시작 아니겠냐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누군가 말할 때 뜬눈으로 이틀을 지샌 때문인지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도 저 앞길이 캄캄하던 기억이 난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던 교황의 말을 빌리자면 처절한 고통과 분노 앞에 어찌 ‘다음’이 따로 있을까. ‘다음’은 굳이 기약하지 않아도 언제나 다시 온다.

얼마 후 있을 2011년 한진 희망버스 2심 선고일도 공교롭게도 4년 전 1차 희망버스가 부산에 도착했던 6월 11일이다. 별 일도 아니지만, 참 날짜가 묘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부끄럽게 주절주절 내 앞의 일들을 늘어놓는 것은 이 재판의 판결들이 내 개인 일만은 아니어서다. 최소한의 사회적 양심과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국민 모두가 사실은 ‘세월호 유가족’이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국민들의 추모 행동들을, 주권자로서의 직접 행동들을 이 국가와 정부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어떻게 다루는가를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소수 자본가들의 무한한 자유와 안전, 독점을 보장하기 위해 다수의 노동자서민이 끊임없이 죽어나가야 하는 시대에 오랜만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만들었던 ‘희망버스’ 운동에 대한 사법부 판단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잡아 가두겠다면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두 내 자리들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아주 잠깐씩 연대했지만 그 모든 ‘민주’의 자리를, ‘투쟁’의 자리를, ‘저항’의 자리를, ‘희망’의 자리를 지켰던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 서민들이었다.

내가 잠깐씩 연대했던 대추리 마을을 몇 년 동안 밤낮없이 지켰던 이들은 대추리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일흔의 할배였고, 여든의 할미였다. 언론의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처절하게 지금 강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밀양을, 청도를 지키는 사람들도 기본은 모두 이름 없는 주민들이다. 용산 4가를 지켰던 이들도, 지금도 살인적인 투기개발 세력들에 맞서 무수한 철거 현장들에서의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도 이름 없는 철거민들이다. 쌍차든, 한진이든, 삼성전자서비스든, 기륭이든, 동희오토이든, 콜트콜텍이든 모든 노동 현장들에서 오늘도 생을 걸고 일상적으로 싸우는 이들 역시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가끔 추모제에 나가보기도 하고, 함께 날을 지새보기도 했지만 오늘도 어제도 다시 침몰 당하려는 세월호의 참혹한 선실 속에서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싸우는 이들은 유가족 분들이었다.

잠깐 샛길로 빠져보면, 광대는 광대에서 멈춰야지 어떤 지주 노릇을 하려 하거나, 무슨 벌거벗은 권력자 놀음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낸 생의 빛 이상을 소유하려 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어떤 권력자도 자본가도 없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면 자신부터 그러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자본이란 모든 인간 개개인들, 자연 속 모든 물질들이 갖고 있는 고유하고 유일하며 작은 생명의 빛들이 강제로 짓밟히고 빼앗겨진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 이젠 가물가물하다. 선고를 앞두고 잠깐 소회나 적어보자고 앉은 게 꼬박 날을 새버렸다. 베란다를 오가며 담배를 물고 이런저런 상념에 젖었던 시간이 자판을 두드리던 시간보다 훨씬 많았던 것 같다. 그전엔 이런 새벽 시간대가 되면 김수영 시인의 ‘눈은 살아 있다 / 마당에 떨어진 / 눈은 살아 있다 / 젊은 시인이여 / 기침을 하자’라는 싯구처럼 정신이 오히려 텅빈 충만 상태처럼 예민해지고 또렷해지곤 했는데 아무래도 몸을 함부로 굴려 왔는지, 이젠 도무지 내가 쓰려던 문맥조차 잘 잡히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작년부터 시국사범들이 하나 둘씩 늘어간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들 외에도 많아지고 있다. 보건복지개발원과 재능교육 비정규직 투쟁 등에 헌신적으로 함께 했던 정도는 구속되었다가 얼마 전에야 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다. 1차 오체투지 내내 함께 했던 전해투의 강성철 선배도 1심에서 실형 2년을 받고 복역 중이다.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 과정에서,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과정에서 구속된 분들도 많다. 지난 5월 1일 세월호 추모제 건으로도 세 분의 노동자 시민들이 구속당했다. 대통령을 풍자한 전단을 뿌렸다는 죄로 둥글이 박성수 씨도 구속되었다. 4월 11일 세월호 추모제 건으로 영장이 청구되었다가 기각 당했던 세월호 국민대책위의 김현식, 함형재 두 사람도 끝내 검찰이 영장을 재청구하며 결국 구속시켰다. 과거엔 거의 훈방이거나, 48시간 이내 석방이던 건들도 대부분이 구속영장 신청이다. 영장이 청구되었던 권영국 변호사,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 등이 간신히 살아 나올 수 있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이 아닌 ‘재벌독재 공안국’으로 눈에 띄게 이동하고 있다.

‘해고는 더 쉽게, 임금은 더 적게, 비정규직은 더 많이’를 기치로 노동시장을 전체를 개악하려는 반사회적 시도들에 비하면 작은 희생들로 보일 수도 있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등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 공작들, 공공부문 민영화, 공적연금 개악, 이미 완수한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테러’ 등에 비하면 작은 희생들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을 통해 저들이 이루려는 ‘노동자서민 비명 교향곡’, ‘민주주의 압살 장송곡’에 맞서 구체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공안탄압 역시 작은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돌이켜 개개인들의 희생이야 최소화되어야 하고, 안타깝고 위로받아야 할 일들이겠지만 역으로 훨씬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할 일들이 더 분명해지고, 그 길에 함께 하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어느 역사 시대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는 투쟁 없이 쟁취되지 않았다는 교훈들이 다시 살아나는, 그나마 다른 ‘희망’의 징후들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체 승객들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이 대한민국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자꾸 여야가 모두 비슷한 선원들로 보이는 건 단지 착시 현상일까)을 하루 속히 교체해야 모두가 산다는 경험적 진실들이 넓어지고 있는 반증이라고 읽어보면 또 어떨까. 점점 더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상징들로 읽혀지면 어떨까.

그렇게 우리 모두를 위해, 조금 치열해야 할 때.

오늘 가던, 언제 가던 늘 당당하자고

내 자신에게 썼던 시 한 편 더 붙여본다.

천상병 문학상을 받던 날
오전엔 다시 벌 받을 일 있어
서울중앙법원 재판정에 서 있었다

한편에서는 정의인 게
한편에서는 불법, 다행히
벌금 300에 상금 500
정의가 일부 승소했다

몇 년 지나
신동엽 문학상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후엔 드디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벅찬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러운데
벌을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해지니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 졸시 「시인과 죄수」 전문

* 이왕 쓴 김에 홍보 하나 드리자면, 이번 주 5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해고 투쟁 3000일을 맞아, 3000명의 ‘콜친’들이 모여 만들어주는 위로와 연대의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대법원은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만으로도 정리해고가 가능하다고 박영호 사장을 넘어, 대한민국 모든 자본가들에게 선물을 주며, 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려 놓았습니다. 그러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사회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겠다는 이들과 함께들 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같은 날 오후 1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숲속 홍길동’, ‘김천석’ 등 늘 노동자민중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우리들의 인권을 지키다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현장 다큐 감독들 추모제가 열립니다. 이들의 삶을 기려 기륭전자 등 투쟁하는 동지들이 십시일반의 마음을 모아 독립다큐 감독들에게 응원의 연대기금을 전달하는 <제3회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들에게 힘을> 자리도 더불어 열립니다.

필자소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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