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주장은 타당한가
[반론] 교육의 목적과 방향은?
    2015년 05월 06일 09: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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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민경우씨의 [대안학교는 대안인가?]는 기사에 대한 반론이다. 이 글이 ‘반론’의 성격을 띤 것이긴 하지만 부디 생산적이고 성찰적인 논의가 되어서 ‘입장 대 입장’의 대립 확인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점을 밝히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또 ‘교육’이 다루어야 할 범위가 워낙 넓고 다양해 짧은 지면에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글에서는 교육의 목적, 가치, 방향이라는 면에 맞춰 논하고자 한다. 현실적 정책이나 현장 과제를 다 다룰 수 없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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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목표

민씨는 교육의 목표를 ‘청소년들을 최첨단 지식, 쓸모 있는 지식인으로 키우는 것’이라 단언하며 더 구체적으로 ‘교육과 관련하여 양보할 수 없는 최선의 가치는 최고의 지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 향후 전개될 고도지식사회,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타당한가?

1.

그의 주장은 사회가 요구하는 훌륭한 기능 자산으로 키우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것인데, 자본가나 국가 권력이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시하여 이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교육자나 보편 가치를 다루는 지식인이 주장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① 인류 유구의 보편 가치 측면에서나 ② 근현대의 이념에서나 ③ 작금의 시급한 시대정신의 과제에 비추어보나 이런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① 동서고금의 교육의 목표는 사실 다르지 않다. 여러 번잡한 문명 성격에 따른 표현 차이를 넘어 그 속내를 보자면 한 가지다. 다름 아니라 ‘인격의 완성’이다. 그리고 이 시각에는 인격 속에 신성이 내재해 있다는 관점이 깔려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곧 신성의 발견이기도 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하여, 그 출발점에서는 종교와 도덕, 학문의 목적이 다를 수 없다. (제도 권력과 일체가 된 종교 시스템과 ‘궁극적 가르침’으로서의 종교의 심층 본질은 구별해서 논해야 한다. 이 글에서 종교라 할 때는 후자의 심층종교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진화 발전이자 그를 통해 비교우위적 우열 경쟁이 아니라 인간, 자연, 사회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의지했다는 내면의 소리 데몬이나 플라톤의 수행 목표였던 철인이나 플라티누스의 ‘존재의 대사슬’론이나 초기 예수 공동체였던 아리우스파의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로 정신적 해방을 뜻하는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나 힌두교의 내면 신성으로서의 아트만과 세계에 편재한 신성으로서 브라흐만의 일치(범아일여)나 그 취지와 목적은 동일했다. 결국 진리의 발견은(이 진리는 객관성에 편향된 개별 사실과 그 내포와 외연이 다르다) 동시에 인간 잠재력의 궁극의 개발이자 신성의 발견이고 그로 인해 최상의 존재적 지복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이념들이다.

동양에서는 유교가 이상으로 삼는 태극, 도교의 무, 대승불교의 공이 모두 신성의 다른 표현이고 이를 안다는 것은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를 깨달은 인식 수준에 이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학>에서는 학문의 목적을 ‘재명명덕’이라 했는데 이 ‘명덕’이 바로 내면 신성의 다른 표현이다. 이것이 개발되면 ‘친민’하고 ‘지어지선’에 이른다고 천명한다. 이것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의예지라는 4덕으로 인간에게 나타나고 다시 4단 7정의 성정으로 표현되는데, 이렇게 환경과 어울려 발전하면서 왜곡되기도 하는 섬세한 인성을 균형 있게 운용할 능력으로서 중용적 태도를 요구한 것이다. <노자>에서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즉, 언어 논리 수준을 초월하는 비선형, 종합의 세계를 직관하는 인식을 통해 ‘상선약수'(이 경우는 물이 태극이고 그 의미는 뭇 존재에 대한 무한 수용성이다)의 태도에 이를 것을 요구하고 불교에서는 상호의존적이고 종합적인 세계(연기론)가 곧 존재의 실상임을 깨달아 폐쇄적이고 개체적인 자아상을 넘어설 것(무아론)을 요구한다. 이 모두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도덕 담론이 아니고 엄밀한 인간 최상의 경지를 추구해야 하는 당위와 방법에 대한 고차적 가르침들이었다.

교육이란 이러한 최상의 상태에 인간을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와 모두의 이해 갈등을 조화시키고 내면의 자유를 얻어 온 존재가 평화 공존,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하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 우리의 교육 이념이자 건국 이념이 ‘홍익인간’인 것도 이 전통의 지혜들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② 근현대의 기본 이념은 하나로 보자면 신분제와 왜곡된 종교권력에 의해 소외되었던 ‘천부인권’의 회복 선언이고 나누어 보자면 ‘자유, 평등, 박애’다. 개인이 신성과 직접 조우한다고 보는 개신교 교리의 탄생은 여러 역사적 파생 효과를 낳았지만, (부작용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그 기본 취지는 도덕적 개인주의의 선언이자 각자의 내면 신성에 대한 절대 존중 선언이란 점에서 역사의 큰 진보였다. 근대 세계의 도래를 공식화했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자유, 평등, 박애’였던 이유는 사회를 3가지 핵심 구성 요소의 결합으로 보고 그 각각에 요구되는 핵심 덕목을 추린 것이다. 3구성 요소는 정치, 경제, 문화다.

사회가 이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존재 자체가 이미 내적으로 그런 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물리적 신체와 이와 연결 확장된 혼 혹은 정신, 또 이를 초월한 세계를 예지하는 영적 힘의 종합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연과 물리적 교류와 대사 속에 경제를 이루고 이를 타인과 배분하는 질서로 정치를 이루고 현존을 넘어 미래를 내다보는 초월의지와 상상력으로 문화를 이룬다. 그리고 이 각각의 영역에서 핵심 가치가 (순서대로 하자면) 박애, 평등, 자유인 것이다.

박애는 일종의 형제애다. 한 마디로 물적 발전에는 ‘나눔’의 미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여기에는 그렇지 않으면 외적 성장이 내적 갈등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이 깔려 있다.

평등은 산술적, 기계적 획일 분배가 아니고 추상적 권리의 평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어떤 사회든 형성, 유지 발전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유하는 기준과 출발점으로서 공통의 권리 평등 개념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켜짐으로써 수많은 현실적 불균형, 불평등이 감수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중세에는 ‘신 앞에서 운명의 평등’이었고 근대 사회에서는 ‘법 앞에서 권리의 평등’으로 전환되었다. 질서의 출발점이 같고 성과를 함께 나눈다는 전제 위에서 비로소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존재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것이 문화이고(문화 형성, 전수의 핵심 활동이 곧 교육이며) 이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다.

이때 자유는 평등과 대립되는 통념적 의미도 아니요 (자유)경쟁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개념에 대한 이런 오용은 역사적으로 유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일 뿐이고 원래 자유란, 말 뜻 그대로 구속이 없는 상태인데, 정신적 의미에서 구속이 없다는 것은 폐쇄성과 갈등의 뿌리가 되는 인식 수준을 벗어날 때 이루어진다. 더 직접적으로는 악명 높은 ‘이분법적 세계관’이 극복될 때 세계와 인간 자체를 통합,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무지에 기초한 대립 갈등을 넘어 고차원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통찰이 깔려 있다. 이 정신적 자유를 위해 칸트나 쇼펜하우어 스피노자나 니체, 괴테, 슈타이너나 닐스보어 슈뢰딩거 등 민씨가 말하는 양자역학의 아버지들을 포함한 많은 대사상가들이 객체와 주체로 나누어진 세계를 통일시키려는 필사의 노력을 전개했던 것이 곧 근현대 사상의 발달사다.

이 같은 근대 이념에 비추어 본 교육의 목표도 전통적인 가치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오랜 현실 역사에 의해 훼손되고 굴절된 종교-학문-교육-삶의 통합적 이상상을 더 구체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③ 시대정신은 언제나 당대가 직면한 도전과 위기에 의해 규정된다. 오늘날 인류는 인간, 사회, 자연이 공히 문명 차원의 괴멸 위기를 겪고 있다. 60년대 칼 폴라니가 잘 지적했듯 자본주의가 상품 아닌 것을 상품으로 만든, 즉 허구상품 3가지(노동, 화폐, 토지)의 부작용으로 인해 자멸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적나라하게 노정된 것이 오늘날 사회다. 인성은 파괴되고 체제는 양극화 불균형으로 상시적 위기를 반복하고 자연은 재생순환 불가능 지점까지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것은 얄팍한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벗어날 수 없는 명백한 현상이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당대 교육 목표는 이러한 과제를 인식하고 해결의 주체로 나설 세대를 길러내는 것에서 비켜갈 수 없다. 가장 영향력 있는 미래학자 중 한 명인 제레미 레프킨은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에너지 혁명과 의식 혁명. 하나는 고도의 기술에 기초한 스마트그리드 재생순환에너지계 구축이다. 또 하나는 그런 활동을 경쟁적 이윤 확대가 아니라 인류애적 관점에서, 세계체제적 차원에서 이루어낼 수 있기 위해 이기적, 탐욕적, 이성적, 계산적 인간관에서 이타, 공감, 감성적 인간관으로의 의식 전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려면 민씨가 부당 대구로 만든 ‘생태 VS 기술’이라는 대립 관점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의 기술이 필요하며 고도지식사회의 승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협동과 배려, 나눔과 봉사’로 공존, 공감 능력을 키울 것이 요청된다. 이는 일국적 이해가 아니라 시대적, 인류적 과제의 핵심 키워드로 부각되는 것이고 우리 시대 교육도 이 같은 시대정신의 연장 위에서만 세계적 보편성을 띨 수 있다.

위 세 차원 모두에서 민씨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보편 가치도 현대적 가치도 당대적 가치도 논하지 않고 어떤 가치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당장의 경쟁력에 대한 논의로 직진해 들어가 교육의 목표를 논하는 것은 옳다 그르다를 떠나 무의미하다. 포괄적인 삶의 전망에 대한 통찰 없는 교육 목표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이것은 ‘대안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자체의 문제이고 삶의 근본 문제이기도 하다.

학교

2.

그가 말하는 ‘최첨단 지식’과 ‘쓸모 있는 지식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가 단정적으로 규정짓지 않았지만 글의 맥락으로 볼 때, 과학기술(이과)에 능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개인으로서의 경쟁력, 한 마디로 취직 잘되는(?), 쓰임새 있는 이를 말하는 듯하다.

우리 교육 현실의 비참함이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인데, 그 대표적인 야만적 폭력성 중 하나가 문과와 이과의 양단 대립적 구별일 것이다. 사실 애초에 자연과 인간, 혹은 객관과 주관을 대표하는 영역으로 이과와 문과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인간 인식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모독이자 교육 목표에 이를 방법론상으로도 오류다.

분과 학문으로 나누어진 폐쇄 전문성의 함정에 빠져 종합적 인식을 바탕으로만 가능한 진화적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도구적이고 부품적인 기능 인력으로 인간을 위축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 교육 전체를 얼마나 영혼 없이 황폐한 상태로 만들어 왔던가를 길게 논할 필요가 있을까? 말꼬투리 잡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식인’이란 말도 위 같은 맥락에서는 쓰일 수 없는 개념이다. 개별 효용이 아니라 실존과 보편 가치를 논하는 것이 지식인의 정체성이란 것은 지난 세기 이후 합의된 정의 아닌가? 그러니 산업이 요구하는 첨단 기술을 익혀 현실에서 생존력 있는 캐릭터를 지식인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더구나 이런 논의는 기껏 어려운 과정을 통해 통섭, 융합 등의 키워드가 부각된 인류의 지난 노력들을 무화시키고 있다. 국가가 별 의지 없이 사고력, 창의력 교육을 말하고 스티브잡스를 성공 모델 삼아 인문, 기술, 예술의 융복합을 얘기하는 것은 그 진정성 없는 피상성이 진저리나지만 그 흐름 자체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반영한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 세대는 앞선 세대가 실패했던 핵심 오류, 시장과 기술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성장보다 성숙, 경쟁보다 협동,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생태적이고 예술적인 기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이 좁디좁은 대한민국만 벗어나면 오히려 ‘현실적 요청’이다. 왜 교육 선진국 핀란드가 주제 수업을 벗어나 토픽수업을 도입하겠는가? 왜 부디스트 크리스찬이 생기고 과학, 철학, 종교로 삼분화된 인간 인식에 대한 통합 이해의 노력들이 각광받겠는가? 객관과 주관, 개별과 전체의 관통 원리를 찾아내려는 지난한 노력 속에 이제 그 통합의 원리가 부각되고 있는 시대에, ‘최첨단’이라는 용어 속에 숨어 철 지난 기술만능주의와 근대 전형적 병폐인 도구적 인간관을 옹호하는 것은 퇴행적이다.

3.

‘(고도)지식기반 사회’라는 말. 어차피 만들어진 조어에 불과한 말이지만 이 말의 의미는 정보를 생산, 조작, 추출함으로써 사회경제적 가치를 만드는 사회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용어를 떠받드는 시각 속에 이미 모든 것이 ‘이윤’으로 환원되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전형적인 성장지상주의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전에 이제는 더 이상 인류 표준으로 수용될 수 없는 편향성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인식 분화 과정에서 발생한 어느 한 관점으로 세계를 치환 설명하려는 편향을 거듭해왔다. 종교로 기술, 제도, 문화마저 지배하려던 중세가 있었고 우리 시대는 그 역편향으로 기술변화로 나머지를 다 이끌거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어떤 이들은 정치 변화가 곧 세계 변화임을 증명하는 데 목숨을 걸었고 또 어떤 이들은 절대성은 사라진 상대적 해석만이 세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의 인식 수준은 이 중 어느 것이 진리가 아니라 그 모두의 종합이 가능한 인식 패러다임이 있음을 발견해 가고 있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진화 속에 ‘창발’이 실재한다고 보고 빛이 입자이거나 파동이 아니라 그 양 성질을 다 가진다는 사유가 가능해진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다시 한 번, 객관과 주관, 개체과 전체, 기술. 이윤과 가치 등의 한 편에 선 입장은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산업, 경제적 결정론적 시각 위에 쓰여 용어를 그대로 수용할지 반성해볼 일이다.

4.

‘최고의 지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가능한가? 이 대목에서 민씨는 결정적으로 우리 사회 문제를 슬쩍 외면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왜곡이 입시 구조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입시 구조는 철저하게 상대 평가를 통해 무의미한 순위 가르기로 고착되어 있다. ‘경쟁의 역설’, 모두가 열심히 경쟁하지만 그 결과 사회 전체의 공적 경쟁력은 훼손된다는 딜레마에 우리는 이미 빠져 있다. 그런 사회문화 구조를 외면하고 ‘모든 구성원’에게 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며 또 그런 비현실적 공상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들 안에서 강제되는 불합리한 사다리 뺏기 경쟁 구도를 피해갈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이과 편향의 지식이 최고의 지식일 수도 없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나눠질 수도 없고 구조화된 경쟁 양극화의 부작용도 피해갈 수 없다. 이를 두고 마치 대안교육이 현실(?)적으로 필요한 기술 교육을 등한시하는 게 핵심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숲을 도외시한 나무 얘기 아닌가?

대안교육

대안교육연대가 주최한 컨퍼런스 모습 자료사진

제기된 몇 문제에 대한 반론

1) 공부 안한다.

이 문제제기는 현실적으로 일면적으로 맞다. 현실적으로 맞다는 것은 아직 대안교육계의 힘이 인적, 물적으로 제도권만큼 크지 않아서라는 면에서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교육의 주체들이 시기별, 단계별 학습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방종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성장발달에 따른 시기별, 단계별, 수준별, 기질별 교육을 설파하지 않는 대안교육은 교육철학이 성립될 수 없고 대안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양질의 교사 양성, 훈련, 학교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사회 전체의 지원 역량 등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결과가 현실일 터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찰, 조망하지 않는다면 어떤 대안적 시도를 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바쳐 헌신하는 많은 교육운동 주체들을 도매급 인상평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2) 지식의 편향

이 문제 역시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지적이다. 아직 역량 부족인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개선의 노력이 그 역편향 지식의 강화인 것은 아니다.

3) 인성교육의 양면성

민씨는 ‘우리가 사회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협동과 배려, 나눔과 봉사와 같은 미덕도 있지만 때로는 복종과 타협, 조정과 굴복(?) 따위의 경험도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인성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석까지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극복하는 역동적인 인성이지 그것에서 떨어져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에서 발전한 인성은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하며 대안학교의 인성 교육이 편향되었다고 한다. 과감한 주장인데, 도무지 복종과 타협, 조정과 굴복이라는 표현에는 왜 그것을 교육적으로 선체험 해야 할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경험이야 좋건 싫건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인생의 쓴 맛’이란 차원에서 모든 시공간에 널린 것 아닌가? 교육이 아무리 학생을 보호하려고 해도 전 사회적으로, 전 생에 걸쳐 필연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긴 하되 그것이 앞으로 인생이 그러하니 미리 적응(?) 교육이 되어야 할 문제인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내면의 소명을 잃지 않고 억압적인 환경에서도 주위와 공존, 공감 능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인간형으로 성장이 중요할 텐데, 그러기 위해 부조리가 교육적으로 미리 적응 혹은 순응 훈련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유구무언의 궤변이다.

4) 자연친화적 활동의 일면성

민씨는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자연친화적인 활동의 역사적 맥락은 산업사회의 지나친 경쟁구도와 이윤논리에 기반한 무차별한 개발일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안학교의 비전은 너무 복고적이고 탈사회적이다. 마치 노장자나 불교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실수로 보이지만 문장도 정확하지 않다. 대안학교가 말하는 자연친화적 활동이 무차별 개발이라니? 대안학교가 비판하는 바를 지적하려는 것일 테다. 그렇다 보더라도 그 무차별 개발 논리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복고적이고 탈사회적’인가? 유수의 세계적 석학들도 이구동성으로 비판한다. 다만 그 비판의 수준이 보다 고차원적이고 더 종합적인가가 중요하다. 민씨가 이렇게만 지적해서 대상이 분명치 않으므로 더 시비할 수는 없으나 필자는 노장과 불교식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대안학교의 비전은 보고 들은 바가 없음을 밝힌다.(물론 노장과 불교가 비현실적이라는 그의 뉘앙스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5) 소크라테스는 몰라도 된다?

‘터놓고 말하면 다음과 같다. 21세기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몰라도 된다. 그냥 지적 취미 생활로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이나 빅데이터 따위를 모르면 바보(?)라고 봐야 한다. 점을 보고 기복신앙을 갖고 있으며 70년대와 한국전쟁에 묶여 있는 노령층을 탓할 노릇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문고전을 중시하는 다수의 중년층도 시대와 맞지 않는 세계관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부분이 민씨 주장의 백미다. 이에 대해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대꾸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모르고 양자역학을 알 수 있다는 사고야말로 뿌리 없는 열매가 가능하다는 사고이니 가능하지 않은 일을 억지 주장하는 바보(?)라고 봐야 한다. 낱말을 모르고 문장을 만들 수 있는가? 가감승제를 모르고 고차방정식만 할 수 있는가? ‘온고지신’과 ‘거인의 어깨’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보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한 것이거나 심보가 조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고전 중시가 졸지에 기복신앙에 대한 주술 수준으로 보인다면 그가 부러워할 듯한 첨단의 지식인들(그들이 누구인지는 명시하지 않았으나…)도 함께 부정할 듯하니 과유불급의 경망인 듯하다. 미신의 기원은 오히려 대충 알고 확신하는 데 있다.

필자소개
도서출판 '수신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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