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료가 필요한 피고인들
    [범죄와 진보] 국선변호인을 사임한 사유
        2015년 05월 04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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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와 진보>라는 코너를 시작했는데, 필자 사정으로 오랜만에 2회 글을 게재한다. 법과 재판, 민·형사사건을 둘러싼 풍경들은 우리의 맨 얼굴이 드러나는 또 하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부딪히는 범죄들을 살펴보고, 또 범죄와 그것에 대처하는 모습, 태도에서 진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형사사건을 많이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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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세 명의 직원들과 마주친다. 내 방으로 들어가려면 이 분들의 업무 공간 옆을 지나야 하는데, 하루는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일하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이 꾀를 부리는 건가?’ 살금살금 뒤로 다가가 질문을 건네려던 순간 이유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내려놓은 수화기 너머로 웬 아줌마가 악을 쓰고 있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스피커폰을 켜놓은 듯 했다. 부흥회에서 방언이 터진 듯 주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직원에게 이유를 물으니 내 국선 피고인이란다. 국선 피고인이 나에게 배정되면 직원들이 전화를 해서 상담 약속을 잡는데,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니들 고소인이랑 한패지?’라 하고는 숨도 쉬지 않고 욕설을 반복했다고 했다.

    직접 통화하면 나을까 싶어 “저는 아주머니 사건을 담당하게 된 변호사입니다”라 말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접신의 경지에 이른 아줌마는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수화기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 놓고는 쌓여있는 사건 기록 속에서 아줌마의 사건을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사건으로 기소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죄명은 영업방해죄. 동네 포장마차에서 난동을 피운 혐의를 받고 있었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영업방해한 걸로 재판 받고 계시죠? 제가 그 사건 변호해드릴 변호사에요.”목소리를 높여봤지만 아줌마는 여전했다. AM라디오 주파수같은 목소리가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었다.

    전화를 끊었지만, 곧 바로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렇게 이틀이 흘러갔고, 결국 나는 법원에 사임허가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아줌마의 전화 때문에 다른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아줌마에 대한 변호도 불가능 했다. 상담 없이 변호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형사 범죄를 저질러 국선 변호인을 찾아오는 사람 중 일부분은 처벌보다는 치료가 시급해 보인다. 이런 분들의 상당수는 공공장소에서 행패, 무전취식 등의 행위로 기소가 되어오곤 하는데, 문제는 처벌을 받아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아줌마 역시 사기(아마도 무전취식이 원인인 듯), 업무방해, 폭행 등의 전과가 스무 개 가량 있었다.

    처벌보다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행법상 규정되어 있는 것은 치료감호뿐이다. 치료감호란 공주에 있는 국립 정신병원에 갇힌 채 치료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완치 판정을 받을 때 까지 나올 수가 없는데다 좁은 병동에 많은 수의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터라, 피고인들은 치료감호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한다. 미국 영화를 보면 형을 피하기 위해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구는 피고인이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치료감호소 이경희 간호과장은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50명이 적정 인원인데 이곳에는 82명이 수용돼 있다”고 했다. 65평(216㎡) 남짓 되는 이 남성 병동은 감시를 위해 높이를 낮춘 콘크리트 벽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벽 옆에는 82개의 낡은 철제 침대들이 20㎝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침대는 복도와 휴게실 문 앞까지 점령해 ‘야전병원’을 연상케 했다. 불을 꺼놓아 어두운 병동에서 수감자들은 발을 쭉 뻗기도 힘들 만큼 작은 침대 위에 움츠리고 누워 있었다. 공간이 없어 매트리스만 놓고 생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텅 빈 병동’과 ‘꽉 찬 병동’이라는 극과 극 상황은 인력 부족 때문에 빚어졌다. 이 과장은 “병동을 관리·감독할 인원이 부족해 다른 병동을 비우고 한곳에 최대한 많은 수용자들을 몰아넣은 것”이라고 말했다.(2013. 9. 11.자 국민일보 기사)

    치료감호소

    공주에 있는 법무무 소속 국립 치료감호소의 모습

    이러다 보니 피고인의 상태가 어지간히 중하지 않고서는 치료감호가 청구되질 않는다. 세밀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에 망치 같은 치료감호밖에 없으니 차마 이를 휘두르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핀셋, 조각칼 같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류의 글에서 이쯤 되면 늘 소환되는 독일 사례를 하나 소개하자면, 독일은 사법정신의료병원(Forensic Psychiatric Hospital)을 두어 치료감호를 보내기에는 경미하나 치료가 필요한 피고인에게 치료명령을 내리고 있다. 감옥에 보내거나 국립 정신병원에 가둔 상태에서 치료를 받는 대신 집에서 사법정신의료병원을 꾸준히 다니도록 하는 것이다. 처벌에 가까운 치료와 방치밖에 없는 현실에서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하는 별 쓸데 없는 에필로그

    며칠이 지나고 재판이 있어 법원에 갔다.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있어 순서를 기다리는데 재판장이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그 아줌마였다. 영화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 같은 헤어스타일, 안경과 완고해 보이는 입술부리가 곧 벌어질 일을 암시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강 건너 불구경이 시작될 참이었다.

    “저는 결단코 포장마차에서 소리를 지른 적이 없습니다. 주인이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아. 콜센터 직원 같은 가성 섞인 옥구슬 굴러가는 조리 있는 말투였다. 기적의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아줌마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줌마의 패악질을 직접 경험한 터라 아줌마의 호소가 새빨간 거짓말임을 100%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아줌마의 점잖은 태도였다. 사임계를 제출한 나는 도대체 뭐가 되냔 말인가? 국선변호사는 인권 수호의 최종 수비수다. 국선변호사마저 변호를 포기해 버리면 누가 그 사람을 변호하겠는가. 졸지에 영화에 나올 법한 불성실한 변호사가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무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손을 들고 일어나 ‘진짜 사임할만해서 사임한 겁니다’ 변명을 시작하고 싶었다.

    괜히 벌개진 얼굴로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사무실 직원 분들이 떠올랐다. 판사한테 다르고 변호사한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얘기인 즉, 변호사한테 다르고 직원들한테 다른 사람 있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아줌마조차도 판사 앞에서는 정신을 붙들고 시치미를 뚝 떼는 판이니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직원들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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